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준비 거의 끝

 

처음 공부를 시작할 때에는 경제사상사로 시작을 했다. 아마 공산권이 붕괴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평범하게 자본론에 대한 연구를 하고, 경제사상사와 경제철학 사이에서 책을 읽고, 또 책을 쓰는 그런 삶을 살았을 것 같다. 그렇지만 경제사상사나 경제학설사는 대학에서만 할 수 있는 일이다. , 그럴 기회가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그러나 내가 강단에 서서 경제학설사를 가르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곳은 외국의 대학 밖에 없었다. 외국에 그렇게 가서, 그냥 그렇게 다른 나라를 위해서 살고 싶지는 않았다.

 

학위 받은 순간부터 치면 올해가 17년째인데, 그 동안 해보고 싶었던 것은 대부분 어떤 식으로든 해본 것 같은데, 학설사 강의는 동국대에서 한 학기 짜리로 딱 한 번 해본 것 같다. 그리고 대부분의 시간을 공대에서 강의를 했다. 겸임교수는 두 번을 했는데, 두 번 다 공대에서. 그냥 공대에 눌러앉아서 살아도 되기는 했는데, 내 머리 위로 윤진식이 오는 바람에.

 

하여간 이제 내려놓으면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학설사 수업을 제대로 못해본 것, 경제철학이라는 수업을 개설해보지 못한 것, 그 정도이다. 한국사회경제학회에 더 이상 후배가 들어오지는 않는다. 아마 이런 걸 진지하게 공부했던 사람은 내 대에서 끝나지 않을까, 그런 얘기들을 좀 한다.

 

때로는 정부를 통해서, 때로는 시민단체를 통해서 내가 원하는 세상을 구현해보려고 참 무던히도 애썼던 것 같다. 한미 fta와 함께 현업 학자로서의 삶을 내려놓는 것,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럴 수 있어서 내 삶은 보람 있던 것 같다.

 

혼자서 할 수 있는 거로는 꽤 오랫동안 버틴 것 같은데, 어차피 이 정도가 한계치가 아닐까 싶다. 시뮬레이션 모델링 작업 같은 거를 더 해보고 싶었지만, 이제는 내 눈이 그런 수치 작업과 모델링 작업을 허락하지 않는다. , 누구나 나이는 먹는 거니까.

 

이제 대선 국면으로 들어가면서 캠프에 들어갈 어지간한 사람들은 다 들어갔다. 나는 안 들어가기로 마음을 먹었고, 아마 이 정도가 내가 할 수 있는 거의 최대치가 아니었나 싶은. 그렇게 내려놓으려고 한다. 정부에 오래 있었고, 또 그 후에도 이런저런 방식으로 자문을 하거나 정부 운용하는 데 계속해서 참여할 기회들이 있었다. 그런 것도 이제는 내려놓으려고 한다.

 

내년에는 별 계획은 없다. 일단 겨울에는 오랫동안 해보고 싶었던 동화책을 쓰려고 한다. 에니메이션 기획에 대한 제안들이 가끔 오는데, 아직 딱 이거다 싶은 내 얘기가 있는 건 아니다.

 

올해 준비한 영화는 캐스팅 중이다. 끝없는 기다림

 

아마 앞으로 강의를 하게 될 일이 있더라도 경제학과에서 경제학에 대한 걸 하지는 않을 것 같고, 지금까지 내가 분석하는 영화들에 관한, 그런 분석 방법론 같은 거, 그렇게 되지 않을까 싶다.

 

올해까지는 책들을 다 정리하려고 했었는데, 경제 대장정 시리즈가 아직도 끝이 안 났다. 시리즈는 마저 할지, 아니면 덮을지, 그건 좀 놀다가 천천히 생각해보면 될 일이고.

 

그냥 시민의 한 사람으로 혹은 영화 기획자나 동화작가, 그렇게 살살 살면서 해보고 싶었던 것, 그런 거 하면서 살아갈 생각이다. 의미와 의무로 사는 것, 오래 살았다. 난 그렇게 사회적 인간도 아니고, 남들 앞에 서는 게 행복한 스타일도 아니다.

 

무엇보다 나는 대인기피증이 깊다. 여전히 그렇다. 그래서 사람들 만날 때 결국 술을 마시게 되는데, 그렇게까지 사회를 위해서 영원히 사는 건 아닌 듯 싶고.

 

어쨌든 처음으로 내년도 계획을 세워보는 중인데, 경제학자로서 해야 하는 일이 리스트에는 없다.

 

나름 홀가분하다.

 

그러고 나니, 경제학설사 같은 거 제대로 강의를 못해본 게 약간 아쉬움으로 남기는 하지만. 그렇게 중요한 일은 아니고.

 

내일은 아기 낳고 처음으로 아내와 잠시 여행을 가기로 했다. 모유수유 중이라서 멀리는 못 가고, 강화도나. 살면서 진짜로 중요한 일은 따로 있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이 문득문득 든다.

 

대선 이후에 나꼽살 종료하는 게 아쉽기는 하다. 누군가 그걸 계속 이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있지만, 그 방송이 은근 품이 많이 들어간다. 출연자 4명에, 작가와 매니저 그렇게 여섯 명이 지난 1년간을 죽도로 뛴 건데, 한 회분 방송 기획이 보통 2~3주 걸린다. 공중파 같으면 3~4팀이 붙어서 돌아갈 상황인데, 그걸 그냥 몸으로 때우면서 온 거라서. 설날, 추석, 그럴 때도 안 쉬었다.

 

얼마 전에 안철수 쪽에 나꼽살 초청 메시지를 보냈다. 아직 여의치 않다는 내용의 문자 메시지가 왔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거기까지가 아닌가, 딱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안철수 쪽에서 답이 오면, 문재인 쪽에도 연락을 하고, 혹시 분위기가 좋으면 둘이서 토론할 수 있으면 더욱 좋겠고그런 생각을 했었는데, 지금 우리의 맨 파워로는 이 이상은 무리다. 지금도 이미 무리한 거고.

 

돌아보면, 삶이라는 것은 늘 아쉬움의 연속 아니겠는가? 아쉬움을 남기고 뭔가를 정리하면서, 그렇게 삶은 계속된다.

 

경제학 아니라도 세상에 보람 있는 일은 얼마든지 있다.

 

내가 활동하던 시기는, 한국에서 경제 이데올로기가 극한으로 올라가던 시기였다. 명박과 함께, 그 한 시대도 끝나가는 듯싶다. 돈만을 숭상하면서 모두가 달려가던 한 시기, 그건 진짜 재미없던 시기였다. 그 지랄 끝이 바로 명박의 시대 아니었겠는가? 근혜 시대가 오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 그렇게 지난 1년을 보낸 것 같다. 그러나 삶을 언제까지 이렇게 비상 상태로 만들어놓고 살 수는 없다. 우리들의 비상 상황은 이번 대선으로 끝나야 한다. 경제학자가 마이크 쥐고, 이건 아니다, 저건 아니다, 그런 상황이 정상적인 건 아니다.

 

대선 쌈박하게 이기고, 내년부터는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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