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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11.29 돈 없어서 혹은 외로워서 2
  2. 2013.11.27 김수환 추기경 보복하려던 박정희 1
  3. 2013.11.27 기사 하나씩 골라보련다...

오늘 고른 기사는 서평이다.

 

앞으로 우리가 가게 될 미래에 대한 그림 하나를 여기에서 볼 수 있다.

 

http://www.pressian.com/books/article.asp?article_num=50131129131432

 

 

돈 없어서 혹은 외로워서… 日 청년들 너도나도

[프레시안 books] <셰어 하우스>·<컬렉티브 하우스>

허그림 경희대학교 공공대학원 석사과정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3-11-29 오후 7:10:39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부터 비교적 다양한 공동주거를 경험해왔다. 여행 생활자로 아시아 이곳저곳을 떠돌던 시절에는 게스트하우스의 도미토리에서 장기간 투숙하였고, 일본 도쿄에서 체류하는 동안에는 4LDK 맨션에서 6~8명의 또래 여자아이들과 함께 살았다. 직장 때문에 서울에 전입신고를 하고부터는 망원동의 연립주택에서 혼자 살았지만, 여하간의 사정으로 다시 해방촌 주거공동체 방 두 칸짜리 빌라에서 다섯 명이 살을 부대끼며 지냈고, 지금은 회기동에서 룸메이트와 함께 살고 있다.

공동주거를 선택한 데에는 주거비를 아낄 수 있다는 경제적 이유가 큰 영향을 미쳤지만, 안전한 생활, 셰어메이트와의 교류, 주거공동체로서의 연대 등의 이점도 긍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생활이란 더럽고 치사한 것. 쓰레기 분리수거나 배수구의 머리카락 따위가 이슈가 되고, 무뎌짐이 반복되면 갈등이 생긴다. 한편, 공간의 사적 소유를 제한하기 위해서 개인의 잠자리조차 정해놓지 않은 경우도 있었는데, 공동체의 지향점에 공감하면서도 밤마다 이부자리를 옮겨 다니는 것은 귀찮은 일이었다. 그럼에도 내가 공동주거를 지속하는 이유는 함께 사는 친구들의 '온기' 때문이었다.

▲ <셰어 하우스>(구보타 히로유키 지음, 류순미 옮김, 클 펴냄). ⓒ클
신간 <셰어 하우스>(구보타 히로유키 지음, 류순미 옮김, 클 펴냄)와 <컬렉티브 하우스>(고야베 이쿠코·일반재단법인 주총연 지음, 지비원 옮김, 클 펴냄)는 대도시에 거주하는 독신의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는 '셰어 하우스'와 다양한 연령과 가족 형태를 가진 사람들이 참여하는 '컬렉티브 하우스'라는 공동주거 문화를 소개한다. 두 권의 책은 일본 사회의 근간을 이루어온 가족 중심적 주거문화를 비판하고, 신자유주의 확산으로 인한 사회공동체 해체, 위험의 불확실성 증가 등과 같은 사회문화의 맥락적 변화에 따라 대안적 주거문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구보타 히로유키의 <셰어 하우스>는 도쿄에서 '셰어'를 하고 있는 젊은이들과의 인터뷰를 통해서 일본의 셰어 하우스를 설명하고, 이러한 주거문화에 대한 의미를 모색한다. 일본에 최초로 컬렉티브 하우스를 소개한 고야베 이쿠코와 일반재단법인 주총연의 공저인 <컬렉티브 하우스>는 거주자 인터뷰와 사례 연구를 통해서 컬렉티브 하우스의 생활과 운영체계를 면밀하게 소개하고, 전문가와의 대담 등을 통해서 제3의 주거 또는 자립공조의 주거운동으로서 컬렉티브 하우스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셰어 하우스

셰어 하우스는 말 그대로 가족이 아닌 타인과 주거를 공유하는 것이다. <셰어 하우스>에서는 기숙사 생활처럼 한 방을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방을 따로 쓰면서 거실이나 부엌과 같은 공간을 함께 사용하는 공동주거의 개념을 가리킨다. 일본에서 최근 십 년간 '셰어'가 확산된 배경에는 신자유주의적 정책의 일환인 노동 시장의 유연화로 인한 파견사원 또는 비정규직이 양산이 있었다. 불안정한 고용 형태에 처한 젊은이들은 대도시의 높은 주거비를 감당하지 못하고, 홈리스, 넷 카페(PC방) 난민(PC방을 임시주거 삼아 생활)으로 전락하거나, 패러사이트 싱글(20대 중반 이후에도 취업이나 결혼을 하지 않고 부모에게 의존함)이 되었다. 이밖에 사회문화적 요인으로는 외국 생활에서 공동주거를 경험하고 돌아온 사람들도 있는데, 이들에 의해서 셰어 문화가 도입되었고, 인터넷 확산으로 정보 교환이 용이해졌으며, 관련 주제를 다루는 미디어의 영향이 있었다.

저자는 셰어 하우스 거주자 인터뷰를 통해서 셰어의 이점을 경제적, 비경제적 측면으로 구분한다. 경제적 이점에 대해서 학생, 사회초년생, 비정규직 등의 거주자들은 주거비를 아끼기 위해서, 안정된 수입이 있는 거주자들은 보다 쾌적한 환경에서 살기 위해서라고 응답하였다. 비경제적 이점, 즉 정서적 이점에 대해서 일부 거주자들은 함께 사는 타인이 가족의 연장선상에 있거나 가족을 대신한다고 응답한 반면, 가족이 아니라 또래이기 때문에 같은 세대만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역할'로부터 해방되며, 타인을 배려하고 존중함으로써 스스로 성장한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다. 당연히 셰어에 대한 불만과 어려움도 있는데, 셰어 하우스의 구성원마다 가사분담과 같은 "서비스 수준", 자발적으로 셰어에 관여하는 "관여 수준", 그리고 경제 사정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또한 가족 중심으로 설계된 일본의 주택 사정과 관련한 구조적인 문제와 셰어에 대한 주변의 인식 부족도 어려움으로 작용한다.

컬렉티브 하우스

▲ <컬렉티브 하우스>(고야베 이쿠코·주총연 지음, 지비원 옮김, 클 펴냄). ⓒ클
일본의 현대 사회에서 고령화와 이혼, 비혼, 만혼의 증가로 소규모의 다양한 가족 형태(핵가족, 한 부모 가족, 1인 가족, 자식이 없는 부부, 동거 커플 등)가 등장하고 있고, 이들은 가족 중심적 문화와 지역 커뮤니티 부재로 인해 사회적으로 고립된 상황에 처해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도 중의 하나인 컬렉티브 하우스는 다양한 연령과 가족 형태를 가진 사람들이 독립적인 집들에 거주하면서, 공용 공간에서의 활동(정기모임, 공동식사, 그룹 활동 등)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교류할 수 있도록 설계한 도시형 공공임대주택이다.

이는 "가족을 넘어선 자립공조의 느슨한 유대"를 형성함으로써 고립에 대한 불안감과 가사·육아의 부담을 덜어준다. 가족의 경계를 넘어서 신뢰와 호혜성에 기반을 둔 일종의 사회안전망이 작동하는 것이다. 스웨덴에서 처음 시작한 컬렉티브 하우스는 1995년 고베 대지진으로 집을 잃은 사람들에게 공급하기 위한 공공임대주택 모델로 일본에 도입되었고, 현재 도쿄를 중심으로 한 4개 지역에서 운영되고 있다.

컬렉티브 하우스의 가장 큰 특징은 거주자들이 직접 관리와 운영에 참여하여 자조(自助)적인 공동체를 구성하는 것이다. 거주자 조합을 조직하여 정기모임을 하고, 기본적으로 거주자의 전원 합의에 따라 문제를 해결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거주자들은 시민의식을 향상시킬 수 있다. 또 다른 특징은 임대로만 운영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라이프스타일의 변화에 따라 집을 선택할 수 있게 함으로써, 주택을 단순히 투자 개념으로 보기보다 주택의 사용 편익에 초점을 맞춘다. 따라서 컬렉티브 하우스는 "모든 사람에게 열린 집단주거 형태이지만, 거주자들이 공간을 같이 사용하고 생활의 일부를 공동화하며 같이 운영하는 데 협력을 꾀해야 하는 생활이므로 주택 공급 모델로서 유통하기보다, 오히려 현대적인 사회적 거주운동으로 다루어지는 편이 좋을 것 같다."고 논의된다.

타인과 함께 살기

공동주거의 실천은 가족 중심의 혈연 공동체에서 벗어나 타인과의 연대를 상상할 때 가능하다. <셰어 하우스>의 저자 구보타 히로유키는 셰어 하우스를 불안정한 고용 형태와 가족 중심적 주거문화를 해결하기 위한 젊은이들의 연대로 본다. 그들은 공동생활을 통해 "공공성과 친밀성을 재편"함으로써, 독신생활 또는 가족생활이 아닌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이러한 동향은 집안에서 지역사회로 확장될 수 있다. <컬렉티브 하우스>의 저자 고야베 이쿠코가 언급했듯이, 공동주거 운동에는 "각 개인의 자유와 자립을 전제로 하면서 어떻게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회가 관계를 맺을 것인가"의 사고방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대안적 주거문화가 구성하는 커뮤니티의 특징은 "느슨한 연대"로, 공동주거 문화의 보급과 지속가능성 논의와 연계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개인의 관점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어, 앞으로도 많은 시행착오가 예상된다. 느슨한 연대는 우선 타인과의 적정한 거리감을 유지하면서 공동생활에 참여하는 "서로 부담이 되지 않는 선에서 기분 좋게 주고받으며 돕는 관계"를 의미하는데, 문제는 개인마다 이 적정한 거리감이 다르다는 것이다. 나의 관심이 누군가에게 간섭이나 참견으로 생각될 수 있다. 또한 적정한 거리감 유지의 실패로 인한 거주자와의 불일치나 공동생활의 부적응, 결혼이나 전근 등으로 입주와 퇴거가 반복된다. 거주자의 변화에 따라 규칙과 생활 운영을 바꾸며, 주거공동체는 재구성된다. 이것은 주거의 역동성 또는 선택성과 불안정성을 동시에 함의한다.

최근 소규모 가족이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는 한국에서도 공동주거의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성공적인 컬렉티브 하우스 사례 '소행주(소통이 있어 행복한 주택)',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활성화되고 있는 셰어 하우스 등 민간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다양한 공공임대주택 공급 요구에 따라 서울시는 협동조합형 임대주택, 셰어 하우스형 임대주택 등의 시범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경제 성장 모멘텀은 멈춘 지 오래되었고, 학자금과 전세자금 대출 등으로 부채에 시달리며 월세 탈출의 꿈이 점점 멀어지는 현실을 목도해야 하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공동주거는 대안적인 주거문화로 정착할 수 있을까. 그래도 한번쯤은 시도해 볼만하지 않은가. 신자유주의에 대항하여 각개전투를 벌이는 우리는, 어쩌면 공동주거 문화의 지속적인 관심과 고민인 '사회적 관계' 속에서 서로를 어루만지며 사회성과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인생이란 혼자 살 수 없기 때문에 더럽고 치사하고 구질구질한 것이니까.

▲ 도쿄 이케부쿠로에 있는 한 셰어 하우스의 평면도. ⓒwww.oakhouse.jp
 

/허그림 경희대학교 공공대학원 석사과정 메일보내기 필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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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학순 주교, 예전에 그의 책을 읽은 것 같은데, 이젠 기억에서도 가물가물하다.

 

정의구현사제단이 유신과의 악연, 특히 지학순 주교 사건으로 생겨났다는 것, 이래저래 생각해볼 만한 사건이다.

 

정의, 이 용어 자체는 굉장히 보수적인 용어이다. 오죽하면 전두환도 당 이름으로 민주정의당...

 

정의라는 단어가 다시 핫해졌다는 거, 세상에 좋은 신호는 아닌 듯 싶다.

 

 

 

http://omn.kr/51h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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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후보가 2012년 12월 13일 오후 베론성지를 찾아 여진천 주임신부와 함께 민주화 운동가로 널리 알려진 지학순 주교의 묘역을 참배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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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구현사제단 탄생 배경, 유신정권의 지학순 주교 사건

박정희 대통령:
추기경님, 종교란 마음의 정화를 위해 존재하는 것 아닙니까? 종교가 정치, 경제문제에 개입하는 것은 고유 영역을 벗어나는 일이고, 정교분리(政敎分離) 원칙에도 맞지 않습니다.


김수환 추기경: 사회가 윤리,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부정부패로 썩어가는데도 교회가 수수방관한다면 그것은 직무유기입니다… 정교분리 원칙은 마땅히 존중해야 합니다. 교회가 정부 인사나 정책에 직접 관여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치, 경제 등 사회 모든 문제에서 인간 기본권이 유린당하거나 정의에 어긋나는 일이 있으면 '아니오'라고 말해야 합니다. –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유신정권과 지학순 주교 사건 중 (2004. 2월 1일 평화신문)

1974년 4월 유신정권은 민청학련 사건을 발표하면서 '학생들의 집단행동을 금지하는 긴급조치 4호'를 발령했다. 긴급조치 위반자들을 대량 구속했는데 이 가운데 가톨릭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가 포함돼 있었다. 교회와 국가권력이 정면충돌하는 불상사가 일어난 것이다.

1974년 7월 10일 청와대에서 김수환 추기경과 박정희 대통령이 만나 시국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 자리에서 박 대통령은 '왜 사제가 정치적 발언을 하는지' 따져 물었고, 김 추기경은 '세상의 빛과 소금 역할에 충실한 것'이라고 대답했다. 나름 회담이 만족스러웠던지 박정희는 선물(?)로 지학순 주교를 풀어주었다. 그러나 풀려 나온 지학순 주교는 '죽음을 각오하고 독재권력과 싸우겠다는 결의'를 내보였다. 상황은 심각해져 갔다. 결국 내·외신 기자회견을 하는 자리에서 지 주교는 선언한다.

"본인은 양심과 하느님의 정의가 허용치 않음으로 비상군법회의 소환에 불응한다. 유신헌법은 민주 헌정을 파괴하고 국민 의도와 관계없이 폭력과 공갈과 국민투표라는 사기극에 의해 조작된 것이기 때문에 무효이고 진리에 반대된다…."

크게 화를 낸 박정희는 지 주교를 구속했고, 결국 양심을 고백한 죄로 지 주교는 유신정권으로부터 징역 15년을 선고받게 된다. 교계는 거세게 들끓었다. 가톨릭 각 교구는 시국기도회를 열어 유신정권 탄압을 규탄했다. 피가 끓는 젊은 사제들은 타 교구 시국기도회까지 참석하는 열정을 보였다. 지학순 주교는 구속된 지 이듬해인 1975년 2월 석방되었다.

다음은 그와 관련해 김수환 추기경이 남긴 후일담이다.

"지 주교님은 옥고를 치르고 이듬해(1975년) 2월 15일 석방되셨다. 그 사건을 겪는 동안 가장 가슴 아팠던 일은 교회분열이었다. 젊은 신부들은 지 주교님 사건에 대한 조직적 대응이 필요하다고 보고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결성했다. 9월 26일 시국선언을 하고 명동에서 가두시위를 벌였다. 사제들이 주도한 최초의 가두시위였다. 그러나 생각을 달리하는 연장 신부들은 반대편에서 '구국사제단'을 만들어 다른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교회가 이념논쟁에 휘말리는 형국이었다."
-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유신정권과 지학순 주교 사건 중 (2004. 2월 8일 평화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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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와대를 방문한 김수환 추기경이 근혜양과 악수인사를 하고 있다. 반유신 발언을 자주한 김수환 추기경과 박정희 대통령은 불편한 관계였다.
ⓒ 평화신문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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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추기경 설명대로 1974년 유신정권과 극명하게 맞서 구속되었던 지학순 주교 사건으로 젊은 사제들을 중심으로 '정의구현사제단'이 결성되었다. 사제단의 정신적 지주는 지학순 주교였다. 그런 행동에 반대하는 반대세력이 가톨릭 내부에도 있었다. 일부 나이 든 사제들은 '구국사제단'을 결성해 내부적으로 대립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로 인해 탄생한 '사제단', 끝내려는 딸

박창신 신부의 '연평도 논란'을 키운 사람은 단연 박근혜 대통령이다. 박 대통령은 25일 수석비서관 회의를 주재하고 전에 없이 강경한 입장을 표명했다. "저와 정부는 국민들의 신뢰를 저하시키고 분열을 야기하는 이런 일들은 용납하거나 묵과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묵과하지 않을 것'이란 표현을 하기 위해 25일 만에 수석비서관 회의에 참석한 것이다.

이 자리에서 박 대통령은 "민주사회에서 다양한 의견과 갈등을 피할 수는 없지만, 대화를 통해 이견을 조정하고 합리적 결론을 내고 그것에 승복하는 것이 민주주의"라고 강조했다. 심지어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도 오랜만에 참석하면서 '소통' 운운하는 모습이 낯설다. 이날의 발언을 두고 <경향신문>은 '박 대통령 취임 후 최고 강경 발언, 반대세력에 선전포고'로 해석했다.

박창신 사제의 발언을 놓고 이어지는 정부, 여당의 초강경 발언을 보노라면 가장 강력한 권력을 행사한다는 취임 첫해를 '댓통령' 논란과 검찰 수사로 보내고 있는 박 대통령과 집권세력의 대반격 의도까지 엿보인다. 대놓고 쳐 놓은 그물망에 '신(神)의 사람'이 들어와 앉아 있는 상황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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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근혜 정부의 '파상공세' 박창신 신부의 '연평도 발언'을 기다렸다는 듯이 파상공세로 나서는 청와대, 정부, 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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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발언 논란이 확산되자 문제의 발언을 한 사제는 '노인네가 한 마디해서 잡아 가면 잡혀가는 것이고'라고 말했다. 26일 검찰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고발된 박 신부에 대해 수사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권력의 모든 힘이 집중된 상황에서 박 신부에 대한 수사는 결국 한 개인이 아닌 단체, 정의구현사제단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관련해 언론과 보수단체들의 움직임도 매섭다. 방송3사 및 조중동(종편)이 파상공세에 나서고 있다. <조선일보>는 26일 2개 지면을 할애해 '정의구현사제단 파문' 특집을 게재했다. '정의구현사제단' 주제로 3일 연속 사설을 통해 비판하고 있다. 25일자 사설로는 '종북구현사제단'이라고 이들을 칭하는 등 의도성을 가지고 색깔몰이를 하고 있다. 

사제단의 시국미사와는 다른 목소리도 가톨릭 내부에서 들린다.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대주교는 지난 24일 미사 강론 중에 "사제의 직접 정치참여는 금지, 평신도들의 정치참여는 의무"라고 의견을 밝혔다. 보수언론과 권력은 앞 단락을 취했고, 진보언론과 반대세력에서는 뒤 부분을 취했다. 지난 1974년 때 김수환 추기경이 걱정했던 것처럼 '교회의 분열' 현상도 엿보인다. 약 40년 전과 동일한 상황에서 가톨릭이 몸살을 앓고 있다. 김수환 추기경의 존재유무만 달라졌을 뿐, 모든 것이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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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면에 나선 박근혜 대통령 박 대통령이 25일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박창신 신부 발언에 대한 단호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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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에 거슬리는 말만 하면, 같은 행동하는 아버지와 딸

KBS TV로 전국에 생방송 되는 그날 자정미사 강론에서 말문을 열었다.

"… 정부와 여당에 묻겠습니다. 비상대권을 대통령에게 주는 것이 나라를 위해서 유익한 일입니까? 그렇지 않아도 대통령한테 막강한 권력이 가 있는데, 이런 법을 또 만들면 오히려 국민과의 일치를 깨고, 그렇게 되면 국가안보에 위협을 주고, 평화에 해를 줄 것입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마침 미사중계를 시청하고 있던 박 대통령은 그 충격적 발언에 버럭 화를 내고 방송국에 방송중지 명령을 내렸다. 박 대통령은 날이 밝는 대로 장관들을 소집해서 나에 대한 처리문제를 논의하려 했다는 얘기까지 내 귀에 들려 왔다. 그런데 그날 아침 165명이 사망하는 대연각호텔 화재참사가 발생했다. 그로 인해 청와대에서 내 문제가 흐지부지 묻혔다.
–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내가 만난 박정희 대통령' 中 (2003년 12월 7일 평화신문)

추기경 전언에 따르면 박정희 대통령은 자신을 불쾌하게 만든 김수환 추기경에게 보복하기 위해 국무회의를 소집하려 했다. 대연각 호텔 화재참사가 아니었더라면 지학순 주교 사건 이전에 김수환 추기경 사건이 발생했을 것이다. '비상대권을 대통령에게 주는 것이 옳은지'를 물었을 뿐인데 박 대통령은 추기경을 혼내려고 했다.

그로부터 40여 년이 흐른 지금. 사제단이 박근혜 대통령의 사퇴를 촉구하는 미사를 열었다. 박창신 신부는 26분 강론 중 '연평도 포격사건' 얘기를 지나가듯 짧게 했다. 대통령, 총리, 여당대표 등 모든 권력자들이 앞다퉈 '묵과할 수 없는 일, 처벌 운운'하고 있다. 연평도는 '이명박 때 사건'이다. 지금 이 정권은 전 정권에 대한 비판을 가지고 '사상의 대반격'을 모색하는 중이다.

1년 전 대선 기간으로 돌아가 보면 지금과는 굉장히 특이한 장면과 조우하게 된다. 대선 D-6일 전인 2012년 12월 13일(목) 늦은 오후 해가 지는 한 야산을 박근혜 후보는 오르고 있었다. 그곳은 천주교의 대표적 성지인 '베론성지'. 박 후보는 '지학순 주교' 성지를 참배했다. 당시 새누리당은 박 후보 일정 브리핑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지학순 주교 묘소 앞에 선 박근혜 후보는 흰색 장갑을 끼고 헌화와 분향을 했고, 3분여간 묵념을 했다'

지 주교의 묘소는 평지에 있지 않고 눈 쌓인 언덕 위에 있었다. 박 후보는 지팡이를 짚고 200여 미터를 올라 3분간 묵념했다. 박 후보는 산에서 내려와서 "국민들에게 고마운 마음 때문에 정치를 떠나기 전 행복을 선사해드리고 싶었다"고 참배의 의미를 설명했다.

정의구현사제단은 지학순 주교 사건 때문에 창설되었다. 사제단은 유신독재를 강력히 비판한 그를 지지하면서 활동했다. 즉, 지학순 주교는 사제단의 앞단에 서서 박정희 군사독재와 대립했다. 박근혜 후보는 1년 전 힘겹게 사제단의 우두머리 묘소를 찾아가 3분 동안이나 묵념했다. 1년이 지난 지금 박 대통령은 사제단을 매섭게 몰아세우며 '공안의 법정'에 가두려 하고 있다.

이쯤 되면 오히려 박 대통령에게 묻고 싶다. 정의구현사제단을 '종북사제단'으로 매도하는 집권세력의 수장으로서 1년 전에는 왜 그 사제단의 정신적 지주를 찾아가 헌화하고 분향하고 묵념했는가. 지금도 지학순 주교 묘소를 참배할 마음이 있는지도 궁금하다. 

유체이탈 화법으로 피해가지 마라. 이제 박근혜 대통령이 답할 차례다.

덧붙이는 글 | 개인블로그인 busase.tistory.com에도 게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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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을 많이 보는 편은 아니다. 주기적으로 보는 기사는, 요미우리 신문 영자판, 워낙 한국에서 나오는 일본 기사가 열악해서 따로 배달시켜서 보는 중이다. 의외로 배우는 게 많다.

 

르몽드나 리베라시옹 같은 것도, 주기적으로 보지 않은지 꽤 된다. 이젠, 누가 누군지 정말로 모르겠다.

 

하여간 손에 잡히는 대로, 하루에 재밌는 기사 하나씩 골라 보려고 한다.

 

시대가, 참 어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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