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저녁 때 둘째한테 문방구 가서 장난감 사준다고 약속했다. 가자고 했더니, 백화점에서 본 거라고..

타협에 타협을 거듭해서, 동네 문방구에 있는 걸 걸어가서 사기로 했다. 큰 애는 같이 가는 김에 아주 작은 장난감 하나. 캑캑. 토론하고 결론에 이르는데 결국 30분.

문방구 두 개를 다 뒤져서 둘 다 마음에 드는 걸 샀다.

닌자고 레고 8천 원, 아이언맨 레고 3천 원.

오는 길에 저녁에 구워먹을 삼겹살과 빵 쇼핑.

하나하나 선호와 포기를 하면서, 허버트 사이먼의 satisficing principle의 오묘함을 잠시 생각했다.

그래도 기저귀 갈던 시절에 비하면 대화하고 토론하고 타협하는 지금이 훨씬 편하다..

'아이들 메모'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경주 바닷가..  (2) 2020.07.23
귀뚜라미..  (0) 2020.07.21
삶의 딜레마, 어린이로부터..  (4) 2020.07.11
모기 퇴치기..  (1) 2020.07.10
포돌이 셋트 두 개..  (1) 2020.07.02
Posted by retired
,

박원순 사건이 지난지 며칠 되지도 않았다. 머리 복잡하고, 심경도 복잡하다. 

트라우마로 얘기하면, 매우 많은 사람들에게 트라우마가 생겼을 것 같다. 영화 명랑에 최민식이 영화 끝에서 말한다. "이 많은 원혼을 다 어쩔 것이냐." 조선 수군이든 일본 수군이든, 명랑에서 원혼이 된 것은 마찬가지다. 

일장공성만골고라는 말이 있다. 장군 한 명이 이름을 드높이는데 만 개의 해골이 뒹굴게 된다는.. 참 슬픈 얘기기는 하지만, 이건 지금도 그런 것 같다. 

젠더 경제학 책을 좀 빨리 쓸 수 없느냐는 얘기를 몇 군데에서 들었다. 

직장 민주주의 책에서 젠더 민주주의라는 장을 하나 열었던 적이 있다. 생활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좀 더 복합적이고 입체적으로 그려보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다. 직장 민주주의라는 개념은 생활 민주주의의 하위 개념이다. 좀 더 상위의 개념으로서 생활 민주주의를 얘기하기에는, 아직은 좀 빠르다는 생각을 했었다. 

젠더 경제학에서는 생활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직장을 너머 가족 같은 데로 좀 더 전개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이런 것들이 궁극적으로 가고 싶은 것은, '남성 엘리트주의' 그 이후의 사회에 대한 표상을 그려보는 것이다. 일종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내 방식대로 펼쳐보는 것 아니겠나 싶다. 지역에 대한 얘기는 많이 했고, 젠더에 대한 얘기도 좀 했는데, 그걸 좀 더 종합적으로 생활 민주주의 방식으로 언젠가 그려보고 싶다. 

일본이나 한국이나, 이런 생활 민주주의에서는 여전히 좀 약하다. 

그렇기는 한데.. 젠더 민주주의 같이 작업하던 에디터가 결국 출판사를 그만 두었다. 책 출간 일정 당기기는 커녕, 제 날자에 맞추기도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는 출간을 당기기는 커녕, 제 날자에 내기도 어렵다. 나는 에디터랑 몇 년간 호흡을 맞추면서 새로운 책들을 같이 생각하고 준비하는 방식으로 일하기 때문에, 아무나 그냥 같이 하는 거, 그런 식으로는 책을 못 쓴다. 몇 번, 에디터가 바뀌게 되어서 그냥 해봤는데.. 공교롭게도 그런 책들이 다 망했다. 최근에 그런대로 괜찮은 성과를 낸 책들이, 다 오래 된 에디터들과 오랫동안 준비해서 정석대로 낸 책들이다. 뭐, 그렇다. 예전에는 책 사정이 좀 괜찮아서, 크게 이것저것 신경 쓰지 않은 책들도 선방을 하기는 했는데, 요즘은 그렇게 되기가 좀. 출판사는 바꾸어도 에디터는 안 바꾼다. 

나도 50이 넘으면서, 이제 모르는 에디터랑 쉽지 않은 내용을 얘기하면서, 하나하나 다시 맞춰가는 게 너무 힘들어서 못 하겠다. 내가 움직여야 얼마나 움직이겠나. 내가 움직일 수 있는 시간도 몇 년 안 된다. 

정부연구소나 공기업 기관장을 안 한다고 한 것은.. 그게 임기가 2~3년이다. 한 턴, 어쩌면 두 턴하고 나면 나의 50대는 다 간다. 그러면 끝이다. 그 나이에 다 늙고 병든 몸으로 뭘 또 하겠나. 근혜 시절이었다. 광주도시공사 사장직 제안이 왔을 때에는 정말로 고민을 좀 해었다. 내가 생각하던 지역에서의 공간 정책, 그런 걸 진짜로 해보고 싶기도 했었다. 일주일 고민했는데, 결국 그 길이 아닌 걸로 마음을 먹었다. 그때가 내가 공직을 안 한다고 마음을 먹은, 그야말로 definitly.. 그 순간이다. 

지금 와도 그 순간을 별로 후회하지는 않는다. 차관이니 장관이니, 혹은 기관장이니 그런 건 인생의 목표가 될 수가 없는 것이다. 한 번도 그런 걸 목표로 살아본 적도 없고, 그렇게 생각한 적도 없다. 지금 와서 친구들이 이제 높은 자리에 갔다고 나도 한 번, 그렇게 살아온 걸 바꾸면 어렵게 지냈던 나의 청춘과 30대의 모습이 너무 불쌍해진다. 그 순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 어려운 순간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20대나 30대나, 늘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늘 우리는 핍박받고 있었고, 도망다니거나 숨어서 뭔가 했다. 그러다가 다들 먹고 살게 되거나, 아니면 힘 있는 자리에 가게 되었다. 그리고는 조금씩 변했다. 

난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았다. 젠더 경제학에 대한 부탁을 받은 건, 10년도 좀 넘은 어느 날, 여성 경제학자들, 정확히는 누님들이 니가 그런 걸 좀 해라.. 그렇게 시작된 거다. 아직도 마무리를 못 했다. 이제는 그 질문을 마무리할 순간이 온 것 같다. 

나 혼자 생각한 건데, 그냥 나는 움직이는 동안, 등대 같은 삶을 살면 좋겠다는.. 폭풍우 치고 깜깜한 밤에 조그맣게 불을 밝히는 등대 같은 삶이 되면 좋겠다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격랑이 이는 깜깜한 밤에 뱃길을 나서지는 않는다. 그 순간에 뭔가 항해를 해야하는 사람들은 다들 먹고 살아야 하거나, 매우 특별한 사연이 있거나. 그렇지 않겠는가. 

먼저 움직이고 늘 최전선에 있으려고 한 건, 그런 이유는 아닌데.. 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내가 책 쓰는 것을 좋아하는 건, 이게 수단이 아니라서 그렇다. 나에게 책은 다른 일을 얻어내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처음에는 그렇게까지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지금에 와서는 이게 목적이고, 다른 게 수단이 되었다. 사람을 만나고 인터뷰를 하고, 자료를 분석하기 위해서 또 자료를 줄 사람을 만나고.. 그런 게 수단이 된 셈이다. 그리고 점점 더 어렵고, 점점 더 까다롭고, 그리고 또 점점 더 안 팔릴 책을 쓴다. 그런 걸 감당할 수 있는 사람들이 이제는 점점 더 줄어들었다. 

다행히 책을 쓰면서도 먹고 사는 걸 걱정하지는 않아도 되는 삶을 살았다. 넉넉하지는 않아도 애들 먹고 싶은 거 사주고, 갖고 싶다는 장난감 사주는데 궁색하지는 않게 산다. 고생하는 후배들 가끔 밥 사줄 때 싼 것 좀 먹으라고 하지 않아도 되는 정도는 산다. 

젠더 경제학을 거쳐 생활 민주주의로 가는 과정은, 쉬운 길은 아니다. 그렇지만 우리도 언젠가 넘어가야 하는 산이다. 그렇다고 엄청나게 멋지거나 고귀한 그런 학술적 목표도 아니다. 다만 우리에게 지체된 것이고, 그 지체가 좀 더 길어질 수도 있다는 것. 

큰 애에게 만 원짜리 비상금을 두 번 주었다. 그랬더니 이게.. 학교 문방구 앞에서 조그만 레고 장난감을, 정말 쓸 데 없는 걸 몇 개 샀다. 엄마한테 혼났다. 그런데 둘째가 형아가 가진 장난감을 보면서 심통이 났다. 지난 주에는 자기도 문방구 앞에서 본 게 있는데, 사주면 안 되냐고 나한테 물었다. 이번 주에 같이 가서 사준다고 주말에 대답을 했다. 어제 저녁에 둘째가 문방구에 언제 갈 거냐고.. 애들한테 뭔가 약속을 하면 빚쟁이가 된다. 갚을 때까지 계속 추심이 진행된다. 오늘 저녁에 간다고 했다. 오늘 아침에 둘째 어린이집 가는 길에 저녁 때 몇 시에 문방구 갈 거나고 물어본다. 집에 오면 바로 간다고 했다. 

가끔 일정이 꼬여서 '환장할 일정'이 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내 삶이 환장할 삶은 아니다. 

출간 일정을 보면 좀 빡빡하다. 거기에 이것도 해주고, 저것도 해주고, 부탁이 좀 많이 온다. 그 중에는 가끔 내가 손을 잡아주지 않으면 삶의 나락에서 도저히 나올 수 없을 정도로 잔뜩 뭐가 꼬여버린 사람들의 부탁도 끼어 있다. 모른 척 하기가 어렵다. 제가 해드릴께요, 그러고 나서는 집에 와서 후회한다. 그렇게 '환장할 일정'이 더 환장스럽게 된다. 그렇다고 모른 척 해? 

애 보는 아빠한테 해달라는 것들이 좀 너무 많은 듯 싶다. 그래도 그냥 웃으면서 하는 게, 평생 이렇게 살았다. 

해야 할 일이나 내려야 하는 결정이 너무 많아서 잠시 먹먹해진 아침, 깃발이 아니라 등대로 살기로 생각한 30대 중반이 잠시 생각났다. 

"자기야, 나 좀 도와줘." 그 시절에 이재영이 부탁을 했었다. 그래서 내가 깃발이 되는 삶을 내려놓고 이재영을 돕는 선택을 했다. 이재영은 노회찬을 도왔고, 나는 이재영을 도왔다. 그 이재영은 벌써 죽었고, 노회찬도 죽었다. 내가 뭘 위해서 살아야 할지, 그런 것은 이제 없다. 이제는 더 이상 사람을 모으거나, 뜻을 모으거나, 그런 것은 안 한다. 그런 건 너무 많이 했다. 

모아야 할 때가 아니라 이제야말로 해체하고 재구성을 준비해야 할 때 아닌가 싶다. 데리다가 아주 예전에 했던 얘기가 잠시 다시 생각이 났다. 

'책에 대한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왼손 마우스..  (1) 2020.08.25
겉얘기와 속얘기..  (0) 2020.08.08
감정에 관하여..  (0) 2020.07.10
지난 얘기와 앞으로 올 얘기들..  (2) 2020.07.01
참새의 미학..  (0) 2020.07.01
Posted by retired
,

턴테이블이 집에 두 개 있고, 안 쓰는 앰프가 진공관 앰프까지, 또 몇 개가 더 있다. 물론 다 애들 태어나기 전의 일이다. 

지금은 디지털 앰프 하나 TV 밑에 낑겨 놓고 겨우겨우 쓰고 있다. 턴테이블 놓을 데도 없다. LP들도 그냥 놀고 있다. 몇 달 전에는 블루투스 되는 턴테이블을 살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렇지만 역시 놓을 데가 없다. 지금까지는 애들 때문에 감히 엄두도 못 내었는데, 애들이 좀 크니까 이제 놓을 자리가 없다. 자리가 왜 없냐고? 애들 책장들이 여기저기 이미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 그렇다. 턴테이블 놓는다고 애들 책장 치운다고 했다가는 맞아죽을 것 같다. 

음악은 LP 우선, 없으면 CD 그러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는데, 요즘은 다 택도 없는 얘기다. 그냥 핸펀 블루투스로 듣는다. 마지막 존심이라면, 그래도 유튜브로 음악을 듣지는 않는다는 것 정도. 

언젠가 나도 와트퍼피 제대로 해놓고 듣겠다고 생각하면서 살지만, 그런 날이 올지는 모르겠다. 나도 이제 방마다 하나씩 시스템을 갖춰 놓고 있던 시절의 열정 같은 건 없다. 그저 여유 되면 스피커나 좀 더 바꿔보고 싶은 정도. 

최규성의 <빽판의 전성시대>는 나보다 더 얼척 없는 사람들이 한국에 많다는 것을 보여주는 책이다. LP도 제대로 관리하기 힘든데, 빽판이라니.. 

나도 빽판이 몇 장 있기는 하다. 중고등학교 시절, 원판이라고 하는 수입 앨범은 너무 비싸서 엄두를 못 냈고, 라이센스판을 주로 샀다. 그래도 청계천을 헤매면서 빽판을 사게 된 건.. 

순전히 금지곡 때문이다. 핑크 플로이드는 당연히 금지곡이었고, 딥 퍼플은 음악은 금지곡이 아닌데 녹음된 장소 때문에 앨범이 금지 앨범이었다. 라이브 인 재팬, 일본 공연에서 하이웨이 스타 등 기가 막힌 연주가 있었는데, 요 앨범도 구할 수 없는. 그리고 간 김에 구하기 어려운 앨릭 클랩튼 더블 앨범 같은 것들도 사고. 

몇 번 사봤는데, 음질 개판이다. 도저히 못 들어주겠는.. 그래서 초반에 몇 장 사고 말았다. 

책을 보면서 나는 ‘빽판’이라는 말의 유래를 알게 되었다. 이것도 좀 슬픈 일이다.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가 왜색으로 밀려서 금지곡이 되었다. 당연히 일본에서는 판매가 되었고. 이걸 불법으로 판을 만들어서 한국에서 유통을 시키다 보니까 정말 앨범에 아무 라벨도 붙이지 않은, 흰색 종이만 덜렁 붙어있는 빽판이 된.. 다들 뒤로 유통시키는 back에서 나온 말이라고 생각했을 것 같은. 

그리고는 군사 정권 시절 양희은 등 금지곡 시대가 온다. 아침 이슬 같은 노래들이 들어간 양희은 앨범 제목이 ‘고운 노래 모음’이라는 것도 이번에 알았다. 진짜 고운 노래 같은 얘기다. 3집까지 나왔었나 보다. 백구 같이 지금도 내가 종종 부르는 양희은의 노래들이 다 이 시절의 얘기다. 

그리고 대마초와 함께 신중현이 압박 받으면서 김추자의 노래들도 빽판으로. 신중현의 ‘아름다운 우리강산’의 금지곡 사유가 ‘창법 미숙’이라는 걸 보면서 한참 웃었던 적이 있다. 그런 식으면 꽤 많은 가수들의 노래는 다 창법 미숙이다. 노래 못 한다고 금지곡 씩이나.. 

유라이어 힙의 ‘줄라이 모닝’이나 Lynyrd Skynyrd 같은 건 빽판으로 듣지는 않았고, 나름 라이센스판으로 들었는데, 아직도 우울한 때면 종종 듣는다. 그렇지만 하도 뚜드려 대는 노래라서, 애들 있을 때 듣기는 어렵다. 지방에 갈 때나 차 안에서 소리 왕창 올려놓고 (결혼하기 전, 내 차가 차 값 보다 스피커와 앰프 등 오디오가 더 비쌌던..)

슈베르트의 연가곡집에 관한 책에 대해서 서평을 쓴 적이 있다. 한국에서 누가 슈베르트의 연가곡집을 그렇게 줄 맞춰서 듣는다고 죽어라고 책을 썼던 것도 얼척 없었지만, 뺀판의 역사는 더더욱 얼척 없었다. 

50이 넘으면서 내 삶도 많이 바뀌었고, 취향도 많이 바뀌었다. 아니, 바뀐 게 아니라 바꾸었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LP 틀어주는 술집에는 이제 안 간다. 그런 데서 사람들 바람 피는 것 너무 많이 봐서 질렸다. 그리고 그런 데서 감정이 높아져서 평소 같으면 하지 않을 말도 하면서 싸우는 경우도 많이 봤다. 과거로 가게 되면 억지로 봉합해 놓았던 옛 기억들이 폭발하게 된다. 

아주 작고 맛있는 그런 식당에도 안 간다. 너무 분위기 찾다 보면 고립되고, 같이 다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자꾸 나누게 되고. 적당히 먹고, 맛있게 먹고, 그렇게 식당 고르는 취향도 바뀌었다. 

아마 내가 진공관 앰프 처박아 놓고 있는 것과 턴테이블 놀리고 있는 것들이 다 그런 변화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너무 감정이 고양되는 상황은 이제 피하게 된다. 

그렇지만 가끔 옛날 노래 듣고 싶어지는 적은 있다. 그럴 때면 멜론에서 찾아서 듣는다. 이제 음악은 마음으로 듣는 거라는 생각이 더 강하다. 적당한 정도의 음질이면, 그냥 행복하게 듣는다. 

그렇기는 한데.. 비 오는 일요일 오후, 빽판 앨범과 오래된 가수들 이름 넘기면서 잠시 살아가는 시름 같은 것을 내려놓을 수가 있었다. 마침 아내가 저녁 약속이 있어서 나갔는데, 애들이 옆에서 같이 책을 읽고 있었다. 박원순 떠나고 이래저래 심난한 일요일, 빽판의 레트로 B급 감성과 함께 나의 지난 날들을 잠시 돌아볼 수 있어서 좋았다. 

 

 

 

Posted by retired
,

저녁 먹고 큰 애랑 좀 멀리까지 산책을 갔다왔다. 큰 애가 서울시장의 자살에 대해서 물어본다.

"응, 아까 오후에 아빠가 양복 입고 나갔다왔잖아, 거기 갔다왔어."

"아빠랑 아는 사는 사람이예요?"

이것저것 20년 넘게 알고 지낸 사람이고, 많은 일을 같이 했다고 했다.

"좋은 일을 했어요?"

많은 일을 하기는 했는데, 그게 좋은 일인지 설명하기가 어렵다.

"그렇겠지."

왜 자살을 했는지 물어보면 아주 난감할 것 같은데, 거기까지 물어보지는 않았다.

아마 어린이가 있고, 이제 뉴스도 슬슬 보기 시작할 나이라면 집집마다 벌어질 일일 것 같다. 중고등학생이라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훌륭하신 분이라는 말과, 왜 자살을 했어라는 질문 사이의 간극이 너무 크다. 아마 며칠 사이에 우리 집 어린이도 결국 그 질문을 할 것이다.

삶에 풀기 어려운 딜레마가 또 하나 늘었다.

'아이들 메모'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귀뚜라미..  (0) 2020.07.21
문방구 가는 길..  (2) 2020.07.15
모기 퇴치기..  (1) 2020.07.10
포돌이 셋트 두 개..  (1) 2020.07.02
초등학교 2학년, 큰 애가 쓴 편지..  (1) 2020.06.22
Posted by retired
,

박원순 시장 문상 다녀왔다. 마침 강기갑 의원이 앞자리에 있었다.

문상에서 울거나 그러지는 않으려고 했는데.. 나오는 길에 기자들 인터뷰가 있어서, 이것저것 대답하다 보니까 진짜 울 뻔했다. 산다는 게 뭔지.

박원순과 제일 즐거웠던 순간이 문득 머리에 떠올랐다. 아주 예전에 목포에서 환경 활동가들 단합대회 할 때였던 것 같다. 왕창 모여서 놀던 날. 서주원 총장이 "씨발 낚지 먹으러 가자", 그러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남는다. 세발 낚지를 그렇게들 불렀다. 밤새 술 먹고 정말 즐겁게 놀았었다. 그때 박원순에게서 '어드보카시'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다. 어드보카시 운동의 미래는 무엇인가, 그런 고민을 많이 하던 것 같았다. 뭐, 난 그런 어려운 건 모르겠고, 그냥 머리 박고 술이나 마셨다.

아름다운 재단 시절에 김치찌게 데이인지, 그런 행사 때 회원들 모아놓고 김치찌게 끓였던 기억도 문득 났다.

이래저래 놀기도 많이 놀았는데..

다 허망한 일이다. 한 세상 사는데, 뭔 무거운 짐을 그렇게 지고, 자기 고민도 얘기할 그런 주변머리 하나 없이 살았는지.

평생 영웅처럼 살다가, 죄인처럼 떠나는 삶이 참 허무하게 느껴졌다.

 

5분 

 

박원순 시장 문상 다녀왔다. 마침 강기갑 의원이 앞자리에 있었다.

문상에서 울거나 그러지는 않으려고 했는데.. 나오는 길에 기자들 인터뷰가 있어서, 이것저것 대답하다 보니까 진짜 울 뻔했다. 산다는 게 뭔지.

박원순과 제일 즐거웠던 순간이 문득 머리에 떠올랐다. 아주 예전에 목포에서 환경 활동가들 단합대회 할 때였던 것 같다. 왕창 모여서 놀던 날. 서주원 총장이 "씨발 낚지 먹으러 가자", 그러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남는다. 세발 낚지를 그렇게들 불렀다. 밤새 술 먹고 정말 즐겁게 놀았었다. 그때 박원순에게서 '어드보카시'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다. 어드보카시 운동의 미래는 무엇인가, 그런 고민을 많이 하던 것 같았다. 뭐, 난 그런 어려운 건 모르겠고, 그냥 머리 박고 술이나 마셨다.

아름다운 재단 시절에 낌치찌게 데이인지, 그런 행사 때 회원들 모아놓고 김치찌게 끓였던 기억도 문득 났다.

이래저래 놀기도 많이 놀았는데..

다 허망한 일이다. 한 세상 사는데, 뭔 무거운 짐을 그렇게 지고, 자기 고민도 얘기할 그런 주변머리 하나 없이 살았는지.

평생 영웅처럼 살다가, 죄인처럼 떠나는 삶이 참 허무하게 느껴졌다.

 

 

 

'잠시 생각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용적률 논쟁과 지하 대수층..  (0) 2020.07.20
생활 민주주의, 젠더 민주주의..  (0) 2020.07.16
삶은 궁상 덩어리..  (10) 2020.07.11
박원순을 위하여..  (0) 2020.07.10
공공부문 정규직 문제..  (4) 2020.07.05
Posted by retired
,

애들 키우면 좋은 점이, 아무리 험하거나 허탈하거나 그런 일이 생겨도 어쨌든 겉으로는 그런 감정을 오래 가지고 있을 수가 없다는 것.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둘째가 모기 퇴치기부터 확인한다. 모기 세 마리.. 춤을 추면서 방방 마다 돌아다니면서 모기 잡았다고 한다. 아무래도 모기는 인간에게 친근한 곤충이 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 죽음이 저렇게 어린 사람에게도 크나큰 기쁨이 되다니. 사람이 파리로 변화는 영화는 있었는데, 모기가 주인공인 영화는 아직 잘 모르겠다. 파리의 죽음이 저렇게까지 사람에게 기쁨을 주지는 않는 것 같다.

떠난 사람은 떠난 사람이라도 남은 사람들에게도 이런저런 충격이 없지는 않다. 녹색당의 이유진이 서울시 부시장을 하기로 한 걸로 알고 있는데, 시작하자마자 그만두게 되나? 부산시에서 보니까 별정직들은 권한대행이 재계약하는 방식으로 하던 일 계속하는 것 같던데.

상가집에서 아버지가 관속에 누워있는 동안 자식들이 재산 다툼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지금 딱 그 모양이다. 죽은지 24시간도 지나기 전에 그린벨트는 물론이고, 재건축, 재개발, 서명도 받을 준비하고 그러는 것 같다. 층고제한도 다 풀자고 하고. 그럴 거면 세종시는 뭐하러 만들고, 혁신도시는 뭐하러 만들었나 싶다. 참 아이러니 하다. 세종시 만들어서 세종시에서 국회의원까지 한 이해찬이 이런 거 풀자는 데 맨 앞 줄이니 말이다.

돌아보면 말년의 박원순과 그렇게 좋은 관계는 아니었다. 박원순은 맨날 뭐 한다고 발표하고, 나는 그건 좀 이상하다, 그렇게 반박하고. 그런 세월이 가락시영 종상향 때부터 10년 간이다. 개인적으로야 다툴 일이 거의 없지만, 정책으로 들어가면 얘기가 좀 다르다. 편안하게 소주 한 잔 마신 게 벌써 몇 년 전으로 올라간다.

자살에 관한 것.. 참 어려운 일이다.

노회찬이 떠난지 2년인데, 그 사이에 김종철 선생과 박원순, 참 상가집도 정신 없이 들락날락하는 것 같다. 다 내가 30대, 한국에 정열을 바치던 시절에 같이 일하던 사람들이다. 김종철 선생은 그때도 유명하셨지만, 노회찬 국회의원 되기 전, 박원순, 참여연대 아직 뜨기 전, 그 시절의 일이다.

두 사람은 자살하고, 한 사람은 실족사.

백선엽 장군은 100세를 채우고 돌아가셨다는데, 100세는 커녕, 남들 같으면 총리 한 번 노려보시라, 장관은 한 번 하셔야지, 딱 그럴 나이에 벌써들 떠나가신.

한 시대가 접어간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이제 구세대에 속한 사람이다. 나와 같이 일하던 사람들이 이래저래 벌써들 죽었고, 그런 사람에 대한 연민과 안타까움이 말없이 크다.

정의당에서 젊은 국회의원들이 뭐라고 했다.

정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잘 안 맞는다. 며칠 있다가 해도 되는 얘기를 지금 하나 싶은 게 나의 정서다.

그렇지만 내가 30대 초중반이던 시절 생각해보면..

그 사람들이 살아갈 동료들이나 그들이 펼칠 시대는 또 다른 시대다. 그들은 자신들의 문제를 풀어야 하고, 그들의 담론을 내놓게 된다. 그런 거 아닌가 싶다.

그래서 강렬하게 충돌한다. 박원순 생의 마지막은 그런 강렬한 것이다. 구 시대와 새로운 시대가 충돌하는 것.

어쨌든 우리는 새로운 시대로 조금씩 간다. 그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그걸 지금 판단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다른 건 확실하다.

박원순 문상 가기로 했는데, 같이 가기로 한 양반이 아직 연락을 안 한다.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시대가 변하고, 흐름도 변하는 것 같다. 박원순의 강렬한 리더십도 안 통하는 세대가 왔다. 그들에게는 그들 시대의 과제가 있다. 마치 우리에게 우리 시대의 과제가 있었던 것처럼.

박원순에게 마음의 빚을 지지 않은 새로운 사람들의 등장, 그런 거 아니겠나 싶다.

그렇지만 나는 주말에도 아내와 같이 애들 봐야 한다. 나에게 남은 일상적인 삶은 여전히 존재한다. 모기 퇴치기는 퇴출을 면하려면 오늘도 모기를 잡아야 한다. 그런 궁상이 삶의 본질이다. 삶은 누구에게나, 궁상덩어리다. 

Posted by retired
,

모기 퇴치기에 드디어 모기가 두 마리 들어갔다. 둘째가 통 열어보고는 엄청 좋아한다. 애들 둘이 모기 퇴치기 앞에서 춤을 춘다. 며칠 동안 한 마리도 못 잡아서 퇴출 직전이었는데, 애들은 느무느무 좋아한다.. 녀석은 살았다. 모기가 죽었고. 인생에 가끔 이런 드러븐 경우가 생긴다. 죽여야 사는.

'아이들 메모'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방구 가는 길..  (2) 2020.07.15
삶의 딜레마, 어린이로부터..  (4) 2020.07.11
포돌이 셋트 두 개..  (1) 2020.07.02
초등학교 2학년, 큰 애가 쓴 편지..  (1) 2020.06.22
게임기 열리는 보물 나무..  (2) 2020.06.17
Posted by retired
,

감정에 관하여..

책 쓸 때 제일 어려운 것이 감정을 만드는 일이다. 논리야 자료도 분석하고, 숫자도 맞추어가면서 이렇게 저렇게 만든다고 하더라도..

누구에게 이 얘기를 할 것인가, 어떤 기분으로 말할 것인가, 그렇게 감정을 만들어나가는 일이 가장 어렵다. 

그게 없으면 기능적인 보고서가 되어버린다. 

얘기 만들기에서도 가장 어려운 게 감정이다. 특히 나처럼 섬세함과는 상관이 없이, 대충대충 살아가는 스타일에게는 감정이 가장 어렵다. 

감정을 만들어가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라서 좀 억지로 감정을 만들게 된다. 분노라는 감정이 가장 컸는데, 촛불집회 이후로 나는 분노를 내려놓고 살려고 한다. 분노가 가장 쉽고, 잘 통한다. 그런데 분노를 내려놓고 나니까, 더더욱 감정을 만드는 게 어려워진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책 쓸 때 왜 아무도 안 만나려고 하는지 잘 몰랐다. 내 경우에는, 감정 때문에 그렇다. 이럴 때 만나면 인위적으로 올려놓은 감정 때문에 실수를 하게 될지도 모를 것 같은.. 그렇다고 그 상황을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기도 어렵고.. 

오후에 농업 관련된 회의에 간다. 오전에 한참 감정을 잡고 이것저것 정리를 하다가, 오후에는 또 아주 냉정하게 정책의 기반에 관한 얘기를 해야 하고.. 

이렇게 전혀 다른 감정과 전혀 다른 톤의 상황에 들어가는 게 요즘에는 더 힘들다. 

강연도 더 줄이고, 사람들 만나는 일도 더 줄이려고 한다. 감정이 농축되면, 주변 사람들 힘들게 할지도 모른다. 

농업 경제학 하느라고 한참 감정을 올려놓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작업은 감정을 더 많이 쓰게 된다. 

30대에는 무슨 회의 같은 데 가도 나이 순으로 맨 끝에 앉고, 딴청도 부리면서 딱 하고 싶은 말만 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아무도 별로 신경 안 썼다. 

나이를 처먹고 나니까, 이제 숨기 좋은 가장자리로 가기가 어렵다. 그리고 다들 내 입만 쳐다보고 있는 느낌이다. 졸기도 어렵고, 숨어서 딴청 부리기도 어렵다. 

박원순 상가에도 가야하는데, 발길이 떨어지지가 않는다. 보통 상가집은 첫날 바로 가는데, 요즘 너무 자주 갔다. 김종철 선생 상가 간 게 며칠 안 된 것 같은데.. 

공교롭게도 노회찬 상가부터 계속해서 문 앞에서 진선미와 만났다. 연속으로 몇 번째.. "상가집에서만 보내요", 어색하게 인사했던. 

나이가 주는 무게감이 이제는 좀 부담스럽다. 난 좀 편하고, 남들 안 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풀어나가는 삶을 살고 싶은데.. 이제는 옛날처럼 그렇게 도발적으로 하기가 어렵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내가 뭐하나 쳐다보고 있어서, 숨어서 잠행하면서 혼자 조용히 기록하고 분석하고.. 그렇게 하기가 어렵다. 

보수 쪽 신문에서 글 써달라는 부탁이 요즘은 많이 온다. 주제나 상황 봐서 쓸 수도 있다고 가볍게 생각하는데, 술 마시다가 그런 상의를 하면 아주 난리가 난다. 뭔가 어디에 묶여 있는 건 별로라고 생각하는데, 글 하나 쓰는 것도 주변 눈치를 엄청나게 보게 된다. 그것도 감정 소모다. 난 더 이상 20대에 그랬던 것처럼 전사도 아니고, 무슨 엄청난 조직을 끌어가는 그런 책임자도 아니다. 

암 것도 아니다. 그냥 애 보면서 글이나 좀 쓰는, 엎어진 김에 아예 자리 깔고 누워버린. 

그래서 더 편하게 맘 먹고 지내고 싶은데, 책을 쓸 때면 다시 감정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도 분노 빼고. 그게 여전히 어렵다. 

코로나 이후로 수영장이 닫아버려서, 감정을 식히기가 더 어려워졌다. 수영은 좋은 게, 물 속에서 아무 생각도 안 난다. 그저 힘들어, 그만 하고 싶어.. 배고프다, 집에 가자.. 걷는 건 좀 다르다. 생각이 너무 많아지고, 자꾸 지난 시간을 복기하게 된다. 고맙고 행복하다는 생각보다는, 원망스럽고 밉고, 그런 감정이 걸을 때 더 많이 생긴다. 온갖 잡생각들이.. 

그 감정을 모으고 모아서 증폭시키는 것까지는 좋은데, 넋이 나간 것처럼 한동안 지내게 된다. 

헤겔은 센스 데이타부터 감정을 거쳐서 이성으로 간다고 했다. 지내보니까, 그건 머리로 생각한 생각의 순서인 것 같다. 논리는 쉽고, 이성은 달래기가 용이하다. 어려운 건 감정이다. 논리가 지나가면 감정이 생긴다, 진짜 감정이. 쟤, 진짜 나쁜 넘이였네.. 

'책에 대한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겉얘기와 속얘기..  (0) 2020.08.08
해체와 재구성..  (0) 2020.07.15
지난 얘기와 앞으로 올 얘기들..  (2) 2020.07.01
참새의 미학..  (0) 2020.07.01
부지런하지 않은 삶..  (4) 2020.06.15
Posted by retired
,

사는 게 뭔가 싶다. 

몇 주 전에 오전에 당인리 너무 재밌게 봤다고, 일요일 오후에 뜬굼 없이 원순씨 전화를 받았다. 조만간 한 번 보자고 해서, 연락 기다리던 중이었다. 그게 마지막 통화가 되었다. 

많은 사람에게 박원순은 서울 시장으로 기억되겠지만, 나에게는 참여연대 시절이 더 강렬하다. 고대 김균 선생이 피케팅 안 하는 조건으로 참여연대랑 얘기가 잘 되었다고 집단으로 같이 하기로 했단다.. 참여사회 연구소에서 나는 산업정책을 맡았다. 현대에서 일하던 시절인데, 그래도 니가 제일 거기에 가깝다고. 철강, 석유화학, 이런 거 한참 연구하던 시절이었다. 

김기식 보다 박원순을 먼저 알았다. 장하성 선생은 조금 뒤에 만났다. 장하성 펀드나 총선연대 같은 걸로 이 사람들이 유명해지기 전이었다. 연구에 관련된 돈이나 이런 걸 주로 박원순이 맡았었다. IMF 경제위기를 이들과 같이 했었다.

그 시절에는 박원순이 하는 일에 내가 비판을 하는 일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아름다운 재단 하던 시절에도 행사 있으면 종종 가서 도와주고는 했다. 

햐.. 

사는 게 뭔가 싶다. 시민운동에서 최열, 박원순, 이러던 1세대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는 2세대가 금방 등장해서 뭔가 할 것 같더니, 실제로는 그렇게 잘 전환이 안 된 것 같다.  이제 시민운동은 약세다.

얼마 전에 박원순 캠프 만들어진다고 좀 도와달라는 부탁이 있기는 했는데, 나는 원래도 캠프에는 안 간다고 했다. 정책에 최선을 다 하지, 사람한테 충성하는 거, 내 스타일 아니다. 그래도 필요한 일 있으면 조금씩 도와준다고는 했다. 

그래도 박원순 없는 세상을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그가 걸어온 삶에는 감동이 있다. 그래서 함께 하면 늘 든든하고, 편안하고, 그랬다. 박원순 없는 서울도 이상하다. 때때로 잘 했다고 하고, 때로는 치고받고 난타전에 가깝게 비판하기도 하고. 

서울시 일에 관여하기 시작한 게 고건 때 부터니까, 이게 참 오래된 일이다. 오세훈의 서울시가 너무 싫었다. 박원순이 보궐 선거에 나온다고 하면서, 정말 처음으로 sns를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뭐라도 좀 도와주고 싶었다. 

박원순과는 야당 시절의 기억이 많다. 명박 시절, 근혜 시절, 그와 등을 맞대고 수많은 일들을 했었다. 이제 처음으로 그가 없는 한국, 아니 그가 없는 서울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었다. 

허무하고, 허망하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Posted by retired
,

'낸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경향, 셧다운 전야..  (1) 2020.08.24
어두워질 때까지, 아무 것도 안 한  (0) 2020.07.27
부동산에 관하여..  (3) 2020.06.29
정의당을 위한 고민..  (0) 2020.05.27
국민일보 코로나 인터뷰..  (0) 2020.05.15
Posted by retir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