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은 모르지../명랑이 함께 하기를!'에 해당되는 글 99건

  1. 2013.01.13 서울 10대학, 모피아 후속편 구상 10
  2. 2013.01.12 대선 이후, 우리는 뭘 할까? 6
  3. 2013.01.11 월요일 오후에는 커피를 22
  4. 2012.12.25 가늘고 길게 17
  5. 2012.12.24 대선 이후, 내가 결심한 것 46
  6. 2012.12.23 한국의 청년들에게 바침 58
  7. 2012.12.22 꼬질꼬질한 5년을 버티기 위하여 50
  8. 2012.12.17 진보정치의 꽃, 이재영을 보내며... 13
  9. 2012.11.27 그것은 올드하다 7
  10. 2012.11.25 아기 백일 27

서울 10대학, 모피아 후속편 구상

 

모피아 때에는 제목이 참 많았었는데, 결국 맨 처음에 잡았던 제목으로 돌아왔다.

 

교육 얘기를 먼저 할까, 금융 얘기를 먼저 할까, 그런 고민이 좀 있었다. 몇 가지 이유로 금융 얘기를 먼저 하기로 마음을 먹었었다. 어떤 경우로든, 토건 얘기는 맨 나중에 할 생각이었다.

 

토건은 내년에나지금 결정해놓은 건, 토건은 코미디로 가겠다는 거. 돈 까밀로와 뻬뻬네, ‘신부님 우리들의 신부님풍의 블랙 코미디 형태로 가겠다는 정도만 마음을 먹고 있다. 2년 정도 꾸준히 웃길만한 소재들을 모으다 보면어쨌든 이 시리즈를 어렸을 때 너무너무 재밌게 봐서, 그런 느낌의 책을 써보고 싶었다.

 

교육 얘기는, 모피아 보다 더 판타지 형태로 갈까, 생각 중이다. 모피아에 나왔던 주인공들을 그냥 투입하고 깊은 생각이 좀 있기도 했는데,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다. 딸이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벌어지는 일들이 원래 구상했던 얘기의 틀이었는데, 생각이 좀 변했다.

 

일단어른들의 얘기가 아니라 고등학생들을 주인공으로 투입할까 한다. 고등학생들이 전국적으로 수능을 거부하는 일이 벌어지면서, 한바탕 아수라장이 벌어지는, 그런 상황.

 

당연히 68의 재현 같은 것인데, 아무래도내 마음 속에 영원한 로망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68이다. 내 마음의 판타지가 아니면 신이 나지도 않고, 흥명이 나지도 않을 듯싶다.

 

더불어 한국에서 금기처럼 되다 시피한 10대들의 성 문제.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여인숙이나 친구 방에서 벌어지는 고등학생들의 섹스에 대한 얘기들. , 어차피 그게 현실인데.

 

어른 쪽 주인공들은 어떻게 구성을 할지, 아직은 생각이 명확하지 않다. 모피아에 등장했던 오지환을 다시 투입시키는 것이 손쉬운 해법이기는 하지만, 시간 대와 뭐 그런 게 잘 맞지가 않는다.

 

악인들은, 뭐 교육계의 악인들이야 교육 마피아들이니까, 이건 생각보다 쉽다. 공정택 같은 사람 상상해 보면실제로는 그것보다는 좀 더 뿌리 깊은 사연들을 보여줄 생각이기는 하지만.

 

모피아도 좀 스케일을 펼쳐놓은 편이었는데, 이번에는 아주 작은 장소에서 계속 얘기를 끌고 나가다, 점차적으로 서울로, 다시 전국으로 규모를 넓혀나가는, 뻔한 수법을 쓸까 싶다.

 

시간은 박근혜 3년차에서 4년차 사이에 벌어지는 일, 그 정도로 설정해볼까 한다.

 

판타지, 현실에서 벌어지지 않는 일이겠지만, 상상도 못해볼 건 없지 않은가

 

모피아의 경우는, 시나리오 버전은 예산 15억으로 생각하면서 만들었고, 소설 버전은 예산 50억 정도를 생각하면서 만들었었다. 교육 마피아의 경우는 80억에서 100억 정도의 규모를 설정하고 만들어볼까 싶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꼭 영화로 간다는 건 아니지만, 예산을 결정하면 여러 가지가 자동적으로 결정되는 간편한 점이 있다.

 

처음에는 작은 공간에서 밀도감 있게 진행되는 소품 같은 걸 구상하기는 했는데, 요즘 마음이 바뀌었다. 한국에서 10대들이 주도하는 68 같은 게 벌어지면 어떤 형상이 생겨날 것인가, 그걸 규모감 있게 보여주는 쪽으로.

 

소설이라는 양식이 좋은 건, 상상에 돈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점.

 

일단 올해 안에 출간할 생각이기는 한데, 그건 뭐 여전히얘기가 어떻게 풀려갈지, 미리 시간을 정해놓는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어쨌든 4~5월까지는 밀린 책들 정리하면서, 천천히 좀 더 구상을 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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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교포들을 위한 작은 잡지의 청탁으로 쓰게 된 글이다. 대선 이후 처음 쓴 글이다. 앞으로 이런 글을 또 쓰게 될까? 그건 잘 모르겠다...

 

 

대선 이후, 우리는 뭘 할까?

 

우석훈 (경제학자)

 

1. 지더라도 질서 있게 지자

 

2012 12 1일은 토요일이었다. 별 특징 없는 토요일일 수 있지만, 대선을 불과 18일 앞두고 있던 그 토요일은 좀 특별한 날이었다. 그 때 우리가 본 여론조사의 데이터는 7~8%, 박근혜가 앞서고 있었고, 수치상으로는 점점 박근혜와 문재인의 차이가 벌어지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미 오차범위 바깥이었다. 그날 조국 교수를 비롯해서 시내에서 모인 우리가 가지고 있던 인식은, 선거를 이긴다는 것은 언감생심이었고, 이렇게 대책 없이 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기기는 어렵지만, 최대한 격차를 줄이지 않으면, 도저히 이후에 방어선을 칠 수가 없다, 그게 2012 12 1, 나와 조국 교수 그리고 한 때 안철수 캠프에 몸을 담았던 시민단체 지도자들이 모여서 가졌던 문제 인식이었다. 이긴다? 그런 건 이미 오차범위 바깥으로 벌어져 버린, 18일 남은 선거판에서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옵션이 아니었다.

 

내가 그 순간에 가장 두려워했던 건, 어차피 질 거니까, 선거 포기가 속출하면서 실제 투표율은 떨어지고, 지지율 격차는 더 높아지는 그런 상황이었다. 지난 대선이 그렇지 않았던가?

 

2차 세계대전, 독일이 졌다. 좋은 비유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에게는 전세계 전선에서 어떻게 퇴각할 것인가, 그게 중요했었을 것이다. 진짜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하여간 그들은 질서 있게 퇴각을 했고, 결국 국가를 다시 일으켜세웠다. 2012 12 1, 우리가 생각한 것은, 대선 승리가 아니라 질서 있는 퇴각, 그래서 결국 지더라도 최대한 접점을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이미 오차 범위 바깥으로 후보 지지율이 벌어져 있는 상황, 뭘 더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국민연대라는, 아주 기기묘묘한 조직을 띄우고, 내가 그 조직의 대표를 맡으라고 조국 교수가 강권하던 상황, 그게 2012 12 1일의 상황이었다.

 

2. 부산에서의 마지막 유세

 

2012 12 18, 개인적으로는 이 날이 기억이 많이 날 것 같다. 국민연대가 결성된 이후, 어쨌든 안철수도 움직였고, 분위기는 많이 좋아졌다. 이제 마지막 한 방, 이기자고 하면 이길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유세 마지막 날, 우여곡절 끝에 당시 선거 유세를 종합적으로 기획하던 탁현민이 서울에서 부산까지, 그렇게 경부선을 따라가는 마지막 유세를 준비하였다. 좀 잔인한 일정이다. 후보는 서울역에서 시작해서, 대전, 대구 등 주요 도시를 거쳐서 마지막에 부산역에서 유세하는 일정이다. 나는 바람잡이로, 후보와 엇갈리면서, 천안, 대구, 부산에서 유세를 하게 되었다. 후보가 오기 전에 먼저 유세를 하고, 후보가 도착하면 다음 도시로 떠나는 그런 일정이었다. 앞으로도 이런 유세가 또 있을까? 좀 잔인한 일정이지만, 우리는 그 일정을 소화했다. 도종환 시인 등, 지그재그 방식으로 전국에서 사람들이 모였고, 어쨌든 대선 전 날을 그렇게 보냈다.

 

두 가지가 기억에 남는다. 천안 유세는 신세계 앞에서 했고, 길이 막혀서 천안역에서 정말 죽도록 뛰어서 기차 출발 5초 전에 도착했다. 원래 그런 기획이 아구가 잘 안 맞는 건 당연하지 않은가? 천안에서 대구로 가는 기차가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부산역에 도착했을 때, 아뿔싸, 후보와 같은 기차로 도착했고, 당연히 후보가 먼저 연설을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이만큼 열정을 쏟아 부은 것으로 만족하고, 돌아갈려고 했는데, 기획자인 탁현민이 기획한 프로그램이 하나 더 있었다. 부산의 대학생들이 문재인 후보에게 꽃다발을 건네주고 공식 선거운동을 마감하는 순서였는데, 그 마이크를 나에게 돌렸다. 결국, 후보 뒤에서 이번 대선 캠페인의 마지막 마이크를 잡는 영광을 가지게 되었고, 공식적으로 마이크를 쓰는 선거운동을 할 수 있는 마지막 순간에 애국가까지 부르면서 내가 서 있게 되었다. 그 기억은 나에게, 오래 남을 것이다.

 

3. 정동영 그리고 손학규

 

대선 결과는 끔찍했다. 어쨌든 졌다. 그리고 두 명의 정치인을 만났는데, 순서대로, 정동영과 손학규였다. 정동영과는 바로 만났다. 아픔을 나누었다. 손학규는, 독일 가지 말고 여기서 시민들과 아픔을 같이 하자, 그 얘기를 하려고 만났다. 그러나 만나서 들어보니, 그의 사정도 이해가 안 가는 바가 아니다. 그가 대선 중에 만들었던 최고의 구호저녁이 있는 삶’, 그런 걸 정책 프로그램으로 만들 수 있기를 바랬다. 어쨌든 졌다.

 

손학규에게 내가 했던 얘기의 기본 골조는, 지금 여기에서 시민과 슬픔과 괴로움을 같이 지내는, 내 식으로 얘기하면꼬질꼬질한시간을 같이 보내는 사람이 지도자다, 그러니 가지 마라, 그런 거였다. 우리가 꼬질꼬질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손학규는 독일로 간다고 했고, 그날 정동영은 희망버스를 타고 울산으로 갔다. 나는 두 사람이 순망치한이라고 말했다. 이가 없으면 잇몸이 시리다, 두 사람은 그런 관계로 보였다. 서로 아웅다웅하는 라이벌이지만, 같이 있을 때 힘을 받는 사람들이다. 두 사람 다, 앞 길이 잘 안 보이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갈등 속에서도 협력할 수 있듯이, 손을 잡으라고, 두 사람 모두에게 그 얘기를 했다.

 

당신들이 손을 잡지 않으면? 우리가 모두 죽는다. 원로 노릇이라도 똑바로 하시라!

 

4. , 우린 뭘 하지?

 

어쨌든 짧은 몇 주 동안 국민연대의 상임대표로 대선을 치루었다. 최선을 다한다고는 한 것 같다. 그러나 졌다. 그 이후에 꽤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면서 나도 생각을 정리해봤다. 아직도 정리가 다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나름대로 생각한 것들을 많은 사람들과 나누어보고 싶어졌다. 어쨌든 우리는 수다라도 좀 떨어봐야 하지 않겠는가?

 

1) 최악의 공포 버전, 보수 18

 

이번 대선에 내가 제일 좋았던 공약은시민의 정부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음 5년을 기다리는 최선의 버전은, 그 시민의 정부가 단지 5년 유예된 것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건 정말로, 가장 마음 편하게 이 상황을 즐기기 위한 방법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기는 어렵다.

 

박근혜가 바보가 아니라면, 집권 3년차쯤, 중임재 개헌, 이전 용어로 하면원 포인트 개헌을 할 것이다. 레임덕을 줄이기 가장 쉬운 방법인데, 그렇게 개헌을 하고 나면 보통은 개헌 추진 주체 쪽이 정권을 잡는다. 그리고 중임제에서의 패턴대로 하면 8년을 집권하게 된다. 이명박 정권까지 합치면, 통합 18년을 하게 되는 셈이다. 박정희 18년 집권과 이렇게 된 18년을 더하면 36년이다. 이 정도면, 막판까지 버티다가 결국 친일을 하게 되는 그 시기가 보이지 않는가? 이게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버전이다.

 

2) 최선의 버전, 2014년부터

 

현재로서는 불가능한 상상이지만, 지금부터 분위기를 바꾼다면 2014년 총선에서의 승리를 상상해볼 수는 있다. 2014년에 승리하고, 그 분위기로 2016년 총선을 승리하고, 그 힘으로 2017년 대선까지 승리하는 것, 만약에 우리가 다음에 이긴다면 거의 유일한 길은 이 길이다. 부시에게 연패한 이후, 미국의 민주당이 오바마를 내세우기 전까지 왔던 길이 이 길이다.

 

물론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쉽지는 않아 보인다. 이제부터 우리가 기적 같은 것을 만들어야, 앞으로의 18년 보수 집권이냐, 아니면 다른 대안인가, 그런 분기점이 갈린다.

 

3) 3%, 생각보다 크다

 

이번 대선에 3%의 차이로 졌다. 이 차이를 줄이면 다음에는 이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음에는 더 벌어질 가능성이 높다. 이번에는 좌파, 소위진보정당운동했던 사람들이 민주당에 힘을 몰아주었다. 그들은 혹독한 댓가를 감수하고 힘을 몰아주었다. 당장 내가 그렇다. 지난 번 서울시장 선거에서 내가 바로 노회찬 후원회장을 해주었던 사람이고, ‘닥치고 단일화’, 그런개소리하지 말라고 끝까지 버텼던 사람이다. 그들이 다음 번 대선에서도 이번처럼어쨌든 단일화’, 그렇게 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 그걸 염두에 두면, 3%의 차이, 생각보다 큰 것이다.

 

4) 방송

 

방송 여건은 이번에 최악이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조금씩은 개선될 것 같다. 정부나 방송국이 뭘 해서가 아니라, 국민들이 시민방송이든 국민방송이든, 하여간 어떻게든 뭔가 만들어내고 그 격차를 해소하려는 노력을 할 것이다. 쉽지는 않다. 그러나 개선은 될 것이다. 문제는, 돈이다.

 

5) 민주당 당직 개혁

 

이번 대선에서 졌다면, 우린 박근혜한테 진 거다. 정확히는, 박근혜의 새누리당 개혁에 진 거다. 천막당사 시절, 박근혜는 한나라당을 바꿨다. 민주당은 못 바꿨다. 내용은 간단하다. 월급쟁이 혹은 관료로서의 당직자를 새누리당은 만들었는데, 민주당은 대표 바뀔 때마다 줄 서야 하는 구조를 못 바꿨다. 간단히 말하면, 새누리당 당직자는 정규직인데, 민주당은 대표급한테 줄 안서면 비정규직이다. 관료처럼 일하고, 당내 선거에 개입하면 짜른다, 그 간단한 박근혜의 원칙에 이번 대선, 민주당이 진 거다. 이거 못 바꾸면, 영원히 아마와 프로의 싸움, 대선 그렇게 간다.

 

6) 복지 도시, 지금 당장

 

지역 감정 얘기를 한다. 일부는 맞지만, 일부는 좀 이상하다. 대구는 지역소득, 꼴찌인 도시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광주와 대구의 정책 경쟁, 그것은 지금도 할 수 있다. 꼭 중앙 정부를 바꿔야만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지자체 차원에서 할 수 있는 것, 그걸 지금 하지 않고 국민들에게 표를 달라고 할 수 있는가? 예산이 작으면 작은대로,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다. 광주같은 곳에서복지 도시 광주’, 그런 걸 하자. 그런 시도도 못하면서, 우리가 집권하면 잘 할 수 있다, 그 말이 먹힐 리가 있겠는가?

 

7) 시민 아카데미

 

안철수 캠프에 있던 김수진 교수가 나에게 해준 말, 미안하지만 대부분 허빵이라고 느꼈다. 그러나 그가 한 말 중에 정말 맞는 말은, JP가 공화당 시절에 당원 교육 프로그램을 만든 것이, 양쪽의 차이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정말 딱딱한 말이지만, 당원 연수원 같은 것을 제대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 나는 그 말에 동의를 하였다.

 

당원에 가입하면 1주든 2주든, 제대로 된 교육 프로그램을 받을 수 있게 해주는 것, 이런 작은 것에서부터 기초의원에서 국회의원까지, 당에서 운영하는 정식 프로그램 이수자들이 나올 수 있게 하는 것, 이런 게 기본 중의 기본 아닌가?

 

조금 더 상상해보면, 대선 후보들도, 예를 들면 3개월짜리 기본 프로그램을 이수한 사람들 중에서 나오는 것, 그런 게 우리가 가야할 길이 아닌가 싶다.

 

8) 진보 센타

 

부시 재선 이후, 미국의 시민사회가 했던 대부분의 일은 우리도 할 수 있고, 우리도 그 정도의 역량은 있을 법 싶다. 그러나 딱 하나, 힘들다고 생각한 것은 2003년도에 그들이 만든 진보센타이다. , 별 건 없다. 연간 예산 200억원, 100명 수준의 연구원, 이 정도는 우리도 해볼 수는 있다. 다만 차이점은, 미국에는 있던 조지 소로스가 우리에게는 없다는 것, 우리에게는 그 정도의 부자는 안철수 외에는 없었다. 그리고 그는 진보 센타에는 관심이 없었다.

 

진보센타가 별 거는 아니다. 싱크탱크니 뭐니, 엄청나게 부르지만, 여러 정파들이 얼기설기 모여서 얘기를 나눈 것이 전부다. 다만 학자들이 그렇게 늘 모여있다 보니, 선거와 상관없이, 서로 무슨 얘기하는 건지, 일상적으로 내용을 나눌 수 있었다는 점, 네트워크라는 게 그런 거 아닌가?

 

우리도 할 수는 있다. 방법은 두 가지이다. 한 가지는 미국처럼 민주당 밖에 차리는 일이다. 우리도 할 수는 있는데, 추진 주체가 강력해야 하고, 펀딩을 잘 처리하면 된다. 간단한 계산으로는 연간 100억원, 5년간 500억원, 만들 수 없는 돈은 아니다. 그러나 그 돈을 믿고 맡길만한 주체를 만들기는 쉽지 않다.

 

그보다 쉬운 방법은, 지금의 민주당 내부의 민주정책연구원을 정말로 진보의 싱크탱크처럼 만드는 방법이다. 새누리당도 여의도연구소에 어느 정도의 명성을 가진 기관으로 만들었는데, 민주당은 왜 못하는가? 일당 당에서 분리시키면 된다. 그리고 그 역량을 어렵고 힘든 부문 운동들을 위한 지원체로 바꾸면 된다. 이건 당대표 등 지도부가 결심하면 지금도 바로 할 수 있다.

 

싱크탱크를 제대로 만드는 데에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이걸 하지 않고 다른 세상에 기획을 한다는 건, 기본적으로 말이 안된다. 정책역량 없이 선거 치룬다는 건, 언제나 바람에 의지해야 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5. 그리고 시민의 정부

 

안철수에게는 미안하지만, 그가 말한 새정치가 무슨 말인지, 사실 난 잘 이해하지는 못했다. 물론 새로운 정치 흐름이 있어야 한다는 말에는 백퍼센트 동의하지만, 그가 방법으로 말한 국회의원 숫자나 비례대표 문제에 대해서, 나는 크게 동감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가 좋은 세상을 만들고자, 뭔가 많은 것을 포기했다는 것에는 동의할 수 있다. 만약 그가 5년 후에, ‘국민이 아니라시민의 지도자로 돌아온다면 나는 어떻게 할까, 그런 생각을 잠시 해보았다. 그가 시민을 걸고 뭔가 한다면 나는 그를 도울 것 같다. 정권교체가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만들 세상에 대한 미래 모습이 문제라서 그렇다.

 

민주당이냐 아니냐, 친노냐 아니냐, 안철수냐 아니냐, 사실 나는 이런 데에는 관심이 없다. 정권교체? 그 말에는 동의하지만, 무엇을 위한 혹은 누구를 위한 정권교체인가, 그 내용을 채우지 않고, 그냥새정치라고 말하면, 나 같은 경제학자들은 아마 할 말이 없을지도 모른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 아니냐! 그게 바로 민생이라는, 이 지독한 실존적 용어 아닌가?

 

우리는 바람의 선거를 DJ 이후, 아니 87년 이후 끊임없이 치루었다. 그리고 그 선거를 위한 밑바탕, 기본적으로는 시민 사회라는 걸 제대로 만들지 못했다. 그러니 맨날 바람이 부느냐 마느냐, 그런 얘기해야 하는 거 아닌가?

 

우리는 스스로를시민이라고 부르고, 그렇게 정체성을 느끼는 사람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시민의 정부가 온다. 그리고 그게 지금부터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은 그런 일이다.

 

문재인을 열성적으로 지지한 사람들에게, 마지막으로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나에게도 참 뼈 아픈 사실이었는데, 그 얘기를 이 글을 닫기 전에 해야 할 것 같다. 지난 대선, 가난한 사람들은 박근혜에게 더 많이 투표했고, 여성들 역시 그랬다. 이건 진보도 아니고, 뭣도 아니고,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니다. 그냥 우리는, 진 거다.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을 사지 못하고, 여성들에게 대안으로 보이지 않는 정치 프로그램, 이건 아무 것도 아니다. 완패다. 그러나 2014, 우리는 완패하면 안 된다. 그러면 18년 보수 정권, 그렇게 간다. 그 결과, 멕시코보다 더 어려운 나라로 전락하게 된다. 가난한 사람들이 찍어주지 않는 진보 후보, 이건 정말 암 것도 아니다. 다음 대선, 이렇게 치르면 큰 일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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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오후에는 커피를

 

대선 이후로, 뭘 해야 할지, 사실 방향을 전혀 못 잡았다. 경제학자로서는 그만 살고 싶고, 앞으로 뭘 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고, 뭘 해야 변화가 생길지도 잘 모르겠고. 물론 이것저것, 아는 척 하면서 뻥가는 건 할 수 있겠지만, 진짜로는 잘 모르겠다, 이게 솔직한 마음이다.

 

이것저것 고민하다가, 다음 주 월요일 오후 3, 광화문 우체국 옆에 있는 커피빈에서 사람들하고 커피 마시는 것을 첫 행사로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대선 이후, 처음으로 대중들과 만나는 행사이다. 그러나 아무 기획도 없고, 아무 준비도 없다.

 

지 돈 내고, 지가 커피 마시는 거

 

그 이상의 의미도 뜻도 없다. 그러나 그런 거라도 해야 할 듯싶다. 어딘가 장소를 빌려서, 어떻게 알아서 찾아오는 사람들끼리 이것저것 얘기하면서 커피 한 잔 마시고 간담회라고 하는 것, 그건 좀 아닌 듯싶었다. 그런 행사는 참 많이 했다.

 

내가 움직이면, 옆에서 나를 돕는 사람들이 같이 움직인다. 나도 오랫동안 스탭들이 옆에서 행사를 기획하고 진행해주는 삶을 살았다. 그러면 깔끔하고 무리 없이, 작으면 수십 명에서 크면 천명 정도가 움직이는 행사를 처리하게 된다. 그러나 이번만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너무 적은 사람이 와서 썰렁하면 또 그대로, 너무 많은 사람들이 와서 곤란하게 되면 또 그대로

 

일본식 표현대로 대면관계’, 어쨌든 우리는 온라인 바깥으로 나가서 서로의 얼굴을 보고, 막상 보면 어색하거나 혹은 별 거 없다, 그런 것들을 통해서 정말로 만남을 쌓아나가야 할 듯 싶었다.

 

아직 나는 별 뚜렷한 계획은 없는데,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아무 계획 없이 커피 마시는 이런 패턴의 일이 잘 되면, 지방을 비롯해서 전국을 돌 마음은 있다. 제주도를 비롯한 우리나라 전역은 새벽에 출발하면 어디든 갈 수 있다. 실제로 내가 총각 때, 그런 식으로 전국을 돌면서 여행을 했었다. 지금이라고 못할 것은 없다. 월요일 오후 3시면 어디에선가 커피를 마시는 것, 생각보다 낭만적이기도 하다.

 

강연회, 토론회 등등 여러 형식을 생각했는데, 일단은 커피나 한 잔 마시는 걸로 우리의 출발을. 처음 얼굴 보러 나와서 맞는 그 어색함을 이기기 못하면, 박근혜를 죽어라고 지지한 사람들의 끈적끈적함을 절대로 이기지 못한다.

 

어쨌든 일단 커피부터

 

한국에서 버티는 내가 잘 할 수 있는 게, 영혼과 육신 그대로인 인간들끼리, 커피 한 잔 마시는 거, 그거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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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늘고 길게

 

2012년 크리스마스, 일본 문화원에 갔다. 100일 조금 넘은 아기와의 첫 외출이었다. 아내의 오래된 일본 친구와의 짧은 만남을 가졌다. 수 년 전 동경에서 처음 만났을 때 식사를 얻어먹은 적이 있었다. 몇 년 후, 다시 한국에 왔다. 하다 보니 우리 집에도 초대를 하고, 그렇게 지내다 보니 그의 아내가 아기 크리스마스 선물을 샀단다. 우리도 조그만 초콜렛 하나를 사서, 일본 문화원 주차장에서 선물을 교환하는. 문득 돌아서면서, 그도 이제는 참 나이를 먹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년 전에 처음 봤을 때, , 이런 게 정말 일본의 엘리트구나, 그런 날카로우면서도 예리한, 그런 젊음이 느껴졌었다.

 

그가 문재인의 광화문 유세에 섰다는 얘기를 또 다른 일본인 친구에게 건네 들었다는 얘기를 했다. 내가 아는 한국의 외국인 친구들에게는, 정치는 별로 관심 없어 하던 내가 유세차에 거듭 올라갔다는 것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아사이 신문의 문재인 광화문 유세에 바로 옆에 서 있던 내 얼굴이 같이 잡혀서, 이래저래, 아니라고 발뺌하기가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돌아서면서, 아내도 이젠 그가 나이를 먹었다고 얘기를 하였다. 아내가 자기도 나이를 먹었다는 애기를, 오늘 처음 했다. 이제 결혼 생활 9년째, 올해는 아이가 생겼고, 나도 올해는 부쩍 나이를 먹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대선, 잠 짧은 시간이지만, 오랜만에 최선을 다했던 것 같다. 결과는 내가 기대했던 것과는 다르지만, 어쨌든 나는 내가 할 수 있던 것보다는 더 했던 것 같다. 몇 십년 만에 목이 완전히 쉬었고, 정말로 목이 쉴 정도로 외쳤다.

 

어떻게 보면, 짧은 몇 주 동안이지만, ‘굵고 짧게’, 정말 내 삶과는 다른 방식으로 뜨거운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20대 때에는 정말로 나는 굵고 짧게를 외치면서 살았다. 뭐가 최선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는 최선을 다하려고 했고, 굵은 것의 노선을 살았다.

 

30대는 내내 헤매던 시기였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가늘고 길게를 좌우명으로 바꾸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무조건 하지 않았다. 하는 만큼 하고, 안되면 거기에서 멈추었다. 조금만 더 하면 더 좋은 결과가 있는 게 눈에 뻔히 보일 때, 나는 거기에서 멈추어 섰다. 복잡한 이유가 있지만, 어쨌든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내 모습, 그리고 나는 지금 최선을 다 하는 중이야”, 그게 너무 싫었다. 살살 살고, 살살 나오는 결과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마음을 먹으면서솔직히 내 삶은 좀 더 풍요로워졌다. 더 천천히 살고, 결과 보다는 과정을 조금씩 더 즐기게 되었다.

 

그렇다고 가늘게 산다는 게 막 산다는 건 아니다. 그리고 길게 산다고 해서, 배신하는 것과는 좀 다르다. 전향을 하거나 누구에게 의탁하는 것과는 좀 다른 방식의 삶이다. 속도를 조금 늦추고, 성과를 조금 덜 기대하고, 한 방에 뭔가 하는, 그런 일을 절대로 기대하지 않는.

 

가늘고 길게, 이 삶의 핵심은 시니컬해지면서, 다른 사람을 괴롭히지 않는 데에 있는 듯 싶다. 난 이미 다 알았어, 그래서 내가 그렇게 살살한 거 아냐, 그건 가는 것도, 긴 것도 아니고, 그냥 비겁한 것이다. 비겁한 것은, 굵은 거나 가는 것과는 달리, 거꾸로 사는 삶이다. 신념을 바꾸면, 그것도 정방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신념이 바뀔까? 그건 바뀌지 않을 것 같다.

 

내가 궁극으로 이루고 싶은 삶은, 아무도 원망하지 않는 삶이다. 가늘고 살고, 길게 살기 위해서 산다고 하더라도, 누군가를 원망하거나 지나간 일이 아픔을 끊임없이 되새김질 하면서, 자신을 어렵게 하거나, 아니면 남을 어렵게 하는 삶.

 

자신에게 있을지도 모르는 귀책 사유를 늘 누구인가 다른 사람에게 돌리면서 사는 삶은, 그건 비겁한 삶이다. 잠시 자신의 마음은 편하겠지만, 자신을 자신이 속일 수 있겠는가?

 

대선이 끝나고 나서, 누군가에게 이정희랑 식사 한 번 같이 하자는 얘기를 들었다. 그도 자신의 속사정이 있을 터, 그거라도 좀 들어보고, 위로해줄 수 있는 건 해줘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이었다. 잠시 생각해보고, 이정희와 식사를 하게 되면, 그 밥값은 내가 내겠다고 했다. 이정희도 사람이다. 그도 박근혜 앞에서 그렇게 버티기 위해서, 자신을 얼마나 다그쳤겠는가? 그 아픔 정도는 같이 나눌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누구나 아프고, 누구나 무섭다. 삶이란 것은 원래 그렇다. 전쟁은 끝나고, 전투도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싸움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아픔, 누구의 아픔이든, 깃발 아래에서 인간으로 만나면 나눌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이정희의 아픔도, 인간으로서는 그가 느꼈을 공포와 슬픔도 나눌 수 있다고 생각했다.

 

굵고 짧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뒤를 돌아볼 필요 없이 앞으로 나가면 된다. 그러나 가늘고 길게’, 그 삶에는 돌아봄과 연민 그리고 공감 같은 게 필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그건 그냥 비겁한 것이거나 지저분한 삶이 되고 만다.

 

경제학자로서, 지금까지 사람들의 경제적 삶과 주머니 사정만을 돌아보면서 살아왔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사람들의 아픈 마음을 좀 돌아보면서 살려고 한다.

 

정권 교체가 다가 아니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니다. 정권 교체가 다다. 그 방법 외에는 한국을 더 좋은 사회로 만들 방법은 없다. 그러나 세상에는 사회적 삶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아픈 사람들을 서로 돌아보면서 위로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법률 스님이 정권교체 안되었다고 나라 망하는 거 아니라고 하였다. 좋아하는 분이기는 하지만, 그건 좀 아닌 듯 싶다. 나라 망하는 거 맞다. 다만 민주당 때문에 정권 교체에 실패한 것이냐, 그건 좀 아니라고 생각한다. 법륜 스님의 얘기는, 결국 민주당 작게는 민주당 지도부가 잘못한 것이니까, 그들이 바뀌지 않으면 안된다, 뭐 그런 얘기로 이해된다.

 

우리는 망한다, 지금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그러나 그걸 급히 서두른다고 될 것은 아닐 듯싶다. 민주당이 바뀌어야 한다는 말은 맞지만, 사실 그건 아무 것도 안 한 얘기와 같다. 바꿀 수가 없다!

 

이 딜레마 위에 우리는 서 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을 생각해보자. 결국 시민이 이기지 않았는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가늘고 길게, 그렇게 생각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런 걸 천천히 생각해보는 크리스마스였다.

 

예산을 줄이지 않고 국채로 공약, 그것도 아주 일부분을 집행하겠다는 정권, 그건 망하는 길이다. 그러나 그 말을 외연화하기가 참 어렵다. 지금 우리에게 정말로 절실한 것은, 믿고 의지할 지도부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민주당이 그 지도부가 되기는 어렵다는 점이다.

 

가늘고 길게, 버티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머리는 없고, 몸만 있는 이 슬픈 상황, 그게 대선 직후의 우리의 지형도이다. ,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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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이후, 내가 결심한 것

 

문재인의 마지막 유세, 서울역에서 부산역까지, 나는 바람잡이로 따라 나섰다. 먼저 도착해서 떠들다가, 후보 등장하면 ktx 타고 다음 역으로 가는 그런 살벌한 일정이었다. 천안역에 택시로 도착할 때는, 정말 죽도록 뛰어서 출발 5초 전에 기차를 탔다. 어쨌든 그런 우여곡절 끝에 부산역에 도착했다. 정말 추웠다. 후보 연설 바로 뒤에서 짧게 발언할 기회가 생겼고, 이번 대선 캠페인의 마지막 연설을 할 영광을 가지게 되었다. 어떤 의미로든, 영광스러운 순간이었다. 선거법이 허용하는 마지막 유세, 애국가까지 같이 부르고 유세차를 내려왔다.

 

원래의 계획은, 이기든 지든, 일본으로 떠나는 거였다. 일본에 아주 가까운 친척이 산다. 100일 막 넘은 아기를 두고 떠나는 게 눈에 밟히지만, 어쨌든 몸만 가면 몇 달 버틸 수는 있다. 출판사에 여행기 같은 걸 쓰는 걸로 해서 후원을 받는 것에 대한 얘기도 있었는데, 어쩐지 좀 꼬질꼬질해 보여서.

 

졌다는 게 거의 확실해진 밤, 정말로 많은 사람들과 통화를 했다. 거짓말 조금 더 보태면, 100통화 정도는 한 것 같다. 칩거한다는 사람도 있고, 외국에 간다는 사람도 있고, 일단 몸부터 피한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다들 충분히 이해가 되는 상황이다. 그럼 난 어떻게 하지?

 

그 밤에 내가 결심한 것은 딱 두 가지이다.

 

1. 일본에 가지 않는다. 아무 데도 가지 않는다.

2. 사람들과 꼬질꼬질함을 나눈다. 방법은 모른다.

 

마흔 여섯살, 나의 50대에 영광은 없고, 즐거움도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냥 꼬질꼬질한 이 삶을 사람들과 같이 버티기로 했다. 그게 내가 이 사회에 내놓을 수 있는 거의 전부가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때 내 머리를 스치고 간 생각은 간단하다. 지금 사람들과 같이 있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라는 것. 그리고 그걸 피하면, 나중에 내가 내 인생을 돌아보면서 괴로워하게 될 것이라는 점.

 

대선 이후의 민주당의 분열과 아주 복잡한 양상, 뭐 그런 거야 눈에 뻔하도록 보이고, 그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라는 점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살면서, 바보 같은 선택도 내리게 마련이다. 그리고 난 별로, 현명한 방식으로 살아온 사람은 아니다.

 

시민의 정부, 그런 게 한국에 한 번은 있어야 한다는 게 나의 신념이었다. 그리고 문재인은 정말로 그런 시민의 정부를 만들겠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그를 지지한 것이다. 마음 편하게 생각하면, 한없이 마음이 편해질 수 있다.

 

이번에 졌다. 뭐라고 말해도 진 거다. 그렇지만 이건 시민의 정부 출범이 5년 늦어진 것에 불과하다. 솔직히, 한국의 시민 사회는 아직 자신들의 정부를 가질만큼, 그렇게 시민이 폭넓게 등장한 상황은 아니다.

 

시민의 정부도 만들고, 언젠가는 민중의 정부도 만들고 싶다. 그러나 아직은 그 때가 아닌갑다.

 

우리에게는 더 많은 생협이 필요하고, 더 많은 협동조합이 필요하고, 온라인을 벗어나 직접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그런 모임과 조직이 필요하다. 그리고 아직 그런 게 취약하다. 그리고 그런 걸 만드는 데, 5년도 사실 짧다.

 

학력이 높을수록 문재인을 지지했다. 가난할수록, 학력이 낮을수록, 박근혜를 지지했다. 이게 현실이다. 나는 그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앞으로 5, 정말로 시민이 등장하기를 기대하고, 그 힘이 스스로 조직화하면서 구체적이 되기를 바란다.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은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난 부지런한 사람도 아니고, 열심히 사는 사람도 아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서 사는 살고 싶기는 하다.

 

지난 1년간, 늘 마이크를 잡았다. 그러나 이제는 그 마이크를 내려놓으려고 한다. 경제학자가 아니라, 그냥 한 명의 시민으로, 내가 서 있는 곳에서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 전문가의 권위. 경제학자의 권위, 그런 것도 다 내려놓으려고 한다.

 

그냥 한 명의 시민으로, 묵묵히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보면서 살까 한다. 2013, 과연 어떤 방식의 일이 유효한 것이고, 의미 있는 일일까? 그건 아직 잘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한, 5년 후에는 시민의 정부를 가질 수 있게 나도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

 

학자가 아니라 시민으로그렇게 살아가는 게, 더 유효할 것 같다는 정도가 지금 내 생각이다.

 

지금 여기서, 사람들과 같이 고통 받고, 같이 힘들어하고, 같이 괴로워하고, 그래서 결국 우리 모두가 웃을 수 있고, 우리 모두가 서로 사랑할 수 있는 시대, 그게 내가 만들고 싶은 세상이다.

 

증오 위에 세울 수 있는 미래는 없다, 그게 내가 살면서 배운 것이다.

 

진짜 승리, 그걸 2014년부터 맛보고 싶다. 이제 곧 지방선거다.

 

나는 30대 기수론을 주장하려고 한다. 다른 생각은 아니다. 기초의회의 출마자들을 30대로 나이를 대폭 낮추고, 그들이 풀뿌리에서 출발할 수 있어야 미래가 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 새로운 리더가 등장하고, 그렇게 스스로 정치세력으로 만들어지는 것

 

그렇게 2014년 지방선거를 준비하고, 그들 중의 상당수가 다시 2016년 총선에 나서는 것, 그리고 그들이 자연스럽게 시민들의 지도자가 되는 것, 그게 우리가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아닌가 싶다.

 

대선 이후, 40대 기수론을 얘기한 사람들이 일부 있었다. 그러나 정말로 의미 있는 변화가 생기기 위해서는, 30대 기수론이 맞다. 그래야 지금의 20대들에게도 스스로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는 공간이 열린다. 그러지 않고, 거의 지방토호와 다를 바가 없는 지금의 민주당풍 기초의원들이 다시 2014년 지방선거에 나서면, 정말 해법이 안 생긴다.

 

또 한 가지 시도는 이미 민주당이 집권당이 지역에서 만들어볼 수 있다. 단체장은 물론이고, 지방의회도 여권인 지역들이 있다. 예를 들면, 복지도시 광주, 이런 걸 지금 못 할 이유가 없다. 박원순의 서울시만큼만 하면 된다. 그래서 앞으로 5, 광주와 대구의 삶이 얼마나 다른 것인가, 굳이 공중파에서 보여주지 않더라도 정말로 체감할 수 있는 변화를 만들어내면 된다. 행복은 바이러스와 같다. 그런 게 복지의 힘이다. 그건, 민주당이 핑계댈 필요 없이 지금 바로 하면 된다. 지자체에서 할 수 있는 수준의 것들을 하는 것만으로도, 선거 운동 보다 100배는 효율적으로 사람들에게 미래의 실체를 보여줄 수 있다.

 

시민의 경제,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생협과 협동조합, 이런 걸 작게라도 계속해서 만드는 게, 앞으로 우리가 준비할 5년 동안 갈 길이다. 굳이 하방이라는 표현을 쓴다면, 우리는 오프라인 하방을 해야 한다. 마이크 들고, 누군가를 설득한다고, 그렇게 계몽으로 될 일이 아니다. 그냥 우리가 크고 작은 경제 장치들을 만들어서, 우리끼리 행복하고 즐겁고, 그러면서 경제적으로 개선되는 삶을 만들면 된다. 북구의 복지구가가 그런 과정을 통해서 지금의 정치지형을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 이건 지금 하면 된다. 대통령이 해주는 거 아니다. 우리가 시민으로서, 지금부터 자발적으로 하면 된다.

 

나도 마이크를 내려놓고, 더 현실로 가려고 한다. 공중전으로 시민사회가 생겨나지 않고, 시민경제가 커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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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청년들에게 바침

 

대선이 끝난 지 나흘째입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해보려고 하지만, 저도 아직 눈물이 괜히 납니다. 어제는 운전하다가 크리스마스 캐롤인 펠리스 나비다가 라디오에서 나와서 따라 불렀습니다. 거의 조건반사 같은 거겠죠.  그러다 문득, 크리스마스라서 기분 좋아?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선거 이후 한 번도 안 울었는데, 갑자기 눈물이 펑펑 쏟아지더군요. 며칠 동안 담담하게, 앞으로는 뭘 하고 살아야 하나, 그렇게 다른 생각들을 하려고 했었습니다. 그러나 저도 사람인지라, 눈물이 나더군요.

 

87년 대선, 저는 그 때 대학교 2학년이었습니다. 노태우가 당선되고, 친구들과 밤새 술 마시다가 펑펑 울던 순간이 다시 생각났습니다. 그 사이 시간이 많이 지나서, 이제 정치적인 이유로 울거나 그럴 것 같지는 않았는데, 여전히 눈물이 나더군요.

 

박근혜와 함께 살아야 할 5, 앞으로의 변화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갑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아주 어려운 시간이 될 것 같고, 복지는 천천히 진행될 것이고, 언론 자유 등 표현의 자유를 비롯한 많은 자유가 제약되겠지요. 대통령이 뭐라 하지 않아도, 밑의 사람들이 과잉 충성으로 스스로의 입을 조심하는 검열의 시대가 오겠지요.

 

전두환 시절에 우리끼리 농담했던 말이 생각납니다.

 

입 조심, 말 조심, 보약보다 낫다.”

 

막걸리 마시면서 아침이슬 불렀다고 잡혀가고, 학교 정문 앞에서 가방을 열어서 불순한 책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어야만 학교에 들어갈 수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전경들과 잔디밭에 같이 앉아서 밥을 먹던 시절, 그 시절도 버텼는데, 지금부터 5년을 못 버틸까, 그런 생각도 해봤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상실감이 줄어들지는 않더군요.

 

이번 대선에서 한국 청년들이 보여준 움직임은 저에게는 감동이었습니다. 지난 7~8년간, 한국의 청년들의 움직임을 계속해서 연구하던 저로서는, 사실 이런 순간이 왔다는 것을 믿기가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물론 어느 정도의 움직임은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이번 대선에서 20대와 30대가 보여준 그 모습은 저의 예상보다 컸습니다. 감동적이었고, 몇 번이나 현장에서 청년들을 보면서 박수를 쳤는지 모릅니다.

 

불행히도 이번 대선은 졌습니다. 그리고 박근혜가 대통령이 됩니다. 그러나 이번 대선의 실패는 민주당의 실패이고, 민주 후보의 실패이고, 그를 지원하고 지지했던 저 같은 선거 지도부의 실패입니다. 민주당이나 저나, 아니면 전문가나 원로들은 졌을지 몰라도, 한국의 청년들은 이번 대선에서 진 게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자신의 삶과 미래를 위해서 투표했고, 그래서 이제 어느 누구도 한국의 청년들을 우습게 생각하거나 무시하기 어려운 사회적 위상을 얻었습니다. 여러분은 승리한 것이고, 이제 사회적 주체로서, 집단적 주체로서 자신의 발언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어떤 바리케이드나 짱돌보다 더 묵직한, 집단적 투표를 이번에 한 것입니다. 축하 받아 마땅하고, 인정 받아 마땅하고, 또한 존경 받아 마땅합니다.

 

삶은 계속되어 나갑니다. 그 속에서, 이기는 순간도 있고, 지는 순간도 있습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면, 이기는 것도, 지는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건 사회적으로,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한국 청년은 이번 대선에서 승리했습니다. 비록 결과적으로 우리가 졌지만, 여러분들은 진 것이 아닙니다. 많은 분들이 가슴 아프겠지만, 그 가슴 아픔 자체도 승리입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래서 질래야 질 수 없는 상황, 그것은 죽음과도 같은 패배입니다.

 

그러나 지금 여러분들이 혹은 우리가 흘리는 눈물은, 가슴이 살아 뛰고, 피가 혈관을 뛰는 순간, 그 첫 잉태의 먹먹함 같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같이 무엇인가 했는데, 그게 성공하지 못한 순간의 아픔, 그게 진정한 승리를 기뻐할 수 있는 자양분이 됩니다.

 

한국의 청년 여러분, 고생하셨습니다. 비록 50대의 90% 투표에 밀려 지금 우리는 같이 패배를 곰씹고 있지만, 저는 여러분들이 너무나 자랑스럽고 감사합니다.

 

‘88만원 세대의 후속작으로 ‘150만원 세대를 준비하려고 합니다. 대선에서 졌지만, 여러분들의 삶을 ‘150만원 세대로 만드는 일은 계속 하려고 합니다. 세상은 대선 한 번으로 바뀌지 않고, 대선에서 지더라도 할 수 있는 일도 있습니다. 어쩌면 대선에서 이기는 것은, 작은 승리일지도 모릅니다. 한국의 청년 한 명 한 명의 삶이 바뀌고, 경제적 운명이 바뀌고, 그 속에 행복이 깃드는 것, 그게 진짜 승리이고, 큰 승리입니다. 그걸 위해서 우리가 투표장에 갔던 것 아닌가요?

 

오늘, 저는 눈물을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처음으로 집단적으로 뭔가 해보고, 그 첫 투표에서 패배를 맞본 한국의 청년들에게,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글로 위로가 될지,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거라도 해야겠더군요.

 

긴 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우리, 내일부터는 눈물을 거두고, 바로 옆에 있는 동료와 친구에게 위로의 말을 건냅시다. 우리가 서로 위로하기 시작할 때, 그 때 비로소 우리의 미래가 새롭게 시작될 것 같습니다. 이젠, 그만 웁시다. 우리가 만들어야 할 미래가 있습니다.

 

우리는 지는 법이 없습니다!

 

2012 12 23일 우석훈 (공교롭게도 6년 전 바로 이 날이 ‘88만원 세대의 첫 페이지를 썼던 날이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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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질꼬질한 5년을 버티기 위하여

 

대선 선거일, 투표 개표방송을 보러 오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 난 그건 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난 개인이고, 민간인이다. 선거 방송 대신, 난 막 100일을 지난 아기와 간만에 놀아주는 삶을 택했다. 100일된 아기 아빠의 올바른 삶, 그게 아내가 나에게 부탁한 유일한 일이었다.

 

먼저 고백하자면, 나는 선거에 이기거나 지거나, 일본에 몇 달 갈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 들으면 섭섭할 얘기일지 모르겠지만, 선거 전날, 유세 현장에서 이기기가 어렵다는 느낌을 받았다.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유세, 거기를 쫓아다니면서 바람잡이로 뛰었다. 난 최선을 다했고, 20년만에 목이 쉴 만큼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이기기 어렵다는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고통스럽게 봤을 그 방송3사 출구조사 결과를 나도 봤고, 한 시간 정도 지나서, 주변에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꽤 많은 사람들에게, 이 사태를 어떻게 극복해야할지, 의견을 구했다.

 

그날 밤에, 나는 일본에 가기로 한 계획을 취소했다.

 

그냥 한국에 있으면 꼬질꼬질하고, 구질구질하고, 마음도 편하지 않을 것이라는 건 나도 안다. 그렇지만 그냥 그렇게 살기로 마음을 먹었다. 많은 사람들이 앞으로 5년간, 그렇게 꼬질꼬질하게 살아갈 것이다. 좋든 싫든, 우리들에게는 꼬질꼬질함이 기다리고 있다. 명예롭기는 어렵다.

 

나는 그 꼬질꼬질함을 즐겁지는 않지만, 그래도 받아들이기로 마음을 먹었다.

 

5년간, 얼마나 많이 감옥에 가야할지 모른다. 차라리 정치범이나 사상범처럼, 그렇게 폼나게 감옥에 가는 것도 아니라 횡령이나 치정 같은 잡범으로 몰려서 감옥에 가게 될 가능성이 높다.

 

참 꼬질꼬질할 것 같다.

 

그 꼬질꼬질함을, 사람들과 이 땅에서 같이 버티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긴다는 확신? 그런 건 없다. 나도 민간인이다. 명예? 그런 걸 지킬 자신도 없다. 실속? 난 그런 고상한 단어 따위는 모른다.

 

그러나 사람들과 꼬질꼬질한 삶, 그걸 같이 나누기로 마음을 먹었다. 5년 내, 내가 감옥에 가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 것에 대한 자신도 없다. 정말로 꼬질꼬질한 사소한 이유로 경찰서를 들락달락하거나, 검사 앞에 서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앞으로 5년간, 이렇게 꼬질꼬질하게 살게 될 것인가?

 

나는 그 삶을 같이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 원래도 꼬질꼬질한 인간이다.

 

별도로, 또 하나 마음을 먹었다.

 

5년간 생활비가 쪼들릴 것이 분명하므로, 앞으로 5년간은 츄리닝 입고 살기로 마음을 먹었다. 어차피 방송 나갈 일도 없고, 명예로운 자리에 갈 일도 없다. 여름이나 겨울이나. 공식 자리거나 아니거나, 그냥 츄리닝 입고 다닐 생각이다.

 

버티기로 마음 먹었으면... 의식주, 먹는 건 줄일 수 없고, 사는 집도 변수가 아니고, 옷값이라도 줄일까 한다.

 

그래야 비굴하지 않고 버틸 수 있다.

 

꼬질꼬질할 우리의 삶, 그것은 츄리닝과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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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정치의 꽃, 이재영을 보내며...

[추도사] 이재영 전 진보신당 정책위 의장 12일 별세

12.12.14 16:07l최종 업데이트 12.12.14 16:07l
오랫동안 진보정당에 헌신해온 이재영 전 진보신당 정책위 의장이 오랜 암투병 끝에 지난 12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47세. 그와 가깝게 지냈던 우석훈 박사(<88만원 세대> 저자)가 추도사를 보내왔다. [편집자말]
딸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재영 전 진보신당 정책위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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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유세'를 세상에 꺼내놓은 사람

나한테 언제든지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는 식구 같이 지내는 사람이 둘이 있다. 한 명이 환경운동연합의 이상훈이고, 또 다른 한 명이 인민노련 출신, 진보신당의 정책위원장을 하다가 암으로 쓰러진 이재영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재영과 지낸 시간이 벌써 10년이다. 그동안 우리는 참 서로 참견을 많이 하고, 콩내라 감내라, 이것저것, 정말로 별 시덥지 않은 것까지 서로 참견하면서 지냈다. 하다못해 만년필 종류까지 서로 권하고, 그걸 안 사면 삐지기도 하면서.

지난 10년을 지내면서 가장 보람 있던 순간은 단연 2004년 진보정당의 원내진출을 이루었던 바로 그 총선이었을 것 같다. 부유세라는 이름의 세금을 정리하고 세상에 꺼내놓은 사람이 바로 당시 정책국장이던 이재영이었다. 나도 그에게 얼떨결에 끌려가서 환경 공약 조금 정리한다고 하다가 결국 경제정책 전체를 총괄하게 되었다. 완전고용제가 겁도 없이 우리가 세상에 꺼내놓았던 공약이다. 당시에는 '반핵'이라는 용어를 썼었는데, 진짜로 해보자, 그런 의미로 '탈핵'이라는 용어를 만든 것도 그 총선이었다.

총선 이후, 이재영은 자신이 만든 당에서 축출되었고, 결국 <레디앙>이라는 매체 기자로 신분을 전환하게 된다. 나는 이재영이 명예롭게 월급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다가 결국 <88만원 세대>를 레디앙에서 출간하게 되었다. 그 책이 레디앙에서 나오게 된 이유가, 바로 이재영이 그곳에서 월급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보신당이 위기에 빠지면서 이재영에게 다시 당에 복귀하고, 자신은 부위원장 정도 맡겠다고 하는 걸, 굳이 정책위원장으로 정면에 나서서 사태를 수습하는 게 좋겠다고 말했던 사람 중에 나도 끼어 있었다. 그 때 그가 받은 스트레스는 상상 초월이었다. 당에 복귀하고 6개월만에 원형탈모증이 시작되었는데, 그게 암의 시작인 줄, 우리는 너무 몰랐다. 40대 중반, 이제는 암에 대한 고민도 해야 한다는 걸, 그런 걸 모르고 정신없이 달려온 것이 한국 좌파의 삶 아니었던가?

지난 5월 암투병 중에 봄나들이에 나선 이재영 전 진보신당 정책위 의장 가족.
ⓒ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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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지는 법이 없습니다"

대학생들은 인민노련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정말로 '인민'들의 조직으로 생각하지만, 그 때의 인은 인천에서 나온 이름이다. 한국 좌파의 전설적 지하조직, 인민노련 시절부터 언제나 진보정당의 상근자였던 이재영, 그는 언제나 밝고, 언제나 낄낄낄 웃으며, 우리 재밌는 거 하고 놀자, 그러던 사람이었다.

살면서 나도 똑똑한 사람을 참 많이 보았다. 그 중에 제일 똑똑한 사람을 꼽자면, 단연 이재영이다. 그리고 마음이 넓어 정말로 많은 사람을 품고 있는 사람도 많이 보았다. 그 두 가지 특징을 다 가지고 있던 사람, 그를 떠나보내면서 정말로 가슴 한 구석이 무너지는 듯싶다. 그러나 살아서 그가 늘 밝고 명랑했던 것처럼, 그를 우울한 모드로 보내고 싶지는 않다. 그건 그에 대한 예의가 아닐 듯싶다.

독자들에게 내가 하는 사인 중에 "우리는 지는 법이 없습니다"라는 문구가 있다. 그게 이재영의 말이다. 우리는 한때 주머니에 너무너무 돈이 없었고, 술은 너무너무 먹고 싶었다. 이재영의 계좌에 얄팍한 돈이지만 소주 한 잔을 마실만한 원고료가 입금되었을 때, 그가 한 말이다. 우린, 지는 법이 없지! 그걸 입에 달고 살던 사나이가 이렇게 떠난다는 게 믿겨지지 않지만, 이게 엄연한 현실이 되었다.

진보정치의 꽃, 진보정치의 대부, 이재영을 보내며, 너무 슬픔이 많은 한국 좌파들에게 한 마디 하고 싶다. 이제 우리끼리 지나치게 상처주고, 끝까지 물어뜯는 일은 그만하자고. 우린 나눌 돈도 없고, 나눌 영광도 없다. 그러다보니 스트레스가 너무 심하고, 또 누가 이렇게 암으로 떠나게 될지도 모른다. 이제 그만 사랑하고, 서로 좀 보듬어주자고.

이재영이 떠난 지금, 서로 싸우고 토라져있으면, 이제 그만 화해하라고 중재해줄 사람이 더는 없다. 인민노련에서 시작된 이재영의 얘기를 오랫동안 자서전으로 만들까 준비하고 있던 나로서는, 주인공으로 생각했던 이재영이 떠나고 나니 황망하기 그지없다. 우리들의 꿈, 그게 무슨 꿈이든, 그게 이루어지는 사회를 만들어서 이재영의 스토리가 결국 해피엔딩이 되게 만드는 것, 그게 남은 우리가 해야 할 일 아닌가? 그래야 이재영이 하늘에서라도, 봐, 나는 지는 법이 없다니까, 그럴 수 있다.

이재영 전 진보신당 정책위 의장이 걸어온 길

- 1986년~1989년 : 서울, 성남, 안산 등지에서 공장 노동자 조직 활동
- 1989년~1990년 : '사회주의자 그룹' 대외협력 활동
- 1991년 : 한국사회주의노동당 창준위 포항 지부 교육선전 담당
- 1992년 : 민중당 경기도당 정책국장, 백기완 선본 경기남부 집행위원장
- 1995년~1996년 : 진보정당추진위, 진보정치연합 정책국장
- 1997년~1999년 : 국민승리21 정책국장
- 2000년~2006년 : 민주노동당 정책실장
- 2006년~2010년 : 레디앙 미디어 기획위원
- 2010년~2011년 : 진보신당 정책위의장

*출처 : <레디앙>

덧붙이는 글 | 이재영 전 진보신당 정책위 의장의 장례식장은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 17호에 마련됐고, 15일 오전 8시 장례식장에서 영결식을 진행한다. 장지는 용미리 수목장이다. 유족으로는 부인 장성순(해피스토리 대표)씨와 딸 하람(5세), 아들 한슬(3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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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올드하다

 

예전에 유학 시절에 선생한테 들은 얘기이다. 뭔가 새로운 것을 생각해냈다는 생각이 들면, 유일하게 새로운 것은 자신이 새로운 것을 생각해냈다는 그 생각이라는 것. 유사 이래 아무도 새로운 것을 못했는데, 자신은 새로운 것을 했다, 그 생각만이 독창적이라는 것이다. 하긴 그렇다. 모든 요소들은 이미 존재하는 것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새로움은 그 요소들의 조합을 바꾸는 것 외에는 없다. 아니 있을지라도,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신 건강에는 좋을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은 순환론적이다. 지나간 유행이 다시 돌아오면서 첨단이 되고. 이런 것들을 철학사적 운동이라고 부른다.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보고 싶다, 그것은 모든 창작자와 이론가들의 꿈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새로운 것, 그게 도대체 무엇인가? 새롭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것이 어디선가 본 것이거나 누군가 말해준 것이라는 것을 금방 알게 된다. 세상의 모든 얘기는 신화적 원형과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그런 원형과 관련되지 않은 것은, 얘기처럼 보이지만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뭔가에 암시를 받지 않고, 어디선가 보지 않은 것들을 스스로 생각해내는 사람, 그런 사람들을 천재라고 부른다. 모차르트가 그랬고, 카프카가 그랬고, 샤넬이 그랬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극히 드물다. 어쩔 수 없이 무엇인가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인간들, 결국 교육을 받고 책을 손에 쥐는 수밖에 없다. 책을 읽을 때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배우는 방식 그리고 혹시 내가 생각한 것을 다른 사람이 이미 생각하지 않았을까, 검토하기 위해서. 그리고 아주 나중에 배우게 된다. 내가 새로 생각한 것은 없다, 혹은 아직은 그런 것을 만들지 못했다는 사실을.

 

나는 처음부터 새로운 요소를 만든다는 생각은 포기했다. 내 능력과 내 실력으로, 그런 것은 애당초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혹시 그런 것이 가능한 사람이, 예를 들면 조지 루카스처럼 아직도 있을지는 몰라도, 나는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미 존재하는 요소들의 새로운 조합이다. 조합만큼은, 경우의 수만큼 다양하고, 무한대에 가깝다. 같은 얘기를 다르게 하거나, 같은 요소를 다른 셋팅 안에 집어넣거나그건 나도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고민은 남는다. 새로운 조합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너무 익숙해서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이 드는 것, 그것을 나와 영화사의 동료들은 올드하다라고 부른다. 이것은 스타일의 문제이고, 미학의 문제일 수도 있다. 얘기가 틀린 것은 아니지만 혹은 얘기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너무 올드하다’, 그게 우리가 늘 부딪히는 문제이다.

 

그 얘기는 재밌어, 그렇지만 너무 올드한 거 아냐?

 

아 놔, 미치겠네, 어쩌란 말이냐!

 

그러다보면, 결국 그로테스크한 조합들을 집어들게 된다. 기괴하고 괴팍스러운 것. 그러나 그것도 한 두번만 반복하면 금방 올드한 것이 된다. 90년대 후반, 2000년대 초반, 우리 사회는 연애에 관한 것은 질리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러나 지금 공공연하게 연애를 주제로 삼는 얘기들은 그 때에 비하면 엄청나게 줄었다. 그 시절, 시나리오 지망생들이 만들어오는 얘기는 열에 아홉은 연애 얘기였다. 요즘 시나리오 공모전에 나오는 시나리오에 연애 얘기는 거의 없다. 이제는 열에 아홉은 기괴한 살인 아니면 SF. 실제로 영화로 들어가는 것은 거의 보기 어렵지만, 시나리오 작가로 새로 데뷔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얘기에서 좀비 얘기는 이제 너무 진부한 소재가 되어버렸다. 골프장의 좀비, 논두렁의 좀비, 각양각색의 좀비들이 나온다. 아직 한 번도 제대로 한국에서 만들어지지 않은 좀비 얘기지만, 얘기 그 자체로는 너무 올드한 것이 되어버렸다. 당장 나만 해도, 또 좀비 얘기야, 그렇게 신경질부터 낼 지경이 되었으니 말이다.

 

드라마, 영화, 소설, 동화, 다들 새로운 얘기를 찾아 헤맨다. 새로운 것이라는 보장은 전혀 없지만, 그래도 너무 올드해 보이지 않게, 과연 이 얘기가 2013년에도 혹은 2014년에도 새로운 것으로 보일 것인가, 그런 고민을 한다. 그리고 서로 상대방의 작업에 대해서 이렇게 평가를 한다그것은 너무 올드하다.

 

나도 거기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바보 삼촌을 모티브로 동화책을 구상 중인데, 기왕 하는 거면 루이스 세풀베다 보다는 잘 하고 싶다마음이야 그렇지만, 무슨 수로 세풀베다보다 잘 할 수가 있겠는가. 의인화된 고양이 얘기로는 전세계 갑이 바로 세풀베다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세풀베다를 모방하거나 심지어 카피하지만, 그걸 뛰어넘기는 어렵다. 그리고 그를 뛰어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누군가 말할 것이다.

 

그것은 올드하다.

 

새롭지는 않아도, 올드하지는 않으려고 하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다. 그리고 그걸 다 뛰어넘어 진짜로 새로운 것을 만든다면, 그건 너무 이상해서 아무도 보지 않으려고 하는 얘기가 되어버릴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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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 백일

 

아기가 태어난지 100일째가 되었다.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별 의미 없는 행사로 사람들 힘 빼는 걸 아주 싫어한다. 거기에 이사 등 복잡한 일들이 겹쳐서, 아기 백일은 따로 하지 않았다. 장모님이 수수떡을 만들어주셔서, 잠시 밥상 하나 차리고 사진 찍은 게 전부.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나의 아들이라서 특별 대접을 하거나, 정말로 좋은 것들로 치장해주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옷도 거칠게 입힐 생각이고, 음식도 특별히 맛있는 것을 구해다가 먹일 생각도 없다. 다들 산다는 유모차, 아직도 안 샀다. 그냥 아가방 같은, 국산으로 살 생각이다.

 

그렇지만 이유식은 내가 직접 만들어서 먹이려고 한다. 그 정도가 내가 해줄 수 있는 거의 전부일지도 모른다. 그만큼은, 내가 직접 해주고 싶다.

 

대치동 교육이라는 게 있고, 목동 교육이라는 게 있다. 물론 그 길과는 반대의 길을 갈 거다. 아기를 덜 사랑해서가 아니라, 그건 우리 모두를 위해서도 옳지 않고, 길게 보면, 자식을 위해서도 좋지 않다. 그리고 꿈을 가지라는 둥, 희망이 뭐냐는 둥, 그런 택도 없는 얘기를 할 생각도 없다.

 

그렇지만 동화책을 많이 읽어주려고 하고, 되도록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려고 하고, 아이가 글자를 알게 되면 볼 수 있는 동화책을 쓰려고 한다. 아내가 그런다.

 

지 아버지가 쓴 동화책 읽으면서 크면, 아무래도 좋겠지…”

 

내가 나의 아들이 읽었으면 하는 글, 그건 내가 상업적인 고려로 쓰는 책이 아닐 것은 너무 뻔하지 않은가? 장사 속으로 쓴 책을 자기 자식에게 읽히려는 부모도 있는가? 어쨌든 이 정도는 알았으면 좋겠다, 그런 얘기를 써보려고 한다. 그건 내가 아기 백일을 맞으면서 생각하는, 최소한의 안전장치이다.

 

아프리카에, 그런 말이 있었다고 한다. 아기 하나를 키우기 위해서는 부족 하나가 필요하다고맞는 말이다. 아기 하나를 키우기 위해서는, 좋은 학원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회, 그야말로 개수작이다. 우리의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우리의 공동체는 복원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게 지금 없으니, 학원이라도 보내야 하지 않느냐고? 진짜로 개수작이다.

 

백일도 안 했지만, 아내는 돌도 하지 않았으면 하는 눈치다. 하긴 그렇다. 그런 게 뭐가 필요하겠나 싶다.

 

교육과 보육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놓은 상식 밖의 일이 너무 많다. ‘88만원 세대에서 인질 경제학이라는 표현을 쓴 적이 있다. 정말로 인질 경제학이다. 그리고 미안하지만, 인질에게는 평생 지워지지 않을 듯한 트라우마가 남는다. 그런 트라우마를 일부를 다음 세대에게 줄 이유가 없다.

 

한국에서 제일 불행한 부모는, 자식을 국제중학교에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부모들이다. 그 자식이 불행해지기 전에, 부모들이 먼저 불행해진다. 명박이 죽어라고 만들어야 한다고 했던 국제중학교, 그 동기와 메커니즘이라는 것이 너무 뻔하지 않은가?

 

아기 백일에 찍은 사진 몇 장을 정리하면서, 이런저런 생각들이 잠시 들었다. 이것저것, 조금씩 실천해보려고 한다. 뭘 해야 하는지, 나도 아직 잘 모른다. 그러나 뭘 하면 안 되는지, 그런 건 좀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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