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 이재영, 1주기

 

 

 

 

오늘이 이재영 1주기 행사가 있는 날이었다. 내가 이재영과 보냈던 시간을 생각하면 밤을 새워 술을 먹고, 새벽까지 그의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도 모자라지만, 12시가 되기 전에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요즘 아기 보는 중이다.

 

이재영과 만난 게 2003년이었으니까, 이래저래 딱 10년이 된 셈이다. 민주노동당을 만든 바로 그 이재영, 사실 나는 한 것도 별로 없이 그와 과도하게 우정을 나눈 것인지도 모른다. 하여간 지난 10년간, 정말로 신나게 놀았다.

 

개인의 사적인 삶도 결의하느냐,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이재영과 나는 많은 것을 술자리에서 결의했고, 결의한대로 살았다.

 

우리가 이렇게 살 게 아니라, 결혼을 하고 아기를 낳자

 

, 진짜로 그렇게 우리는 결혼을 했다. 그리고 아기는, 이재영이 두 명, 나는 한 명, 그렇게 낳았다.

 

살다 보니, 이재영과는 사는 동네도 한 동네였다. 문정동 살던 시절, 우리가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시내로 가자! 여의도에서도 멀고, 다 먼데서 이럴 필요가 있냐

 

이사도 같이 했다.

 

그렇게 우리는 송파구를 떠나서 지금 사는 동네로 같이 이사도 했다.

 

개인의 사적인 삶도 다 같이 했다, 이재영과 나는.

 

나는 여전히 이재영에 대해서 모르는 게 많이 있었지만, 이재영은 나에 대해서 모르는 게 없었다.

 

그런 친구가 죽었다….

 

이재영이 남겨놓고 간 두 명의 아기들과 그의 미망인에 대해서는, 나는 걱정을 안 했다. 정말로 어려워지면, 내가 챙기면 되니까.

 

친 피붙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식구와 같은 존재인데, 뭐가 문제인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 이재영의 1주기 행사

 

참 좋았다.

 

노회찬, 조승수 등등, 이재영 살았을 때, 많은 것들을 같이 한 아저씨들, 간만에 봐서 좋았다. 이재영이 있었으면 더 재밌고 즐거웠겠지만, 그가 없으니 새벽이 되기 전에 집에 올 수 있게 되었다.

 

하여간 이재영이 없어진 다음에 생긴 제일 큰 변화는, 내가 무엇을 하고 뭘 하고 싶어하는지, 그 전체를 아는 친구가 없어졌다는 점이다.

 

나도 많은 친구들이 있고 많은 지인들이 있지만

 

그들은 나의 일부만 안다. 나의 전체를 아는 사람은 이재영과 아내 밖에 없다.

 

아내는 늘 같이 있고, 이재영도늘 같이 있었으니까.

 

그래서 진짜로 고민스러운 일이 생겼을 때, 상의할 사람이 없어졌다.

 

이재영이 있을 땐 몰랐는데, 그가 없어지니내가 그에게 얼마나 의존하면서 살아왔던지.

 

하여간 농담같이 살면서 그와 했던 많은 얘기들이, 이제 다시 하나하나 되살아나는 밤이다.

 

이젠, 이재영이 없다.

 

나 혼자, 판단해야 한다.

 

그랬던 적이 없어서, 더욱 그가 보고 싶다.

 

끔찍하게도 보고싶다.

 

 

(길거리에서 잠깐, 이재영 추모를 위한 연설회가 열렸다. 노회찬 대표가 이재영을 추모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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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 마키아벨리 이후의 책은 필요 없다!

 

박근혜 취임 6개월, 이 나라가 아주 황당해졌다.

 

삼국지에서나 보던 10상시, 열 명의 내시 대신에 3상시, 뭐 그런 얘기들이 이제 언론을 통해서 흘러 나오고 있다. 인수위 시절에는 문고리 3인방이라는 단어를 쓰던 시절이 있었는데, 이제는 정말 고전틱하게 3상시.

 

문고리 권력, 핸드폰 권력, 이런 얘기들이 2013년 하반기의 대한민국을 이해하는 가장 정확한 용어라니, 이거야 된장!

 

사회과학에서 많은 경우 근대의 출발을 마키아벨리로 이야기한다. 신의 얘기를 듣는 것도 아니고, 그냥 자기 이익을 위해서 움직이는 이 복잡한 인간들을 어떻게 조율할 것인가, 그 첫 번째 얘기가 군주론에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권모술수에 대한 얘기는 삼국지, 초한지, 열국지, 아주 지겹도록 우리가 본 것들이기는 한데,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그런 고전들과는 좀 다르다.

 

공익에 대한 논의에서, “짐은 곧 왕이다”, 그러므로 프린스의 이익이 국가의 이익이라는, 조금은 역설적인 공리 위에 마키아벨리의 이야기들이 서 있다. 요즘 눈으로 보면 영 아닌 듯 싶지만, 중세를 지나면서 귀족들과의 갈등 속에서 민족국가, 소위 군주를 중심으로 민주주의를 만들던 논의, 그 한 가운데 마키아벨리 얘기가 있는 것 아닌가. 그래서 거기에서 근대 논의의 출발점이 있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

 

시기적으로 따져봐도 그렇다. 경제학의 아버지를 아담 스미스라고 부르면서 국부론을 그 출발점으로 보는 경향이 많다. 그러나 그 이전에 있는 중상주의 그리고 약간 뒤에 나온 리스트 등의 독일 관방학파, 그 논의가 경제학 논의가 아니라고 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그들의 출발점에도 공익이라는 개념이 있다.

 

각자 알아서 돈을 벌든지 나쁜 짓을 하던지, 어쨌든 과정 속에서 그것이 공익이 되게 만드는 것, 마키아벨리는 그것이 군주의 이익이라고 했지만기능적으로 군주만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관한 얘기가 아니라, 사실은 사익에 불과한 귀족들을 어떻게 제어하면서 전체적으로 국가 기능을 조율해나갈 것인가, 그게 마키아벨리의 세계관이다.

 

그냥 하늘이 천자를 임명했고, 그 군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다는 삼국지의 세계와 마키아벨리의 세계는 언뜻 유사해 보여도 전혀 다르다. 마키아벨리의 세계에서 하늘의 뜻, 신의 의지, 그딴 건 없다. 다 귀족들이 왕을 제어하면서 자기 배를 불리기 위한 개소리, 중세를 뚫고 나온 그 목소리가 결국 새로운 세계를 열었고, 그게 자본주의가 되었다.

 

그에 비하면 아담 스미스는 한 템포 늦다. 그는 이미 영국 글래스고우에 매뉴팩처 단계를 벗어난 진짜 공장에 분업이 시작된 바로 그 현장을 보고 국부론을 쓴 것이니, 이 새로운 시대는 마키아벨리가 연 것이다, 이렇게 얘기하는 것 아니냐?

 

하여간 이건 상식적으로 학계에서 하는 얘기다.

 

그리고 그렇게 이어진 근대가 한계에 부딪히니까, 소위 포스트 모던이라고 평론계를 휩쓸고 갔던, 데리다 이후의 탈근대화 논의 아닌가?

 

데리다식으로 얘기하면, 근대라는 거대한 구조물을 해체해야 그 다음 단계의 세계에 대해서 논의할 수 있다는 것 아닌가?

 

, 이건 그냥 상식적 수준을 얘기한 것인데

 

한국의 지금 상황을 보니, 근대 이후의 한국, 박근혜와 함께 거의 중세 수준의 시대로 와버린 듯하다.

 

지금 한국에 필요한 단 하나의 학문이 있다면 그건 제왕학이 아니겠는가?

 

도대체 어떻게 제왕들이 다양한 권모술수를 통해서 신하와 백성들을 장악했는가, 그거 하나면 충분하다. 다른 학문은, 뭐가 필요하겠는가?

 

인간은 합리적이고, 서로 원하는 바가 달라도 시스템을 통해서 합의해나가고, 그렇게 세상이 운영되어 간다. 그런 마키아벨리 이후의 근대 학문은 박근혜 정부에서 필요가 없다.

 

군대를 통해서 어떻게 댓글을 다느냐, 어떻게 2인자들을 통치할 것이냐, 상대방을 어떻게 괘멸시키거나 전향시킬 것이냐

 

이 얘기는 삼국지에 다 있다. 그리고 오히려 유비와 조조를 이해하는 게, 지금 청와대와 총리실의 관계를 더 잘 얘기해준다. 어떤 승상이 좋은 승상이냐, 그것도 삼국지와 열국지에 거진 다 있디.

 

한 마디로, 마키아벨리 이후의 근대 학문믄 2013년 하반기, 대한민국에서는 개똥이다..

 

죽어라고 삼국지만 보고, 조조 일가를 사마 일가가 어떻게 잡았느냐, 그거만 알면 되는 시기 아닌가?

 

근대 학문, 진짜로 이제부터의 한국에서는 정치학이든 사회학이든 경제학이든, 다 개똥이다.

 

조조만 알면 되고, 보너스로 강유까지 알면, 더 이상은 학문적으로 알 필요가 없는 시대가 펼쳐진다. 진짜, , 똥이다

 

카프카? 개똥이 되어버렸다. 최초의 근대적 인간을 문학의 틀에서 고민한 카프카와 도스토프에스키, 진짜 한국에서는 개똥인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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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계획을 짜다가

 

1.

행복한가, 이 질문을 종종 한다. 내 삶은 대체적으로 행복한 편이다. 그래도 지금 행복하지, 이런 말이 내 입에서 잘 나온다.

 

그렇다고 늘 행복했던 것은 아니다. 대학시절에 별로 행복하지 않았고, 가장 불행했다고 생각했던 것은 직장 생활 시절, 그러니까 외형적으로는 내가 가장 화려했던 시절이었다. 행복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우울했고, 그 우울함을 참을 수 없어서 계속 술을 마시고.

 

아내와 처음 만났을 때, 아내는 나를 굉장히 우울하고 침울한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실제로 그랬다.

 

사직서를 내고, 아주 가난하던 시절이 한동안 이어졌는데, 그 때는 삶은 어렵더라도 우울하지는 않았다. 그 기간 내내, 나는 행복했다.

 

그리하여... 나는 다시 행복한 사람이 되었다.

 

2.

올 가을, 정신 없이 뛰어다니다가 그 질문을 다시 했다.

 

지금 행복한가?

 

물론 행복하지 않다.

 

LG 2위 정도로 리그를 마무리하게 될지 미리 알았다면, 좀 다른 대답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잠시 선두에 있던 LG는 정신 없이 4위도 보장하기 어렵게 곤두박질 치고 있었고, 내 삶도 그렇게 곤두박질 치고 있었다.

 

우울하지는 않지만, 행복하지는 않았다.

 

그 때쯤 예전에 몇 번 보았던 영화 <머니 볼>을 다시 보게 되었다.

 

영화 보다가 내가 우는 건 아무 사건도 아니지만, 지난 수 년간 영화 보면서 울었던 것 중에서는 가장 강렬하게 울었다. 그냥 울고 만 것이 아니다. 머니볼의 마지막 장면을 생각하기만 해도 눈물이 났고, 요즘 내 파트너로 같이 작업하고 있는 이송원 PD에게 영화의 느낌을 설명하다가도 또 눈물이 났다.

 

진짜 며칠, 엄청 울었다.

나는 지금 행복하지 않다. 그렇지만 그 사실을 내가 알고 있으면 되는 것 아닌가?

 

3.

대선이 끝나자마자 시작한 올해, 지난 수 십년 동안 한 해 계획을 짜지 않고 출발한 첫 번째 해였다. 1년 계획은 물론, 2~3년 계획까지 촘촘하게 짜놓고 움직이는 게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물론 계획을 짠다고 해서 꼭 그렇게 되는 것도 아니고, 예상치 못한 돌발 변수들은 늘 일어나게 마련이다.

 

그렇지만 계획을 짜야 계획을 고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내가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가, 그걸 알 수 있게 된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나는 친구들과는 다른 방식의 삶을 살게 되었다. 내 삶은, 적어도 다른 사람의 삶과는 많이 달랐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전례가 없던 길을 가게 되었다.

 

경제학자가 영화 기획을 하게 되고, 그래서 영화 판권을 팔고, 또 다른 영화 기획에 참여할 것을 제안받는 상황... 내가 아는 한, 전례는 없다.

 

그래도 꼬박꼬박 계획을 짜면서 하나씩 걸어가다 보면, 별로 불안감은 없다. 잘 되면 계속 하는 거고, 해봐서 영 아니다 싶으면 접는 거고.

 

계획은 바꾸고 수정하라고 있는 거 아니냐? 그러나 계획도 없으면 너무 불안해진다.

 

2013, 올해가 정말로 아무 계획 없이 첫 해를 맞았던 해이고, 뭘 할지, 어떻게 할지 아무런 생각 없이 연초가 지나갔다.

 

올해는 정말로 되는대로 살았다.

 

그리고 가을이 시작되면서 나에게 지금 행복한가, 물어봤는데...

 

, 시방 나는 행복하지 않다.

 

그래서 영화 <머니 볼>을 보고 실컷 며칠 울고 난 후, 내년도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4.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하여간 내년에는 둘째 아기를 가질 생각이다. 아내도 원하고, 나도 그러고 싶고.

 

지금도 힘들어 죽겠는데, 아이 둘 키울 생각하면 정신이 아득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아내는 직장에 계속 다닐 계획이다.

 

좋은 아빠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성실한 아빠가 되는 것을 맨 위에 놓고, 그리고 다음 일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내년 봄이면 동네에 어린이 집이 생긴다. 하루에 몇 시간 어린이집에 아기 맡기고 할 수 있는 일 정도로, 내가 하는 일들을 대폭 줄일 생각이다.

 

그리고 보람과 의무감, 이런 건 당분간 접고,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할 생각이다.

 

내가 행복하지 않은데, 누구한테 행복에 대한 얘기를 할 수 있겠는가?

 

내년 가을에도 나에게 행복한가, 물어봤는데, 올해와 같이 행복하지 않다, 그렇게 답할 수 없는 삶, 그런 삶을 왜 사는가?

 

내 삶에 행복이 넘쳐야 사람들을 지켜줄 수가 있고, 길에 대해서 얘기할 수 있는 것 아닌가?

 

5.

지금 하는 일들은 대체로 내년 봄에서 여름 사이에 정리가 된다. 내년 7월을 경계로, 정말로 재미있거나 죽도록 보람 있는 일만 남길 생각이다.

 

학자로서 했던 일, 의무감으로 했던 일, 그런 일들은 올 겨울부터 시작해서 정리해나가려고 한다.

 

그리고 나도 뭔가 새롭게 배우려고 한다.

 

곰곰 생각해봤는데, 아비로서 내가 아들에게 가르쳐줄 수 있는, 평생을 갈 중요한 일은 빵 굽는 기술인 듯싶다.

 

물론 나는 요리는 조금 하지만, 빵 구울 줄은 모른다.

 

그거야 배우면 되는 거고.

 

아비로서, 내 아들이 먹을만한 빵 몇 개를 구울 수 있는 남자가 되면 좋겠다, 그게 내가 오랫동안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지식을 총동원해서, 정말로 곰곰이 생각해서 내린 결론이다.

 

내가 빵을 배우고, 빵을 굽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빵 굽는 어린이로 자라게 될 것 같다.

 

영어, 한글, 수학, 그런 건 몰라도 된다. 시간되면 천천히 배워도 되고, 잘 못해도 상관없다.

 

행복은 그것과는 상관 없다.

 

우리는 존재감을 과시하거나, 화려한 부를 휘두르기 위해서 혹은 잘난 척 하기 위해서 사는 게 아니다.

 

행복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다.

 

6.

그리고 나를 위해서, 평생 내가 했던 일 중에서 가장 재밌었고, 더 해보고 싶은 일이 뭔가, 생각을 해봤다.

 

이 결정은 비교적 쉬웠다.

 

머니볼 보고 감정을 정리하지 못해서 이것저것 생각하면서 울고 있던 시절, 영화사에서 같이 일하는 이송원 PD에게 올해도 내년작을 결정하지 못하면 문 닫기로 했다는 메일을 받았다.

 

영화 기획을 시작한지 3년쯤 되는데, 작년에는 아주 열심히 했고, 올해는 아무 계획도 없이 시작해서 아주 조금만, 뜨문뜨문했다.

 

잘 할 수 있는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해본 일 중에서 제일 재밌는 일은 영화 기획이었다.

 

다행히 연출이나 현장 PD와는 달리, 기획은 화려하지도 않고, 아기 키우면서 잠깐잠깐 시간을 내서 하기에는 안성맞춤인 일이다.

 

그리고 내년에 내가 맡을 영화 기획에 관한 계약을 다음 주에 한다.

 

재밌는 일을 마침 하게 될 기회가 누구에게나 쉽게 주어지지는 않지만, 어쨌든 이 경우에는 내가 운이 있는 편이다.

 

부차적으로 보조기획을 2~3편 하게 될 것 같다.

 

7.

내년도 계획을 어느 정도 밑그림을 그려놓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다. 삶은 그대로이지만, 그래도 마음만큼은 편해졌다.

 

한 가지는 이번에 확실히 이해한 것 같다. 나는 화려한 것 보다는 뒤에서 누군가를 지원하고 보조하는 일을 할 때 더 행복해한다는 것. 그리고 나는 돈이나 명성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숨어서 차분하게 생각할 수 있는 혼자 있는 시간, 이걸 훨씬 더 원한다는 것.

 

올해는 내 책 한 권은 나갔고, 또 한 권이 나갈 수도 있고, 연초로 넘어갈 수도 있다.

 

책 작업은 잘 된다. 그렇지만 올해 헤매느라고 내년으로 넘어간 책들이 좀 있다. 천천히 시간을 갖고, 차분하게 정리해보려고 한다.

 

이것저것 맡고 있던 직책들, 사회적 역할들, 이런 건 내년을 계기로 다 내려놓고 아기와 빵 굽는 아빠로서의 삶을 만들어보려고 한다.

 

고양이 네 마리 돌보면서, 아기 키우는 것, 이게 내 정체성이고, 내 삶이다.

 

아기를 돌보지 못할 정도로 바쁘게 해야 할 일은 내 일이 아닌 듯 싶고, 그렇게 살아야 할 이유도 없는 것 같다.

 

올해, 몇 년만에 처음으로, 내 삶에 대해서 행복하지 않다고 답변을 내렸다.

 

그러나 내년에는 그렇게 살지는 않으려고 한다.

 

순간순간을 행복만으로 채울 수는 없지만, 돌아보면 행복했다고 대답할 수 없는 삶, 그렇게 살면 안될 듯 싶다.

 

내년 계획을 짜면서, 나의 행복을 맨 앞에 놓고 내 삶을 다시 한 번 돌아다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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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가지 않아도 괜찮아, 말할 수 있을까?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솔로와 부부로 구성된다. 동어 반복인가? 어떻게 하다 보니, 동료들 중에는 여성들이 더 많다. 출판계, 방송계, 이런 데 워낙 여성들이 많아서 그런 듯 싶다. 영화를 같이 준비하는 동료 집단만, 그곳은 완전 남성들의 세계이다.

 

그리고 결혼한 부부 중에서 맞벌이가 아닌 집은 한 곳도 없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그런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내 주변의 여성들은 모두 일을 한다. 에디터와 작가들이 많고, 연구직도 상당히 많다. 전혀 그런 일 할 것 같지 않던 여자 후배가 얼마 전부터 헤드헌터로 새롭게 일을 시작했다. 중학생 딸을 둔, 평생 마케팅 부서에서 일하다가 이제는 사람을 가지고 장사를 시작한 것일까? 원래는 바이올린 전공이었다.

 

그 맞벌이 부부 중에서 아이가 없는 사람들도 가끔은 있다. 뒤늦게 감독 준비하는 조철현, <황산벌> 등 대부분의 이준익 감독의 영화를 기획했던 이 아저씨가 아기가 없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아빠가 없는 경우도 벌써 생겼다. 급작스럽게 암으로 떠나간 이재영이 딸과 아들, 두 아이를 남겨놓았다. 이재영이 떠난 뒤에 나도 정신이 없어서 한동안 못 봤는데, 요즘은 가끔 그 녀석들과 만나서 밥을 먹는다.

 

우리들 주변에 있는 수많은 아기들이나 청소년들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이제는 주식투자나 아파트 값 같은 것보다는 그들에게 펼쳐주고 싶은 미래에 대해서 더 많은 시간을 고민한다.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나온 우리 주변의 학생들 중에서 가장 편안하게 풀린 경우는, 외고를 그만두고 나온 조모 교수의 아들이다. 나의 첫 번째 조교라고도 할 수 있는데, 어느덧 경제학 박사가 되었고, 미국 공무원과 결혼도 하였다. 좀 극단적인 경우이다. 검정고시로 다시 대학에 들어갔다.

 

그 중에는 아예 대안학교로 간 녀석들도 많다. 그리고 대안학교를 그만두고 검정고시로 대학에 간 친구도.

 

내 주변에는 아예 조기 유학을 떠난 녀석들은 없었는데, 작년에 한국에서의 고등학교 생활을 접고 엄마와 아빠가 아예 미국에 가서 같이 정착을 한 경우가 생겼다. 아빠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서 월급 받는 생활을 다시 시작했고, 그 아빠가 요즘 나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동료 중의 한 명이다. 기러기 아빠가 된 셈이다. 나와 주기적으로 술자리를 같이 하는, 그리고 10년 이상 된 동료 중에는 첫 번째 기러기 아빠가 되었다.

 

캐나다 교포라서 캐나다 사람도 내 주변에 있다. 이제 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었으니 토론토로 돌아가서 캐나다 사람으로 키우는 게 나을지, 아니면 한국의 이 황당한 입시 지옥에서 딸을 한국인으로 키우는 게 나을지, 부모들이 요즘 심각하게 고민하는 중이다.

 

내 주변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이 공교육주의자이고, 사교육은 되도록이면 안 시킨다는 철학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우리가 지켜온 신념들이다. 그러나 지금의 중등교육 특히 공교육 고등학교의 현실을 보면서 나름 걱정들이 깊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내 주변의 좀 나이 먹은 녀석들, 이제 20대 후반을 향해 달려가는 녀석들 중에는 대안학교 1세대들이 있다. 그 사회적 실험 한 가운데에서 어른이 된 것인데, 아주 화려하지는 않지만 나름대로는 재밌게 살아간다. 남자 한 명, 여자 한 명, 둘 다 검정고시를 거쳐서 적당한 대학을 나왔다. 한 명은 활동가로, 한 명은 출판사 에디터로 살아간다.

 

이제 초등학교에 아이들을 보내야 하는 엄마 중에서는 사립학교에 보내는 것에 대해서 고민하는 친구들이 생겨났다. 다들 직장에 다니는 처지라서 초등학교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엄마들을 자꾸 불러내면 어떻게 할까, 아예 그런 거 없는 사립학교로 보내야 하는 거 아닌가, 이런 고민을 한다.

 

우리 아기는 돌이 지났다. 아직 어린이집을 보내지는 않았는데, 동네에 어린이집이 이제 막 공사를 시작한 상태이고, 좀 먼 동네의 어린이집은 대기 순위 100번쯤 되니까 어쩔 수 없이 집에서 데리고 있다. 아내는 복직했고, 내가 시간을 좀 더 내서 이렇게 저렇게 버티는 중이다.

 

, 당연히 아직 엄마도 제대로 못하고, 걸음마는 몇 달째 시도 중이다. 머리 숱이 많은 거 말고는 그냥 평범한 남자 아이다. 짐승의 소리로 울부짖는 것을 좋아하고, 요 몇 달 사이에 업어 달라고 땡깡도 부쩍 늘었다. 아기가 들을 동요 CD를 사러 나갔다가 깜짝 놀란 건, 우리 말로 된 동요 CD가 구하기가 쉽지 않다는 거... 거의 다 영어 동요이다. 고르고 골라서 두 셋트 사왔는데, 거기에도 한 장씩은 영어 CD가 들어있다.

 

이 사회의 무의식 한 단면을 본 듯 했다. 엄마들의 조바심과 지독할 정도의 마케팅이 딱 결합해서 생겨난 유아 영어교육 시장, 소름이 끼칠 정도이다. 돈이면 다냐 싶지만, 돈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최소한의 염치나 상식 같은 것도 거추장스러운 윤리 타령일 뿐일 것이다.

 

아기가 첫 울음을 떼자마자, 아니 뱃속에 들어 앉아마자 시작된 영어 태교 같은 것으로, 교육받는 것은 아기들이 아니라 바로 그 부모들이 아닌가 싶다. 아기들보다 먼저 엄마가 살벌한 경쟁을 체화해나가며, 그야말로 아기가 아니라 부모가 사육되는 세계.

 

이런 나라에서 살고 있구나 생각하면 좀 섬찟하다.

 

최근 나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피디가 한 명 있다. 딸이 중3인데, 초등학교는 대안교육에서 그리고 지금은 공교육에 들어가 있다. 책은 전혀 읽지 않고, 아무 것도 하고 싶어하지 않는 전형적인 중3이다. 얼마 전에 학교에 왜 가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래, 그럼 안 가면 되겠네.

 

아비가 너무 솔직하게 말을 하니, "아니, 일단은 좀 더 다녀보고..."

 

학교에 가기 싫으면 보내지 않을 수도 있다는, 무지막지해 보이지만 정말로 현실적인 아비의 말 한 마디에 딸은 일단 학교에는 가기로 했다.

 

그 녀석에게 우리가 무슨 조언을 해주거나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이게 오늘 내가 시작한 고민의 출발점이다.

 

어떻게든 대학에 보내야 한다면, 적당한 방식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게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지 않을 것이고, 그 사람의 잠재력마저 죽이게 된다는, 무지무지한 2013년의 현실이야 너무 자명하지 않은가?

 

어쨌든 좀 지켜보자, 그런 심정이다.

 

무책임한 얘기인가?

 

나도 그냥 생각을 해본다. 아들은 영어학원은 물론이고 어떤 학원도 보낼 생각은 없다. 정 뭔가 교육을 시켜야 한다면 그냥 내가 시킬 생각이다. 그래도 안되면?

 

그래서 대학을 갈 수 없다면?

 

지금 내 생각으로는, 안되면 마는 거고... 인생을 살아가는데 죽어라고 대학을 가야하는 것만이 정답은 아니지 않은가?

 

대학을 일부러 가지 못하게 할 생각도 없지만, 그렇다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게 만들거나, 가야만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는 살면서 꿈을 가진 적이 한 번도 없었고, 무엇인가를 간절하게 소망해본 적도 없다. 그래도 그냥, 세 끼 밥 먹고 사는 데 별 문제는 없었다. 그 대신 외제차 같은 거나 좋은 옷을 일상복으로 입는, 그런 일은 하지 않았다. 없으면 없는 대로 살면 그만이다, 그렇게 살아왔다.

 

아기도 나를 닮았으면 꿈도 없을 것이고, 하고 싶은 것도 없을 것이고, 그 대신 혼자 처박혀서 책 읽는 것을 좋아할지도 모른다.

 

하고 싶은 것도 없었고, 누군가를 이기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우리 또래에서는 남자들은 다 하는 당구를 칠 줄 모르고, 포카 같은 것도 해본 적이 없고, 섯다를 비롯한 화투장 숫자도 못 읽는다. 고도리는 규칙을 겨우겨우 알 정도이다. 볼링도 해본 적이 없는 것은, 내가 생각해도 좀 너무하다 싶다. 스타크래프트 정도가 해 본 거의 유일한 오락이고.

 

내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꿈이 없는 대신, 누군가를 이겨야겠다는 강렬한 열망도 없다면, 어쨌든 밥은 세 끼 먹고 사는 것 같다.

 

만약 내가 아들에게 무엇인가를 하나 가르쳐주어야 한다면, 카지노에는 절대 가지 말라는 것 하나를 남겨주고 싶다. 친하게 지내던 사람이 정선에서 카지노로 행방불명이 되었다. 의지로 극복하지 못하는 일들이 세상에는 종종 있는 법이다.

 

나의 아들이 대학에 가지 않아도 좋아, 이렇게 나는 말할 수 있을까?

 

며칠을 곰곰 생각해봤는데, 나는 그렇게 말할 수 있고, 생각도 정말 그렇게 한다. 그렇지만 그만큼 약간의 절제와 얼마간의 지식은 가지고 있어야 할 것 같다. 절제와 지식, 그건 대학에서 배우는 것은 아니다.

 

대만에서 6세 이하인가, 하여간 유아에게 영어 과외를 시키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게 되었다는 얘기를 얼핏 들었다. 한국과 대만의 차이는, 딱 지도자의 상식의 차이 아니겠는가? 상식을 가진 시민을 육성하는 것, 그게 원래 미국 대학 교육의 목표라고 들었던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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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고등학생을 위한 에세이집 >

 

내가 그렇게 부지런히 사는 편도 아니고, 그렇다고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인생도 아니다. 열정, 생각해보면 그런 걸 내 인생에 가지고 있었던 적이 과연 있었나 싶기도 하다. 그냥 다른 사람의 눈으로 본다면 돈 되지 않는 걸 부지런히 챙겨가면서 하니까 부지런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건 내 양심이 너무 불편하지 않기 위해서 했던 약간의 소란스러움에 다름 아닐지도 모른다. 누가 딱 봐도 출세나 성공과는 아무 상관 없어 보이고, 오히려 윗사람들한테 찍히거나 우파들한테 단단히 미움 받을 일만 골라가면서 했으니까 좀 열정적으로 사는 것처럼 보일 수는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역시, 내 마음 편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면, 그렇게 열정적으로 한 것도 아니다.

 

최선을 다하고 싶다는 생각은 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남들 하는 것과는 다른 것에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어떻게 보면 인생을 낭비하고 사는 것처럼 보였을 수도 있다. 대학 때는 물론이고, 나는 연애도 거의 한 적이 없다. , 인생을 낭비하고 사는 듯해 보이는 사람과 얽혀봐야 좋을 게 없다는 견적서가 금방 튀어나왔을 것 같다. 입장 바꿔놓고 보면, 나처럼 진짜 돈 되는 일 피해 다니고, 성공과는 거리가 먼 방향으로만 돌아 돌아 살아온 사람이 얼마나 많을까 싶기도 하다.

 

매달 가지는 못해도 어쨌든 지난 몇 년 동안 중고등학교 강연은 꽤 간 건 것 같다. 다양한 방식으로 10대들을 계속 만나려고 노력했다. 초창기에 봤던 녀석들은 벌써 대학에 갔고, 군대에도 가고 유학도 가고. 좀 부지런하게 살려고 했으면 그 녀석들 어떻게든 챙겨서 계속 만났으면 나도 많이 배웠을 것 같은데, 그렇게까지 열심히 살지는 못했고. 가장 최근에 본 친구들은 무슨 인터뷰집을 낸다고 집 앞까지 찾아왔던 고3과 고2 친구들.

 

언젠가는 ‘10대들과 대화하기정도의 제목으로 한국의 10대들에 대한 경제 인류학적 연구서를 한 번 해보고 싶었는데, 아직까지도 그 작업을 본격적으로 하지는 못했다. ‘88만원 세대는 초창기에 연구하던 그 10대들이 대학에 가면서 생겨난 변화 같은 거 생각해보다, 그야말로 얻어 걸린 테제라고 할 수도 있을 듯싶다. , 살면서 얻어 걸리는 것도 가끔 있어도

 

그래서 아직까지는 10대들에 대한 전격적인 연구를 할 준비도 되어 있지 않고, 또 당분간 그렇게 할 여건이 되지도 않는다. 하고 싶은 데 못 하는 게 뭐 어디 한 두 개인가?

 

그렇지만 지난 10년도 그랬지만 앞으로 5, 정말 난리 부르스처럼 가장 큰 충격적 사건이 벌어질 곳이 바로 중등교육 현장, 바로 우리들의 중고등학교일 것이라는 점은 뻔해 보인다. 박근혜가 제대로 못 푸는 문제가 한 두 가지일까 싶지만, 하여간 교육 현장은 진짜 이상해질 것 같다. 전교조한테 교육을 너무 이념적으로 본다고 하는데, 지금의 보수주의자들이야말로 교육을 너무 이념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자신들의 지지자로 만들거나, 자신들의 복제품, 클론처럼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겠다는 것처럼.

 

전 세계 어느 나라를 살펴봐도 선진국 중에서 자신의 중등교육을 자기 나라에서 한 바퀴 돌리지 않는 나라가 어디 있는가? 우리들의 보수주의자들은 자신들의 2세를 외국에 위탁시키는 아주 기이한 시스템을 만들어놓았다. 이게 아주 난감할 뿐이다.

 

그렇다고 내가 이걸 뭐 일거에 고치자고 할 만한 힘도 없고, 그럴 역량도 안되고.

 

그래서 생각한 게, 중고등학생들이 읽을만한 에세이집을 한 권 준비해보는 것이다.

 

박사 논문 끝내고 약간 한가한 시간이 생겨서 내가 안 보던 분야의 경제학 저널들을 챙겨서 읽은 적이 있었다. AER에서 페다고지를 주제로 해서 학회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보았던 단어 하나가 준 충격이 오래 간 적이 있었다.

 

‘otherwise bright student’에 대한 글이었는데,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다른 방식으로 똑똑한 학생정도가 될 것이다. 물론 문맥상으로는 좀 삐딱한 학생이 아니라 여성과 유색인종에 대한 얘기였다.

 

경제학과 1학년 첫 수업에 들어온 여성과 유색인종이, 그야말로 변수와 방정식으로 유치찬란한 첫 수업을 듣자말자, , 이건 내게 도움이 되는 학문이 아니겠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바로 빠져나간다는 것이다. 그래서야 다른 방식의 접근과 시선이 경제학에 들어올 수가 없으니까 경제학이 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그런 얘기였다.

 

어떻게 보면 지금 우리의 공교육과 조기 유학과 딱 맞는 말이다.

 

집이 가난하거나 소외된 계층의 학생들이 딱 학교에 가자마자, 이런 나와 안 맞는군

 

그렇게 다른 방식으로 똑똑한 녀석들이 볼만한 에세이집을 한 번 써보고 싶은 게 요즘 내 생각이다. 아직 구성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보지는 않았고.

 

테마별로 할지, 회고식으로 할지, 그런 것도 방향을 못 잡았다. 다만 독서하는 방법, 글 쓰는 방법 그리고 공부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는 쓸까 한다. 내가 하는 방식으로 공부해봐야 나보다 공부를 잘 하기가 쉽지가 않겠지만, 그 정도 공부하면 한국은 몰라도 외국에서 먹고 사는 데는 지장 없을 듯싶다.

 

시대가 어둡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 그야말로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생각으로, 뭐라도 좀 해볼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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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바보 삼촌.)

 

삶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요즘처럼 깊이 생각해보는 시간도 별로 없을 듯하다. 사실, 요즘 나는 하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 머리 속으로는 계속 이런 저런 구상들을 해보기는 하지만, 그거야말로 전적으로 내가 하고 싶은 것이나 재밌다고 생각하는 일이니, 공적인 의미는 아무 것도 없는 일들이다.

 

모든 것이 공적으로 의미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지는 않지만, 어쨌든 정말로 오랜만에 사적인 삶 외에는 하는 게 없다.

 

사적으로 아기를 아기를 돌보고 있고, 한동안 하지 않던 경제적 활동을 조금씩 시작해서, 에라, 돈이나 벌자...

 

한동안 돈 안 벌고 살았는데, 요즘은 소일거리로 조금씩 돈을 버는 중이다.

 

 

 

 

(엄마 고양이, 요즘은 마당에서 하루 종일 멍때리며 보낸다.)

 

아기 보고 있다보면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게 정신 없이 흐른다. 돌 가까워지면서 아기가 벌써 두 번이나 앓았다. 집 근처에 소아과 병원이 없다. 병원 하면 가는 것도 이제는 큰 일이다.

 

아기 보는 틈틈이 전화 몇 통화 하고 나면 금새 해지고, 밤이다.

 

아내가 복직한 다음, 정말로 해야 할 집안 일이 많아졌다.

 

 

 

(바보 삼촌, 하품 중. 넉살 좋고, 표정 좋다. 이런 바보 삼촌의 인생관을 배워야 한다!)

 

하는 일도 없이 바쁘다는 게 정말 요즘의 나일 것 같다. 뭐, 절대 시간의 대부분을 아기와 보내니까.

 

아기 앞에서는 컴은 물론이고 핸펀도 켤 수 없고, tv도 못 킨다. 노트북 아니라 노트도 못 펼친다. 만년필이든 다 뺏어가버린다.

 

영화 모니터링 작업 같은 것도 물론 할 수 없고.

 

어차피 내가 할 수 없는 것,

 

그런 것들을 포기하는 것을 요즘 배워나가는 중이다.

 

언제부터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신문에 많은 글을 썼는데, 이젠 좀 내려놓으려고 한다.

 

경향신문에 한 번 남았다.

 

지방에 안 간다고 안 간다고 하면서, 거의 매주 지방에 갔다온 듯 싶다. 지난 수 년간, 늘 그랬었다.

 

지난 번 곡성 가면서, 이젠 진짜 먼 데 좀 그만 가자고 했는데...

 

다음 주에 구레에 간다. 안 갈 수만 있으면 안 가고 싶은데, 형편이 그렇게 되지가 않는다.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하반기에도 매주 지방에 가야할 듯 싶다.

 

오매나야...

 

내가 책상이나 스튜디오에 얌전히 앉아있는 꼴을 사람들이 못 본다.

 

현대시절이나 정부기관 시절, 그 시절에도 나는 내근보다는 지방 출장 등 출장이 훨씬 많았다.

 

먹고 살아야 하니까,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고,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살았는데,

 

그게 어쩌면 팔자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냥 스튜디오에서 방송해도 되잖아 싶지만, 나를 데려다 쓰는 사람들은 꼭 전국을 헤매고 돌아다니게 만든다.

 

생태 경제학이라는 게, 대부분의 현장이 지방이라, 이래저래 돌아다닐 수밖에 없는 처지.

 

 

 

 

(강북걸, 뽀샤시하게 나왔다.)

 

희망이 없다는 것은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세상이 나아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일상의 모든 것들이 답답하고 갑갑해 보인다. 그 삶에서 지나치게 시니컬해지지 않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인격 수양을 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희망이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주변 사람들이나 동료를 애정으로 대하는 것,

 

아... 몸에서 언젠가 사리가 나올지도 모른다. LG팬 10년이니 사리가 나온다고 했던가?

 

20대에는 '날선 칼 같은 삶'이라는 표현을 좋아했었다. 왠지 나도 그래야 할 듯 싶었던.

 

옆구리에 살 잡히기 시작하면서 '가늘고 길게'를 얘기하던 어른들이 심정이 좀 이해가 갈 듯하기도 하다.

 

마흔 여섯, 이제는 뭔가 벌릴 나이도 아니고, 펼쳐놓았던 혹은 펼쳐진 많은 것들을 정리하기 시작해야 하는 나이이다.

 

하긴, 별로 펼쳐놓은 것도 없어서, 그냥 내 방만 잘 치워도 되는감?

 

진짜 하고 싶은 것은 에니메이션 작업인데, 펼쳐놓고는 뒷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아직 손도 못대고 있다.

 

요즘 나는 뭐하고 있는 거지, 그 질문에 답하기가 쉽지가 않다.

 

그냥 아기 돌보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가장 마음이 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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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억압의 시대를 맞아

 

이번의 해병대 캠프 사건을 보면서, 참 이것저것 많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 것을 교육이라고 이수해야 하는 상황도 안됐지만, 게다가 죽음이라니게다가 그 질문을 처리하는 방식을 보면서, 정말로 뇌가 띠오옹, 아 이게 사람 사는 세상이 맞나 싶을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억압이라는 것은 좀 오래된 테마이기는 하다. 우리에게는 군사 정권으로 익숙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좀 지난 주제이다. 그렇지만 그게 다시 돌아오는 이 시대를 보면서, 그냥 있기가 좀 그렇다.

 

해병대에서 무얼 배울 것인가? 부모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굴종을 내화시키고, 억압을 체화하는 것, 그거 아닌가? 이 시대, 사회 전면에 나선 기관들이 군대와 대형 교회 아닌가? 대표적인 억압의 내재화 장치들이다. 학교는 군대처럼, 기업은 교회처럼, 통솔과 순종이 강조되는 시기, 그 사이에 벌어진 병영 체험에서의 상징, 지독할 정도로 아이러니한 순간이다.

 

무기력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 마냥 손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만, 어쨌든 하고 싶은 일은 할 수 없고, 하는 일은 잘 안 되고

 

억압과 무기력, 그 사이에는 약간의 뉘앙스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하나의 흐름에 있는 것 아닌가? 억압해도 별 반응 없이 무기력하게들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더욱 강력하게 억압하고.

 

2000년대 후반 일본에 가면 시민단체 일각에서 지독할 정도의 무기력증을 본 적이 있었다. 68세대 혹은 전공투 세대는 너무 나이가 많았지만, 그들을 대체할 다음 흐름은 나타나지 않고. 주간금요일이라는, 우리 식으로 치면 시사인 정도 되는, 아사이 있던 기자들이 나와서 만든 잡지에 혜성처럼 아마미아 카린이 등장하여 편집위원이 되는 걸 보면서, 뭘까, 그럴 정도였다.

 

민주당으로 새로 결집해서 정권을 바꾸게 되는 흐름은 그 직후에 나타나게 되는데, 자민당의 장지 통치 아래에서 이래도 안되고 저래도 안되고, 그런 무기력증을 일본에서 본 적이 있다.

 

요즘 한국이 그런 것 같다. 뭔가 변화를 생각했거나, 억압이 아닌 방식으로 생각하려고 했던 이들이 하는 일들은 대부분 잘 안 된다. 한 명 한 명에게는 그냥 잘 안되는 것이기는 한데, 이게 전체로 모이다 보면 집단적 무기력 같은 것이다.

 

요즘 새누리당과 민주당 사이에서의 벌어지는 논쟁은 퇴행적이기는 한데, 그렇다고 해서 딱히 뭔가 대안이 있지도 않은 상황이다. 그저 숨죽이고 지내는 것 외에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그게 객관적이기는 한데.

 

그래도 억압의 시대로 들어간다는 것이 명확해진 지금, 세 끼 밥만 먹고 그냥 숨죽여서 살 수는 없는 것 아니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억압의 시대, 그래 그게 박근혜를 선택한 사람들이 우리들에게 준 선물이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무기력증과 억지로 끌어내서 만든 성장담론, 그야말로 지독할 정도로 익숙한 경제 살리기, 그 시대로 다시 들어간다. 사회적으로는 억압, 정치적으로는 무기력 그리고 경제적으로는 죽지도 않은 경제를 살려야 한다고, 모두 얼굴 박고 빚 내요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집단 무기력증으로 다시 들어간다.

 

생기발랄, 그런 단어들이 유행하고 사람들의 열정을 끌어내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군대와 군대 용어가 그 자리를 다시 차지한다. 그럼 우리 군인이 작전도 수행하고, 뭐 그래야 할 것 같지만, 지금의 장교들은 그래도 미군 지휘를 받는 것이 더 좋겠다고정말로 찬란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렇게 해서 억압받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나는 상상력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말로 두려운 시대가 오면 상상하는 것 마저도 두려워진다. 그리고 그 가장 약한 고리인 중고등학생들, 10대들의 상상을 억압하는 시대가 된다. 지금이 딱 그런 시기가 아닐까 싶다.

 

<행복은 선착순이 아니잖아요>, 이런 얘기를 영화로 만들면서 우리가 가야 할 길에 대해서 모색하던 순간이 있었다. 정말로 깜깜하게 오래된 기억으로, 멀고도 먼 시대의 얘기처럼 느껴진다.

 

얼마 전부터 주변에 대한 정리정돈을 시작했다. 얼마 전에 시작한 sbs cnbc의 방송 한 개만 남겨두고, 나머지 것들은 정리하는 중이다. 방송에서 배우는 것이 적지는 않은데, 어쨌든 절대 시간이 나에게도 필요하니까.

 

신문 칼럼들도 정리 중이다. 몇 가지 생각이 좀 있는데, 이쪽이든 저쪽이든, 욕하는 일 외에 이 시대에 쓸 글이 별로 없다. 그렇다고 맨날 욕하는 것도 지겨운 일이고, 그런다고 해서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게 너무 뻔한 데 줄구장창 그 얘기만 하는 것도 서로 안스러운 일이고.

 

그럼 비판하지 않는, 좀 풋풋한 글을 쓰면 될 거 아니냐? 눈에 보이는데 안 쓰는 것은 양심에 걸리는 일이고, 어쨌든 여전히 바닥에서 세상은 모색을 하고 있는 중이다, 그렇게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괜찮아, 다 잘 될 거야, 이런 것도 영 내 스타일 아니고.

 

어쩌면 좀 비겁한 변명일 수도 있는데, 내가 살아가는 동안, 그래도 나는 최선을 다했다, 그런 거? 그래도 그 정도의 변명거리라도 만들어야 할 것 아니냐?

 

굉장히 고통스럽고 힘겨운 몇 년이 될 것 같지만, 그래도 또 걸어가야 할 거 아닌가 싶다. 5년 후의 일은 모른다. 그런 거 알면 나부터라도 당장 주식투자부터 하겠다.

 

엄청나게 큰 일을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무지막지하게 희생하겠다는 생각도 아니다. 그러나 지금부터 펼쳐질 억압의 시대에 숨죽이고 살지는 않겠다는 정도?

 

블로그는 어떻게 할지, 아직 마음을 못 정했다.

 

하여간 조금이라도 신경 쓰게 되거나 정신을 분산시켜야 하는 것은 다 정리한다는, 그런 게 지금 기조이기는 한데

 

예전에 한참 힘 좋던 시절에는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그렇게 부지런을 떨기도 했었는데, 지금은 에고고고, 조금만 움직여도 힘들다나도 나이를 먹었고, 아이 키우면서 이것저것 하는 것은 그야말로 무리데쓰

 

해보고 싶은 얘기와 해야 하는 얘기를 구분하기가 좀 어렵다. 어쨌든 억압에 관한 얘기는, 그야말로 해야 하는 얘기이다. 하고 싶은 얘기야 언제든 또 할 기회가 있겠지만, 지금 해야 하는 얘기를 지금 하지 않으면, 마음에 두고두고 후회로 남을 듯싶다.

 

하여, 여러 가지 일정들과 살아온 방식들에 대한 전면적인 재조정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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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한 유월 혹은 살아남은 자의 슬픔

 

브레히트의 <살아 남은 자의 슬픔>이라는 시집은 그 제목만으로도 천 년을 갈 듯 싶다.

 

닝기미, 살아 남아야 슬픔이라도 느끼지, 디진 자가 무슨 슬픔을 느끼겠나? 그 논리적 결론을 시의 제목이 딱 짚었다. 20대에도 이 얘기를 했고, 30대에도 이 얘기를 했는데, 40대에도 이 얘기를 하게 된다.

 

차이가 있다면, 20, 30대에는 정말로 시를 읽었고, 40대에는 이미 여러 번 읽었으니 읽었다 치고. 그러니 더 슬프다.

 

얼떨결에 아침 방송을 시작했는데, 지난 주로 막방을 했다. 이래저래 50명 가까운 사람들이 만들던 방송이었는데, 이제 거의 혼자 남아서 후속 방송을 준비하게 되었다. 뭐래? 그런 데도 남아 있어야 하나? 나머저 떠나면 그나마 남은 사람들 멘붕이다. 진짜, 뭐래..

 

이 와중에 대선 이후 처음 낸 에세이집은 출발이 아주 늦게 되었다. 아주 작은 출판사라, 그 잠시의 경영난을 버티지 못하고, 몇 년째 파트너로 일하던 에디터는 훨씬 큰 다른 출판사로 옮겨가게 되었다. 힘든 시대를 버티려면 그나마 입이라도 줄여야

 

이래저래 나와 파트너로 일하던 사람들이 줄줄이 짤리거나, 아니면 직을 옮기거나, 그것도 매일 한 명씩. 뭐래?

 

꼬질꼬질한 삶을 살게 될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런 요상한 방식으로 같이 일하는 파트너들이 한 명씩 사라지는 상황을 전격적으로 버티면서 지내야 할지는 나도 몰랐다. 그러면 같이 그만두면 될 거 아냐? !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그래서 더러운 자들의 기억이라는 것을 동의할 수밖에 없다.

 

하여간 되는 일은 아무 것도 없고, 그 사이에 내 주변 사람들은 속수 무책으로 무너지고.

 

오랫동안 명랑을 모토로 살아왔는데, 이게 요즘 흔들린다. 내 주변 사람들과 동료들이 하나씩 무너지는데, 나만 혼자 얼굴에 스마일! 이게 얼마나 잔인해보이겠는가?

 

이렇게 혼자 고민 중이었는데, 그 클라이막스는!

 

‘150만원 세대작업할 때 중요한 키맨으로 같이 작업하려고 했던 알바 연대의 대변인이

 

이번 주, 그러니까 오늘 아니면 내일쯤 차를 한 잔 마시기로. 그것도 벌써 2달 전부터 몇 번씩이나 얘기를 하면서도 내가 정신이 없어서 미루어두었던 자리였다. 아침 방송 끝났으니, 이번 주 커피 약속이라도 다시 잡을까, 막 전화기 뒤적거리고 있는 찰라.

 

세브란스 영안실 4.’

 

이렇게 문자가 날라온 거다. 뭐야?

 

결국 그날 저녁, 만사 제끼고 영안실부터 달려갔다. 사인도 모르고, 그냥 늦게 집에 들어와서 TV 보다 새벽 3시에 부인이 살펴보니, 그냥, 이런 죽음도 있나 싶을 정도로, 그렇게 허무하게.

 

정말로 죽었어?

 

정말?

 

이런 법도 있나?

 

너무 놀라니까 눈물도 나지 않는다.

 

이재영이 죽은지 얼마나 되었다고하여간 세브란스 영안실 요즘 엄청 자주 가게 된다.

 

이런 억울한 죽음도 있더냐나이 서른 다섯에.

 

이 와중에 나꼽살 번외편 기획하고, 녹음하고, 또 왜 이건 이렇게 안 해주냐, 저건 저렇게 안 해주냐

 

다 됐다, 니들끼리 해, 이 말이 목천정을 뚫고 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고, 집에 와서 혼자 소주 기울이고 앉아 있으려니, 이게 살아도 사는 게 아니다 싶다.

 

하여간 이렇게 잔인하게 6월이 시작되었다.

 

그 와중에 장모님은 급성위염, 어머님은 점점 치매 초기 증상, 뭐 삶이 이렇게 복잡해졌드냐.

 

이제 아홉 달 넘은 아들은 잠시도 봐주지 않고, 이것저것 부수어대고, 야옹구는 또 가만히 있어주시나, 연신 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웃음을 잃지 말자, 다시 한 번 마음을 가다듬어 먹는다. 그리고 잠시 후 벌어지는 또 다른 슬픈 사연에 급 마음 냉각.

 

5 31, 난지 캠프장에서 동료들과 죽어라고 술 마실 때만 해도 좋았지, 이제 이렇게 술 처먹고 아픈 기억들은 탈탈. 근데 왠 걸, 슬픈 사연은 왜 끊이지가 않는가!

 

그래도 죽어라고 즐거운 생각들을 하려고 하는 것은, 그게 살아남는 자의 슬픔이 가지고 있는 역동성 아니겠는가.

 

억지로라도 웃고, 또 웃을 구석을 찾아내지 않으면, 이 지긋지긋한 어둠이 결코 끝나지 않는다. 영원히 박근혜와 살 수는 없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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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자로 산다는 것

 

사람한테는 여러 가지 모습이 있다. 경제학자로서의 내 삶은, 그 많은 모습 중의 하나일 뿐이다. 지난 몇 년 동안, 내 감정이 가장 많이 움직인 것은, 마당에 살던 고양이들과의 삶이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녀석들을 데리고 이사를 오고, 그들이 무사히 정착한 모습을 보여줄 때까지, 그야말로 긴장의 연속이다. 그러나 감정의 크기가 삶의 크기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아무리 고양이들에게 많은 감정을 주었다고 해서, 내 삶이 고양이를 돌보는 것이 되지는 않는다. 내가 고양이를 몇 마리를 돌보고 있든, 나는 경제학자로서의 삶을 살고 있다. 가장 많을 때는 막 태어난 새끼들까지, 8마리의 고양이를 동시에 돌본 적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경제학자가 아닌 것은 아니다.

 

지난 대선은, 내가 경제학자로서의 삶을 내려 놓기로 오래 전부터 결정해놓고 있던 시기였고, 또 그 시간만을 기다리면서 지냈을지도 모른다. 나에게 경제학자라는 말은, 직업과는 좀 다른 의미이다. 수치를 표고, 자료를 보고, 그 사이에서 새로운 수치를 찾아내거나 관계를 뒤집어본다. 그게 내가 주로 하는 일이다.

 

한국의 언론과 기사는 광고주 혹은 스폰을 보면 90% 이상 읽힌다. 누가 뒷돈을 대느냐, 그것에 따라 거의 대부분의 말이 결정된다. 뒤집어서 말하면, 스폰 관계만 읽으면 90% 이상의 진실은 그냥 먹고 넘어간다는 것이다. 아파트 분양 광고를 전면에 내고 있는 신문에서 부동산에 대한 상식적인 진단을 내리겠는가? 이건희에게 월급을 받는 삼성경제연구소에서 삼성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한국 자체를 위한 얘기를 과연 몇 퍼센트나 하겠는가?

 

그런 고통 속에서, 과연 누구를 위해서 생각을 하고, 어떤 사실을 말할 것인가, 그런 게 학자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긴장감이다. 약간만 눈을 감고, 조금만 뉘앙스를 흐뜨리면 사는 건 아주 편하다. 그렇게 살 것인가?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산다.

 

그 생각을 속으로만 할 수 있고, 한다고 하더라도 술자리에서 아주 절친한 사람들 사이에서만 얘기할 수 있다. 술이라는 핑계, 지인 사이의 농담이라는 안전장치, 그렇게 겹겹이 안전장치를 만들어놓고 얘기를 할 수 있다. 사회적으로는, 아무 얘기도 안 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래도 얘기를 해야 한다는 게, 학자의 삶이다.

 

물론, 아주 쎄게 얘기할 수 있고, 아주 살살 얘기할 수는 있다.

 

그런 삶은 그만 살고 싶었다.

 

돈은 아주 조금만 벌고, 소비도 아주 조금만 하고.

 

하여간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고, 경제학자로서의 삶은 이제 그만 살려고 하던 원래의 생각을 조금 바꿨다. 엄청나게 고강도는 아니고, 아주 살살, 아주 가늘게, 뭐가 맞고 틀리다, 그런 경제학자로서의 얘기를 조금 더 하려고 한다.

 

누군가는 그런 얘기를 해야 할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이 한 가지 있고, 이제 이재영이 없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이재영은 내 삶과 생각을 바꾸어놓은 친구이다. 언제 바꾸었는지도 몰랐는데, 지나 보니, 많이 바뀌어 있었다.

 

이재영은 명랑했고, 밝았고, 그리고 진보가 집권을 한 순간을 위한 준비를 늘 해야 한다고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그 생각이 바로 선거 과정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이재영의 그런 주장을 믿었던 사람이 그렇게 많은 것 같지는 않다. 어쨌든 나는 그의 말을 믿었다.

 

젠장. 삶의 타이밍은 언제나 예술이다.

 

이재영이 장지로 떠나는 날, 그날이 바로 문재인 후보의 두 번째 광화문 유세가 있던 날이었다. 명목상으로 그의 공동 장례위원장 중의 한 명으로 이름을 올려놓았는데, 그의 마지막 길에도 역시 나는 같이 하지 못했다. 삶이, 왜 맨날 이런가!

 

이재영의 친구들은 꼬질꼬질해졌고, 그가 지지했던 사람들의 삶은 남루해졌다. 그렇다면 이재영의 꿈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이재영과 우리가 꾸었던 꿈에 대해서 5년만 더 같이 생각해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재영을 위해서 나의 평생을 살 수는 없다. 그렇지만 내가 살면서 가장 존경했던, 그리고 가장 똑똑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그리고 늘 밝았던 이재영을 위해서 경제학자로서의 활동을 조금 더 연장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했다.

 

이재영이 누구야?

 

‘88만원 세대라는 책이 레디앙이라는 출판사에서 출간된 이유는 이재영 때문이었고, 이 책의 마지막 교정교열을 보면서 내가 마지막으로 생각을 가다듬을 수 있게 도와준 담당 에디터가 바로 이재영이었다.

 

, 이런 생각을 하면서, 경제학자로서 조금 더 살아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제영이 꾸었던 꿈을 대신 이루어줄 수는 없지만, 그의 꿈이 그냥 땅바닥에 팽겨쳐지는 것을 친구로서 그냥 보고 있고 싶지는 않다.

 

하여간 이런 복잡한 생각을 하면서, ‘경제학자로 살아가기’, 이 삶을 조금 더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명박, 박근혜, 10년 정권을 보내게 되었다. 그 기간 동안, 나는 전향하지도 않을 것이고, 화려한 자리를 맡지도 않을 것이다. 그냥 꼬질꼬질하게, 고통과 비극 그리고 무기력함을 사람들과 같이 보낼 것이다. 그리고 경제학자로서, 분석도 하고, 발언도 할 것이다.

 

노무현 정권 때, 정권의 사람들은 참 나를 싫어했다. 명박 정권 때, 아마도 힘 있는 사람들은 나를 끔찍이 싫어했던 것 같다. 청와대 홍보 쪽인가, 하여간 그런 데서 나온 얘기가 돌고 돌아 결국 입 조심하라는 협박 비슷한 메시지를 받은 적도 있다. 박근혜 시대의 실세들, 역시 나를 싫어할 것이다.

 

그게 경제학자의 삶이다.

 

아마 어떤 정권이 오더라도, 그것이 이재영이 꿈꿨던 정권이 아니라면, 나는 늘 핍박받고 견제받고, 때때로 사이비라는 얘기를 들으면서 살 것이다.

 

그래서 나는 경제학자로서의 삶 보다는 고양이들을 돌보는 어느 아저씨의 삶이 더 좋다. 그리고 영화 기획자나 시나리오 작가 혹은 동화 작가로서의 삶이 더 좋다.

 

그러나 5년간은, 경제학자로서 살아갈 생각이다.

 

내 친구 이재영을 위하여

 

Posted by reti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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