데이브레이커스

 

 

 

영화로 충격 받는 일이 요즘에는 잘 없는데, 간만에 뒤통수를 맞은 듯정말 재밌게 보았다.

 

물론 나는 흡혈귀 영화나 좀비 영화는, 일단 어지간하면 본다. 그리고 어지간하면 재밌다고 생각한다.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정서는 아니다.

 

데이브레이커스의 질문은 cure subsitute, 즉 벰파이어 바이러스로부터 치료를 받을 것이냐, 아니면 혈액의 대체제를 계속해서 판매할 것이냐, 그 질문으로 모인다. 바이러스로 문제를 처리하고 나면, 사실 이 두 가지의 질문만이 남는다.

 

여기에 최근의 다국적 제약회사에 대한 은유가 따라 붙는다. 당연히 계속해서 판매를 해야 회사에 이윤이 남지, 그 거대한 원인을 제거하고 나면 회사가 성립될 근거가 사라진다. 좀비 영화에 비하면, 흡혈귀 영화들이 고전적으로 자본주의에 대한 질문을 좀 더 적극적으로 하는 것이 전통이다. <데이브레이커스>는 이 전통 위에 놓여 있다. 드라큐라 백작 이후의 설정들을 잘 살리면서, 다국적 기업으로 전환된 지금의 회사들의 문제점을 드러내는

 

그런 점에서는 설정이 <인셉션>과 유사하다. 여기서도 다국적기업의 경영이 주요한 설정인데, 이 경우에는 대체 에너지원을 찾아나가는 에너지 회사이다. 쉘이나 BP 같은 데를 상상하면서 보면 훨씬 재미있다. 그리고 <데이브레이커스> <캣우먼>에서 처음 시도되고 <레지던트 이블>에서 전면화된 다국적 제약회사들, 우리의 경우는 한미 fta를 뒤에서 조정하고 있는 실질적인 세력 중의 하나로 의심되는. 넓게 보면 제주도 등 영리병원을 지지하는 그 세력들과도 어느 정도는 맞닿아 있는 다국적 제약회사들을 혈액은행으로 은유했다.

 

흡혈귀에서 다시 인간으로 돌아오는 게 여기에서는 cure의 주요 모티브이다. 내 기억상으로는 아마 이 경우는 처음이 아니었나 싶다. 흡혈귀이지만 더 이상 피를 빨지 않게 된 모티브는 <어딕션>에 나온 적이 있다. 그 때에는 벰파이어에게 피는 일종의 기호의 문제 즉 중독과 같은 것으로 처리되었다. 하긴 <어딕션>에서는 니체나 이런 철학자들이 모두 흡혈귀였다는 기막힌 설정이 나온다. 그리고 여자 주인공이 철학과 박사과정에서 박사 논문을 쓰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고, 정말 공포스럽던 마지막 피의 향연이 벌어지는 순간이 철학 박사 수여식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데이브레이커스>에서 피라는 것은 이런 선호와 기호에 의한 중독 문제는 아니다. 그보다는 훨씬 더 중요한 에센스 혹은 엑기스 같은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일정 기간 피를 마시지 못하거나 피가 없어서 자신의 살을 먹으면 서브사이더라는 변종으로 돌연변이를 일으킨다. 흡혈귀 내에도 계급적 서열이 있고, 그 안에 인간보다 못한 존재로 전락하는 것이 서브사이더라는 설정이다.

 

좀비영화 <28일후>가 그랬던 것처럼, <데이브레이커스>가 설정된 세계는 말더스의 세계이다. Population model에서의 피식자와 포식자 사이의 predator-prey 모델의 세계이다. , 간단한 거다. 인간이 계속해서 줄어들고 결국 멸종 위기에 몰리게 되고, 그러면 자연히 혈액 위에 세워놓은 벰파이어 경제는 물론이고 정치사회 시스템까지도 위기에 몰리게 된다. 스스로 재생산하지 못하는 문명의 장기적 균형에 관한 질문이다.

 

이 상황에서 모든 것의 키를 쥐고 있는 것은 경제의 맨 하반부를 점유하고 있는 다국적 제약회사의 실험실이다. 당연히 주인공이 그 실험을 주관하고 있는 혈액 박사 흡혈귀로 설정되어 있고.

 

에단 호크는 <트레이닝 데이> 이후로 아주 재밌게 지켜보는 배우인데, 여전히 재밌다. 어떤 면에서는 <로마클럽 보고서>를 처음 준비하던 도넬라 메도우 여사의 젊은 시절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윌렘 데포는 <쉐도우 오브 벰파이어>에서 막스 슈렉을 기똥차게 연기한 적이 있다 (에니메이션 <슈렉>의 이름이 여기서 온 거 아닌가, 나는 아직도 그렇게 의심을 하고 있다.) 독일 표현주의 시절의 그로테스크한 화풍으로 연출된 막스 슈렉만큼, 다시 흡혈귀를 연기한 윌렘 디포는 그 정도까지 인상적이지는 않았다.

 

어쨌든 내가 만약 흡혈귀 영화를 만든다면, 아마도 이렇게 생긴 걸 만들지 않았을까, 그런 느낌을 받았다. 참 잘 만든 영화이고, 예산 많이 들이지 않고도 필요한 효과들을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한국에서는, 별 볼 일 없었다. 130

 

어쨌든 이 이후로 한동안 놓고 있던 SF 영화 기획 작업을 다시 시작했다. 20억 미만의 저예산 영화를 목표로, 문명의 전환이라는 주제를 다루는 것에 대한 논의를 지난 주부터 시작했다.

 

'영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에반게리온 Q를 보고 나서  (2) 2013.06.16
추억을 곰씹는다  (1) 2012.12.01
KU 시네마테크  (1) 2012.07.20
KU 시네마테크, 사무라이 액션 특별전  (1) 2012.07.08
<두 개의 문>에 관한 짧은 메모  (0) 2012.06.26
Posted by retir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