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책들의 첫 원형들이 시작된 것은 대체적으로 2004년에서 2005년 사이이다. 당시에 나는 초록정치연대 정책실장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녹색당이 움직여나가야 할 방향 그리고 생태경제학의 다음 질문들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었다.
생태경제학은 결국 대학에서 어느 정도 규모의 연구진을 만들어야 다음 진도를 나갈 수 있는, 그야말로 혼자서 해볼 수 있는 것은 어지간히 한, 그런 한계 상황에 부딪히고 있었다. 아쉽지만 혼자서 할 수 있는 영역에서 더는 해 볼 수 없는 순간이 올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계속 공부하기 위해서는 다음 주제를 찾았어야 하는 개인적인 고민도 있었다.
내가 대학에 들어가는데 반대한 것은 우파들은 아니었다. 우파들은 이제 학문을 접으려는 나에게 그동안 공부한 게 아깝지 않냐고 하면서 어떻게든 대학에 넣어주려고 했었는데, 그 때마다 결정적으로 반대했던 사람들은 좌파 혹은 진보 계열의 사람들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생태경제학이라는 생소한 분야에 대해서 우파들은 흥미를 느끼고 어떻게든 넣어주려고 하는데, 좌파들의 반대를 지금도 뚫지 못한다. 최근에도 그런 일이 몇 번 있었다. 물론 이제는 아무 느낌도 없다.
5년 전만 해도, 감정적으로 이게 잘 처리가 되지가 않았다. 그래도 이런 크고 작은 사연들을 전부 가슴에 묻고, 그냥 그건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조건 정도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 대신 할 수 있는 걸 다 쓰고, 마흔살이 되면 이들을 피해서 은퇴하거나 낙향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사상적으로는 나는 좌파의 정책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사회를 원하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좌파 없는 환경에서 살고 싶기는 하다. 하여간 나에게 대인기피증과 우울증을 심어주었던 사람들은, 우파는 아니고 좌파들이었다.
그래도 다 묻으려고 한다. 용서하기는 어려워도, 이해할 수는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렇게 은퇴를 결심하고 나서 생각했던 게 평화경제학, 젠더경제학, 문화경제학, 이렇게 세 개의 방향이었다. 물론 하나하나의 주제도 평생을 걸어도 모자를 법한 그런 무겁고 큰 주제이기는 하지만, 생태 얘기 말고 내가 공부했던 것들을 정리하면서 앞으로 경제학 혹은 한국의 사회과학이 걸어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 한 번 고민해보고 싶었다.
평화경제학은 <촌놈들의 제국주의>에서 대강의 밑그림을 그려봤다. 원래는 데이타를 더 많이 집어넣고, 시스템 모델들을 사용한 시뮬레이션 작업을 해보고 싶었는데, 모델 아키텍처까지만 만들어놓고 실증 작업은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 책은 초고이자 미완성일 수밖에 없는데, 도넬라 메도우가 워드1에서 워드3까지 한 것처럼, 월 시뮬레이션 모델을 만들어보고 싶었던 나의 꿈은 그야말로 꿈이 되고야 말았다.
문화경제학은 이런저런 작업이 많이 누적이 되었고, 연말까지는 별도의 책으로 내 손을 떠나간다.
그리고 젠더경제학은... 할지말지도 생각을 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몇 년이 그냥 지나갔다.
처음에 시작한 세 개의 질문 중에서 가장 진도를 나가지 못한 분야이기도 하다.
2.
사실 그냥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어렵다... 라고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젠더 경제학을 별도의 책으로 빼서 한 번 정리를 할지, 아니면 그냥 여러 권의 책에 소주제들을 녹여 넣어서 이론 속에 삼투시키는 방법을 선택할지, 그걸 결정하지 못한 것이라는 게 정확할 것 같다.
올초에 여성학 대학원에서 몇 분 선생님들과 여성학 수업을 같이 한 적이 있었다. 그냥 지금 알고 있는 얘기들만 정리해도 책 한 권 분량은 나올 법하지만, 지식의 양과 데이타만 가지고 책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수없이 무관해보이는 주제들과 내용들을 하나의 질문 혹은 하나의 수미상관한 구조로 엮어낼 수 있는 문제의식이나 '한 문장'이 없다면... 그야말로 'gabage in, gabage out...'
며칠 전에, 좀 시간이 걸리더라도 젠더 경제학을 한 번 써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물론 이렇게 마음 먹은 게 몇 번이나 있었는데, 그 때마다, 아, 어렵겠다는 생각으로 접기가 일쑤였다. 이번의 결심은 얼마나 갈까?
이번에는 단디 결심을 했다.
3.
최근의 결심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은 20세기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그리고 21세기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이런 시기 구분에 대한 생각과 관련되어 있다, 이 생각은 최근 쓰고 있는 <생태 유토피아>에서 좀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4.
젠더 경제학은 페미니즘 경제학과는 상당 부분이 겹치고 유사하지만, 기계적으로 등치되는 개념은 아니다.
보통의 경우에 사회분석에서 젠더를 종속변수로 놓고 나머지를 주변수로 놓지만, 젠더를 주변수로 놓고 나머지를 종속변수로 놓으면 어떻게 프레임이 바뀌는지, 그리고 어떻게 새로운 문제들을 드러낼 수 있는지, 그런 것에 관한 접근이다... 라고 할 수 있다.
5.
젠더와 생태가 공통적인 게 한 가지 있다. 한국에서는 정말로 별 볼일 없고, 특히 출판계에서는 고전을 면치 못한다는 점이다.
생태경제학 시리즈의 3권인 <생태 유토피아>는 원래 경제 대장정이라는 12권짜리 시리즈를 만들어낸 직접적인 계기이다. 이 책은 도저히 팔릴 것 같지도 않고, 아무도 안 읽을 것 같은 책인데, 그래도 이걸 사람들에게 읽게 하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앞에서부터 시작하는 대장정을 준비한 셈이다.
그게 효과가 있었는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생태라는 제목을 다는 것은 내가 가졌던 로망이기는 하지만, 역시 처 박히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다. 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도 생태는 좀 낫다. 출간이라도 가능하니 말이다.
페미니즘 관련된 책들 중에 몇 개는 이미 편집도 다 끝나고 출간만 하면 된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도저히 팔릴 것 같지 않아서 출판사에서 시간을 보면서 그냥 붙잡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여성주의, 여성학, 요즈음은 출간도 어려운 상황이다. 생태도 헤매는 것은 딱한 지경이지만, 여성학의 경우는 최근 정말로 어려운 상태인 것 같다.
보통은 '또문'이라고 부르는 또 하나의 출판사라는 곳에서 관련된 책들을 많이 내기는 하는데, 이게 과연 시장 상황 때문인가, 아니면 매니아적 성향 때문인가, 그런 질문들을 몇 번 해봤는데, 아무래도 시장 상황 때문에 그런 것 같다.
6.
젠더 경제학을 몇 번이나 준비하다가 결국 접은 것은, 내 주변에서 이거 해보라고 그러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는 점이다. 정말로 단 한 명도, 해보면 누군가에게 도움이 줄 거라고 얘기하는 사람이 주변에는 없었다.
대부분의 경우, 나는 책 출간에서 신문연재 아니면 기타 소소한 일들까지 주변 사람들과 상의해서 같이 결정하는 성향이 강한데, 젠더 경제학은 모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냥 해보기로 한 셈이다.
일단 남성 동지들의 반응은...
페미니즘 하는 사람들과 절대 같이 놀지 말고, 쓸데없이 젠더니 그런 얘기 해봐야 교수되는 길에 장애만 생긴다는 것이 주된 반응이다.
대체적인 얘기는...
일단 같이 놀 필요가 없고, 얽혀봐야 인생에 좋은 일은 아무 것도 없고. 무엇보다 여성주의자들이 의리없다는 반응들이 주를 이루었다.
이것저것 걸러 들으면, 그래봐야 교수 자리나 아니면 괜찮은 자리 생겨도 자기들끼리 챙겨먹는 지독할 정도의 이익집단이라는. 그런 현실적인 얘기들이다.
이게 한 가지 얘기이고, 여기에 논쟁 과정에서 여성주의자들과 겪었던 개인적인 경험들이 남성 동지들의 판단에 영향을 주는 것 같다. 이건 이해가 좀 된다. 나한테까지도 뻑하면 덤비는데, 말하는 말솜씨들이 여간 지긋지긋한 게 아니다. 나한테도 그러니, 남성주의자라고 찍힌 사람들에게 얼마나 훌륭한 말뻔새를 선보였을지, 상상이 안 가는 건 아니다.
하여간 남성동지들은, 같이 놀지도 말고, 책 같은 건 꿈도 꾸지 말고, 그런 거 할 시간 있으면 소설책이라도 하나 써서, 너도 돈이나 좀 벌어라, 이런 반응으로 요약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이건 점잖은 사람들의 경우이다. 보통의 우파들은, 미친 사람처럼 본다.
솔직히 뒤로 물러나서 보면...
여성운동하는 사람들이 좀 극렬맞기도 하고, 영 페미니즘의 글들은 가끔 지독하게 치졸하다는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아무렴 진보신당에 드글드글하는 그런 좌파 만하겠나? 여성주의자들이 공격적이기는 해도, 마초형 좌파 엘리트처럼 공격적이지는 않다.
7.
자, 그렇다면 여성 동지들의 반응은?
일단 이론만 가르쳐주고, 작업은 자기들이 하겠다는 경우가 많다. 그러라고 하고, 이것저것 가르쳐줄려고 하는데, 실제 작업에 들어가면 엑셀 작업 아니면 모델링 작업 혹은 데이타 처리하는 일들, 이런 중노동이 거의 대부분이라서 막상 가르쳐줄려면 가르쳐줄 게 별로 없다.
새로운 생각을 찾아내는 시간은 아주 짧고, 분석이 대부분이 막노동이다. 그러니 해놓은 작업이나 논문을 보고, 이것저것 코멘트하는 일 외에는 그런 방식으로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거의 없는데, 어쨌든 남성인 내가 여성과 관련된 것들을 분석하는 일들을 불편하게 생각하는 반응이 역력하다.
그 다음의 반응은, 여성들은 여성을 분석할테니까, 남성들은 남성들을 분석하라는 좀 고급스러운 반응들이 있다.
고급스럽기는 하지만...
철희, 영희, 크로스!
아이젠버그 전략이다.
하여간...
이유야 뭐든 불편하니까, 하지마라.
이렇게 요약해볼 수 있다.
8.
하여간 아무도 하지 말라고 주변에서 뜯어말리는 일이 젠더 경제학이라는 분석 작업이다.
그러나 또 내가 원래 아무도 안 하거나, 아무도 안 갈 길이라면, 아, 그러니까 나도 하면 안되겠구나, 하는 그런 성향과 정반대의... 여기에 내가 해도 되는 일이 또 하나 있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완전 꼴통 아닌가.
전통적으로 남자와 여자는 차이가 없다는 흐름과, 남녀는 유별하다... 는 두 개의 흐름으로 나눌 수 있다.
어떤 면에서는 여성성이라는 것 역시 모성이라는 것처럼 근대의 산물이기도 하고, 구조의 산물이기는 한 것 같다.
여성학자들은 매리 울스턴크래프트를 엄청 중요하게 분석하는데, 나는 생태적 접근을 하면서 매리 셜리 - 프랑켄슈타인의 저자 -를 엄청 중요하게 분석한다. 전혀 상관없는 두 저자인데, 매리 셜리의 엄마가 매리 울스턴크래프트이다.
이리저리 따라 올라가면,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생태와 젠더는 바로 옆 동네에서 서로 만나고 또 만난다.
그래서 안 하고 그냥 넘어갈려고 하니까, 내가 다루려고 하는 주요 변수 중에서 너무 텅 비는 곳이 생겨서 비워두고 갈 수가 없다... 가 제일 큰 생각이다.
9.
그나저나 요즘의 여성주의, 옆에서 지켜보기가 안스러워서 못 보겠다.
여대생의 60~70%가 여성주의 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는데, 여성주의 운동을 지지하는 여성의 비율은 확 떨어져서, 10% 안팍이라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게 현실이다.
10.
age, gender, region이라는 세 가지 변수를 주축으로 스케일을 바꿔보기도 하고, 맥락을 바꿔보기도 하면서 지난 몇 년 동안 꽤 많은 분석을 해봤다.
앞으로 2~3년 후, 아마 gender가 한국 모순의 최고 모순의 형태로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파시즘으로 들어가는 입구 중의 하나이다. 마초들이 꼭 파시즘으로 갈 필요는 없지만, 한국의 경우에는 이 극단적인 마초와 여성을 장식품이나 부속처럼 생각하는 지금의 성향이 공격성과 결합되면서 더 무서운 상황으로 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의 여성운동은 많은 시민운동이 위기에 빠진 것처럼 지금 위기 국면인 것 같다.
그리고 여성주의는 한국에서 너무 고립되어 있다.
좌파들의 엘리트주의와 자기들끼리의 연고주의가 한국에서 어떻게 좌파라는 진영 자체를 밑에서부터 붕괴시켰는지 똑똑히 본 적이 있다.
여성주의도 지금 좌파와는 조금 다른 이유로 고립되어 있는데, 집단은 고립되면 고립될수록 더욱 고립을 강화시키는 전략을 쓰게 된다.
그러다보면 언어도 바뀌고, 이론도 바뀌고, 최소한의 보편성도 잃어버리게 된다.
제더라는 질문이 작은 질문은 아니고, 중요하지 않은 질문인 것도 아니다. 그러나 급격하게 보편성을 잃어버린 집단은 그 질문이 작지 않아도 자기 안으로 함몰될 위험을 가지게 된다. 지금의 여성주의가 그렇다.
다른 언어와 다른 시각, 다른 생각들을 찾아내야 하는데, 그럴 것 같아보이지는 않는다.
11.
어쨌든 어떻게 결을 잡아갈지는 모르겠는데, 젠더 경제학을 지금 마감하는 책들의 끝무리의 리스트에 올렸다.
나도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젠더라는 이름으로 해볼 수 있는 경제적 질문들의 유형을 다시 한 번 정리해보기로 했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
나와 너의 사회과학 보고 그러는데요. 혹시 거기에 나왔던 독서모임 아직도 진행되나요? 있다면 혹시 참여가능한지 시간은 언제인지 알고싶어서요. 혹시 아시는 분 있으면 댓글좀 부탁드립니다.
http://cafe.daum.net/woo-s
이 쪽으로 들어오시면 됩니다.
흠...
아빠사회 엄마사회 좋은 비유긴 하지만 현실로 내려가면 남성의 서열주의나 여성의 서열주의나 스타일만 다를뿐 그게 그겁니다. 남성의 전투적 감성이나 여성의 전투적 감성이나.. 어느 측면에서 보면 여성의 전투적 감성이 더 악랄한 측면도 많지요.
여성운동단체가 일반시민단체보다 얼마나 더 서열주의에서 자유로울까요. 남성적 서열과 달라서 그래보일뿐이지 내면은 비슷하더군요.
인터넷에서 개인을 공격하는 극우적인 성향의 사람들이 역시 스타일과 분야만 다를뿐 남성과 여성 동일하게 악랄한 경우도 마찬가지구요.
최근 진보신당의 원리주의 교조주의를 주도하며 여성주의를 가장 악랄하게 공격하는 이들이 진보신당의 유한마담 여성당원인들인 것만 봐도 명백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