턴테이블이 집에 두 개 있고, 안 쓰는 앰프가 진공관 앰프까지, 또 몇 개가 더 있다. 물론 다 애들 태어나기 전의 일이다.
지금은 디지털 앰프 하나 TV 밑에 낑겨 놓고 겨우겨우 쓰고 있다. 턴테이블 놓을 데도 없다. LP들도 그냥 놀고 있다. 몇 달 전에는 블루투스 되는 턴테이블을 살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렇지만 역시 놓을 데가 없다. 지금까지는 애들 때문에 감히 엄두도 못 내었는데, 애들이 좀 크니까 이제 놓을 자리가 없다. 자리가 왜 없냐고? 애들 책장들이 여기저기 이미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 그렇다. 턴테이블 놓는다고 애들 책장 치운다고 했다가는 맞아죽을 것 같다.
음악은 LP 우선, 없으면 CD 그러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는데, 요즘은 다 택도 없는 얘기다. 그냥 핸펀 블루투스로 듣는다. 마지막 존심이라면, 그래도 유튜브로 음악을 듣지는 않는다는 것 정도.
언젠가 나도 와트퍼피 제대로 해놓고 듣겠다고 생각하면서 살지만, 그런 날이 올지는 모르겠다. 나도 이제 방마다 하나씩 시스템을 갖춰 놓고 있던 시절의 열정 같은 건 없다. 그저 여유 되면 스피커나 좀 더 바꿔보고 싶은 정도.
최규성의 <빽판의 전성시대>는 나보다 더 얼척 없는 사람들이 한국에 많다는 것을 보여주는 책이다. LP도 제대로 관리하기 힘든데, 빽판이라니..
나도 빽판이 몇 장 있기는 하다. 중고등학교 시절, 원판이라고 하는 수입 앨범은 너무 비싸서 엄두를 못 냈고, 라이센스판을 주로 샀다. 그래도 청계천을 헤매면서 빽판을 사게 된 건..
순전히 금지곡 때문이다. 핑크 플로이드는 당연히 금지곡이었고, 딥 퍼플은 음악은 금지곡이 아닌데 녹음된 장소 때문에 앨범이 금지 앨범이었다. 라이브 인 재팬, 일본 공연에서 하이웨이 스타 등 기가 막힌 연주가 있었는데, 요 앨범도 구할 수 없는. 그리고 간 김에 구하기 어려운 앨릭 클랩튼 더블 앨범 같은 것들도 사고.
몇 번 사봤는데, 음질 개판이다. 도저히 못 들어주겠는.. 그래서 초반에 몇 장 사고 말았다.
책을 보면서 나는 ‘빽판’이라는 말의 유래를 알게 되었다. 이것도 좀 슬픈 일이다.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가 왜색으로 밀려서 금지곡이 되었다. 당연히 일본에서는 판매가 되었고. 이걸 불법으로 판을 만들어서 한국에서 유통을 시키다 보니까 정말 앨범에 아무 라벨도 붙이지 않은, 흰색 종이만 덜렁 붙어있는 빽판이 된.. 다들 뒤로 유통시키는 back에서 나온 말이라고 생각했을 것 같은.
그리고는 군사 정권 시절 양희은 등 금지곡 시대가 온다. 아침 이슬 같은 노래들이 들어간 양희은 앨범 제목이 ‘고운 노래 모음’이라는 것도 이번에 알았다. 진짜 고운 노래 같은 얘기다. 3집까지 나왔었나 보다. 백구 같이 지금도 내가 종종 부르는 양희은의 노래들이 다 이 시절의 얘기다.
그리고 대마초와 함께 신중현이 압박 받으면서 김추자의 노래들도 빽판으로. 신중현의 ‘아름다운 우리강산’의 금지곡 사유가 ‘창법 미숙’이라는 걸 보면서 한참 웃었던 적이 있다. 그런 식으면 꽤 많은 가수들의 노래는 다 창법 미숙이다. 노래 못 한다고 금지곡 씩이나..
유라이어 힙의 ‘줄라이 모닝’이나 Lynyrd Skynyrd 같은 건 빽판으로 듣지는 않았고, 나름 라이센스판으로 들었는데, 아직도 우울한 때면 종종 듣는다. 그렇지만 하도 뚜드려 대는 노래라서, 애들 있을 때 듣기는 어렵다. 지방에 갈 때나 차 안에서 소리 왕창 올려놓고 (결혼하기 전, 내 차가 차 값 보다 스피커와 앰프 등 오디오가 더 비쌌던..)
슈베르트의 연가곡집에 관한 책에 대해서 서평을 쓴 적이 있다. 한국에서 누가 슈베르트의 연가곡집을 그렇게 줄 맞춰서 듣는다고 죽어라고 책을 썼던 것도 얼척 없었지만, 뺀판의 역사는 더더욱 얼척 없었다.
50이 넘으면서 내 삶도 많이 바뀌었고, 취향도 많이 바뀌었다. 아니, 바뀐 게 아니라 바꾸었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LP 틀어주는 술집에는 이제 안 간다. 그런 데서 사람들 바람 피는 것 너무 많이 봐서 질렸다. 그리고 그런 데서 감정이 높아져서 평소 같으면 하지 않을 말도 하면서 싸우는 경우도 많이 봤다. 과거로 가게 되면 억지로 봉합해 놓았던 옛 기억들이 폭발하게 된다.
아주 작고 맛있는 그런 식당에도 안 간다. 너무 분위기 찾다 보면 고립되고, 같이 다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자꾸 나누게 되고. 적당히 먹고, 맛있게 먹고, 그렇게 식당 고르는 취향도 바뀌었다.
아마 내가 진공관 앰프 처박아 놓고 있는 것과 턴테이블 놀리고 있는 것들이 다 그런 변화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너무 감정이 고양되는 상황은 이제 피하게 된다.
그렇지만 가끔 옛날 노래 듣고 싶어지는 적은 있다. 그럴 때면 멜론에서 찾아서 듣는다. 이제 음악은 마음으로 듣는 거라는 생각이 더 강하다. 적당한 정도의 음질이면, 그냥 행복하게 듣는다.
그렇기는 한데.. 비 오는 일요일 오후, 빽판 앨범과 오래된 가수들 이름 넘기면서 잠시 살아가는 시름 같은 것을 내려놓을 수가 있었다. 마침 아내가 저녁 약속이 있어서 나갔는데, 애들이 옆에서 같이 책을 읽고 있었다. 박원순 떠나고 이래저래 심난한 일요일, 빽판의 레트로 B급 감성과 함께 나의 지난 날들을 잠시 돌아볼 수 있어서 좋았다.
새 책 읽기 시작한다. 코로나 이후로 의료 공공성과 시스템 그리고 원격 의료와 민영화가 한바탕 붙을 모양이다. 나는 예방의학 강화 쪽이 기본 입장이다. 물론 잘 안 먹힌다. 밥통들은 한국이 갈 길은 의료+관광, 태국처럼 되고 싶어한다.. 마음 속 깊은 곳에 태국을 선망하는 경제 관료들, 참 이해하기 어렵다.
너무 친했던 친구의 책인데, 진짜 뒤늦게 읽었다. 마침 작년에 마이크로 그리드 한참 작업했던 적이 있어서, 정말 재밌게 읽었다.
도헌이는 친구기는 친구인데, 친구라기 보다는 내가 많이 배웠던 관계다. 참 똑똑하고, 참 잘 났다고 생각했다. 살면서, 이런 친구를 알았다는 게 참 자랑스러웠다. 아내한테도 여러번 얘기해서, 아내도 좀 안다.
성공한 50대 남성의 좀 잘 나가는 - 그래서 좀 재수 없는 - 그런 느낌이 싹 빠지지는 않았다. 그게 유일한 책의 단점인 것 같다. 누구나 다 그런 고비를 넘어갈 수는 없는 거니까.
사실 난 친구가 그렇게 사는지도 잘 몰랐다. 금융계 어딘가 가서 엄청 잘 나간다는 얘기를 얼핏 들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걸 다 내려놓고 돼지농장 한다는 얘기를 들으면서도, 뭐 어지간하게 하겠지.. 그랬다.
장하준 생각이 얼핏 났다. 장하준과는 자주 보는 사이는 아니다. 지금은 중국 대사로 가 있는 장하성 선생과는 그보다는 자주 봤다. 장하준은 잘 모르지만, 그의 부친과는 같이 일을 했던 적이 있다, 꽤 긴 기간 동안. 그가 산업부 장관이던 시절이다.
장관이 뭘 하자고 하면, 결국 돌고 돌아서 내 책상 위에 올라온다. 그러면 나는 비상 걸고, 대략 20명 정도의 사람들과 밤을 새운다. 2박 3일.. 그 짓을 꽤 길게 했다. 툭하면 밤을 새우기는 했는데, 밤새운 게 보람 있었던 산업부 장관으로는 유일하게 기억에 남는 게 장하준의 아버지였다. 나머지 넘들은, 대체 왜 나와 동료들의 건강을 깎아가면서 밤을 새웠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이한동 총리 시절에도 밤 많이 새웠다. 그 때도 보람이 있었다. 그렇게 딱 두 사람이 밤을 세워서 뭔가 써줘도 보람 있던 기억으로 남는다. 장하준은 그런 아비의 아들이라서, 만나기 전부터 뭔가 많이 접어주고 들어갔다.
대표적인 엄마 친구 아들들이다. 나는 그냥, 엄마 아들이다. 맨날 혼나고, 아직도 혼 난다.
도헌이 책을 보면서 장하준을 만나던 시절이 잠시 생각이 났다.
책을 덮고 잠시 생각을 해보니까, 나는 장하준 보다 도헌이가 더 자랑스러운 것 같았다. 삶이 그래서 그런지, 도헌이에게는 먹물 기운과 금융 기운 같은 건 이제 다 빠진 것 같다 (아직 아저씨 기운은 좀 남은 것 같은..)
장하준의 인생을 생각하면, 아직도 남아 있는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설레임은 없다. 도헌이는 이제부터 그가 꿈꿨던 마을의 클라이막스가 기다리는 것 같아, 설레임이 있다.
그 설레임은 좀 더 많은 사람들이 꿈꿔도 좋을 것 같다.
(둘째한테 올해는 도헌이네 마을 축제에 갈 거라고 했더니, 얘가 어린이집에서 무슨 설레발을 쳤는지, 선생님들도 가고 싶으시다고 하신다.. 다 가도 좋을 것 같다. 그런 설레임의 공유 같은 게 책을 덮고 난 느낌이다.)
네이선 울프의 '바이러스 폭풍의 시대' 다 읽었다. 트위터나 페북의 단어 패턴의 변화를 통한 빅데이터 분석이 바이러스 예고제의 한 방식이 될 수 있다는.. 이걸 위해서 유클라 대학의 종신교수직을 내려놓은 사나이의 인생에 관한 이야기다 (첨단 기술 같은 것은 이 기관에서는 기대하지 말라는 얘기 보면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나머지는 잘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얘기인데, 레트로 바이러스 설명하던 각주에 나왔던 내생성 바이러스라는, 각주에만 딱 두 번 나온 단어가 밤 새서 읽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을 주었다 (그러나 나는 보던 '미스터 션샤인'을 마저 보았다.)
전에 레트로 바이러스 볼 때는 뭐가 이렇게 복잡해, 그러고 말았었다 (그것도 벌써 10여년 전의 일이다..) 올해 분자 생물학을 다시 공부하겠다고 마음을 먹고 나서 보니까, 뭐.. 그렇게까지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은 아니었던.
몇 년 전에 hiv 관련된 걸 좀 보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때만 해도 뜨문뜨문 봐서.. (뒤늦게 후회막급.)
독서 후의 비슷한 느낌이라면, 소설 '마션'을 보고 난 뒤에 뭔가 코미디를 읽은 것 같다는 느낌과 비슷? 네이선 울프가 의외로 코미디가 강한 사람이다. 대놓고 웃기려고 하는 건 아닌데, 다음 단계로 넘어갈 때 꼭 한 번 비틀고야 마는. (인류학 공부한 거 아닌가 싶었는데, 역시 중간에 그런 내용이 나오기는 하던.)
여유 되는 대로 바이러스 책 몇 십 권 더 읽기로 했다. (아, 결국 영어 책을 읽어야 한단 말인가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