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에 살던 집에서. 이 시절에는 모든 것이 드라마틱했다. 숨소리마저 파란만장했다. 딱 6년 전의 일이다. 나도, 저 오른 쪽에서 젖을 빨던 아기 고양이 강북도, 이제는 저 시절로 돌아가지 못한다...) 

 

1.

얼마 전부터 어려운 것을 쉽게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쉬운 것을 어렵게 하는 게 중요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책에 관해서는 그렇다.

 

영화에는 13579라는 표현이 있다. 일삼오칠구, 말 그대로 순서대로 나가는 걸 얘기한다. 전통적 방식으로 앞뒤 맞추고, 적절하게 구조를 맞추는 것을 이렇게 부른다. 그리고 이렇게 만든 영화가 끝까지 가면 웰메이드라는 소리를 듣는다. 어지간히 맞출 것은 다 맞춰어 놔서 왠만큼은 한다. 그렇지만 새로운 것은 없다. 당연히 실험적인 것도 없거나 극소로 등장한다. 왠만하기는 한데, 강렬하지는 않다.

 

책이 그렇다. 이것도 일종의 13579가 있어서, 적당한 형식과 양식을 갖추게 된다. 그리고 자꾸 하다 보면 이런 게 익숙한 양식이 된다. 익숙한 게 나쁜 것은 아니다. 어느 정도의 효율성과 전달력을 가지니까 그게 일종의 양식화가 된 것이다.

 

어려운 것을 쉽게 하기, 익숙한 양식에 집어넣고 앞뒤를 맞추면 책 한 권이 된다. 그 익숙한 양식에 사람들이 처음 생각했을 것 혹은 처음 제기하는 문제, 그런 어려운 얘기를 집어넣는 것이 어느덧 내가 책을 쓰는 방식이 되었다.

 

어느덧 13579가 되어버린 내 모습.

 

13579가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글을 쓰거나 뭔가 만드는 재미는 없다.

 

어느 순간부터, 이게 일종의 직업처럼 되어가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특히 그렇다. 조금만 돈 안될 것 같고,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지 않은 주제는 그냥 내팽겨쳐져 있는 나라가 한국이다. 일본은 촘촘한 나라라서, 아무도 손을 대지 않는 주제가 그리 많지는 않다. 뭔가를 발견했을 때, 이미 누군가가 한 평생 그걸 추적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한국은 일본과는 달리, 아주 펑퍼짐한 나라다. 아주 좁은 구멍 몇 개에 모두가 몰려 있고, 그걸 조금만 벗어나면 아무도 없는 곳이 많다. 형편무인지경, 형편이 없는 곳이라서 무인일 가능성이. 하는 사람이 없다고 해서 그 주제도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경제적으로 무가치할지 몰라도,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도 무가치한 것은 아니다. 경제적으로 무가치하다는 것은, 인기가 없거나 연구에 돈을 댈 사람이 없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아무도 손 대지 않은 주제들이 우리나라에는 거의 무긍무진이라고 할 정도로 많다. 내가 이제 나이 50이다. 내가 잘 움직여야 봐야 10, 엄청나게 부지런해야 15년 움직일 것이다. 현실적으로는 5년 정도 되지 않을까 싶다. 저자로서 책을 쓰는 시간이 5년이든, 10년이든, 어쨌든 그 길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이젠 나도 슬슬 내가 쓰던 것들을 마무리해야 하는 시점이 보이기 시작하고, 언젠가는 이 모든 것을 정리할 시간이 오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는 나이가 지금이다.

 

13579 방식으로, 펜 내려놓는 순간까지 책을 계속 쓴다고 해서, 나아질 게 뭐가 있느냐, 이런 질문을 나도 나에게 던져보게 된다. 몇 년 전부터, 내가 몇 권의 책을 냈는지도 세어보지 않게 되었다. 나에게는 별 의미가 없다. 한 권 한 권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계속해서 책을 낸다는 것이 나에게 가슴 찡한 기억으로 남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통으로 본 그 시간들이 절절한 사연으로 남지도 않는다.

 

굉장히 기능적이고 기계적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 뿐이다. 이준익 감독이 가끔 나에게 라이팅 머신이라고 한다. 큰 의미를 담고 하는 얘기는 아니지만, 잘 생각해보면 욕이다.

 

2.

어려운 것을 쉽게 하는 것은, 가장 효율적인 방식에 관한 얘기다. 그렇지만 요즘 내 고민은, 어떻게 하면 쉬운 것을 어렵게 할 것인가, 양식 실험을 포함해서 조금 더 전위적이거나 실험적인 시도들을 하는 것, 왜 나는 이런 것을 피하는가, 이런 거다. 13579를 깨고, 할 수 있는 모든 시도들을 담아내는 것, 이런 걸 더 해보고 싶다. 물론 힘들다.

 

아이 둘 보면서 뭔가 해야 하는 내 입장에서 무작정 시간이 많이 들어가는 방식을 쓰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그냥 하던 대로 하고 싶지도 않다. ‘직장 민주주의라는 질문이 딱 이 양식 실험 한 가운데에 있다. 개념 자체가 쉬운 개념은 아니다. 그리고 이상적인 개념도 아니다. 딱딱하다. 그리고 이 얘기를 듣기 전에는 전혀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가 막상 그 얘기를 들으면 마치 아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을 주는 개념이다. 정의? 당연히 우리 맥락에 맞게 정의되어 있지 않은 개념이다. 그리고 책으로 진지하게 다루는 것도 처음이다.

 

이 상황에서 어떤 방식으로 양식 실험을 해볼 수 있을까? 오매나야, 하여간 그런 고민 중이다.

 

답은 아직 모른다. 모색해볼 수 있는 시간이 한 달 정도 남아있다. , 나도 몸부림을 치는 중이다

 

(카페에 두 개의 글을 썼다...)

 

http://cafe.daum.net/workdemo/iPgv/17

 

http://cafe.daum.net/workdemo/iPgv/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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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의 극한치가 변화의 극한치다 2/2

 

5.

한국 기업들인 아직은 좀 형편없다. 좀 더 잘 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사회적으로나 법률적으로나, 아직은 별로 그런 필요를 못 느끼는 것 같다. 우리가 지금까지는 정부와 국가에 대해서는 정말 많은 얘기를 했다. 국가의 사업에 대해서도, 국책사업이라는 이유만으로 예외의 공간에 두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기업은 그 논의의 예외였던 경우가 많다.

 

이게 지금 바뀌는 중인 것 같다. 기업이라고 해서 공적인 논의에서 이제 예외로 빼주지는 않는다.

 

사실 지금까지 한국에서 기업 문제라는 것은 삼성과 현대 문제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바깥에 있는 기업들은 대기업 문제의 연장선에서 같이 다루었다. 순환출자부터 시작되는 지배 구조의 문제와 계열사 문제들, 이게 기본이었다.

 

그리고 그 바깥에 있는 중소기업의 문제, 이건 그냥 뭘 더 도와줄까”, 소위 진흥의 대상일 뿐이었다. DJIT 기업들도 그랬고, 박근혜도 창조경제 아래에서도 그랬다. 안철수가 4차 산업혁명 엄청 얘기한 이후, 온갖 염병들을 떤다. 도와줘야 하는 이유만 바뀌지, 큰 틀에서는 중소기업을 엄청 도와줘야 한다, 여기서는 바뀐 게 거의 없다.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까? 전통적으로도 그렇고, 지금까지도, 한국에서는 거의 생각해본 적이 없다.

 

중소기업은 중견기업이 되고, 다시 그 중견기업이 대기업이 되면 많은 문제가 나아질 꺼야, 이게 큰 흐름이다. 그 생각이 21세기 초, 삼성을 마음 속으로 응원하던 판사나 검사들이 했던 얘기, “삼성만큼만 하라고 그래”, 그 얘기와 크게는 맥락을 같이 한다.

 

그리고 이걸 전체적으로 모으면 기다리라”, 이 한 마디가 나온다. 우리의 기업 논의라는 것이, 사실 좀 그렇다. 기다리라는 것 외에는 별 거 없다. 노조가 생길 때까지 기다리고, 회사가 좀 더 발전해서 자리 잡을 때까지 기다리고, 어느 정도 규모가 되어서 시민운동이 관심 가질 때까지 기다리고우리는 그렇게 기다리다 날 새는 구조를 가지게 되었다.

 

6.

내가 출발하려고 하는 곳이 바로 이 지점이다. 기다리기에는 지쳤어우린 너무 오래 기다렸어

 

기다리던 사람의 상상, 그런 게 필요한 순간이 왔다.

 

더 이상 기다리고 싶지 않아, 어떻게 보면 그게 지금 우리의 직장 민주주의 논의일지도 모르겠다.  지금 바로 할 수 있는 건 뭐 없어? 아주 없지는 않을 것 같다. 그렇다면 그게 뭐야?

 

회사 내의 불필요한 위계를 완화시키는 것, 조금은 지금 보다 더 수평적인 것,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지금보다는 조금은 더 평등한 관계, 이런 것들은 많은 돈이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많은 시간이 필요 하지도 않다. 다만, 그렇게 상상하는 것 자체가 회사라는 구조 내에서 쉽지 않았을 뿐이다.

 

질문하는 각도를 조금 바꾸면, 지금 보다는 훨씬 나은 상황으로 갈 수 있는 개선책을 훨씬 쉽게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주 먼 곳 같아 보이지만, 생각보다 해법은 단순할 수 있다.

 

문제는 상상할 수 없었던 것 뿐일지도 모른다.

 

지난 번 50대 에세이 작업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한국 역사에서 친구 사이의 우정으로 대표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오성과 한음이다. 그들이 맹활약하던 시기는 조선이 위기에 빠졌던 시기다. 그래서 그들의 우정이 더욱 빛났던 것인지도 모른다. 오성과 한음의 나이 차이가 다섯 살이다. 자신의 절친이 다섯 살 차이가 나는 사람이 있을까? 지금은 상상하기도 어렵다. 한 살만 차이가 나도 엄청 선후배라고 나뉜다. 회사도 마찬가지다. 입상 동기, 한 해 차이면 엄청 무서운 차이다. 다섯 살 차이가 나는 오성과 한음, 뭐야 이건?

 

회사 안의 위계, 어떤 것은 기업이 자연스럽게 만든 것도 있고, 어떤 것은 우리 사회가 만들어낸 것도 있다. 선후배와 연령별 위계, 이런 것의 상당수는 한국 사회의 질서가 만든 것일지도 모른다. 다섯 살 차이면 친구 안돼? 대부분 안된다고 할 것이다. 오성과 한음은? 걔들이 선후배 사이는 아니쟎아?

 

상상하면 변화할 수 있지만, 상상도 못해 본 변화를 만들어 내기는 어렵다. 한국의 회사가 변한다면, 그것은 상상했던 최대치 이하의 변화이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변화의 극대치가 상상의 극대치보다는 작을 것이다. 그러면 더 많이 상상하면 되지 않을까? 그렇지만 우리의 상상력 역시 제약되어 있다. 경험해보지 못하고, 들어보지 못하고, 본 적이 없는 것을 상상하기가 쉽지 않다.

 

7.

여기까지는 차분히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얘기다. 한국 경제라는 특수한 상황과 우리가 가졌던 자본주의 역사, 이런 것의 별스러움 같은 것들을 놓고 보면 차분하게 얘기를 정리할 수는 있다. 그게 엄청나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전에 썼던 조직의 재발견작업 위에 세우는 거라서, 기능적으로 완전히 맨땅에 헤딩하는,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런데 상상이라고 하는 개념을 끌고 나가게 되면, 글을 쓰는 양식에 대해서도 같이 질문을 하게 된다. 불행히도 우리가 사회과학에서 쓰는 문체와 서술 방법이 상상력을 확 넓혀주는 데 유리한 방식은 아니다. 아무리 유연하게 쓴다고 해도, 논리 진행과 전개가, 아주 빡빡하다. 게다가 시대가 또 변했다. 책을 읽는 사람도 더 줄었고, 책을 보면서 상상력을 펼치겠다고 마음을 먹을 사람은 더 소수일 것 같다.

 

내가 부딪힌 벽은 여기다. ‘상상이라는 단어를 쓴다고 해서 사람이 상상하지는 않는다. 진실을 필터 없이 바로 눈 앞에서 보여준다고 해서 상상하게 되지도 않는다. 외국의 선진 사례를 마구마구 던져 놓고, 원래는 이런 거야, 이런 성공 스토리혹은 모범 사례들을 막 던진다고 해서 마구마구 상상하고, 그런 것은 아니다.

 

글의 양식에서, 어떤 것이 좀 더 독자들에게 더 많은 상상이 가능할 수 있게 해주는 양식일까? 이건 사실 안 해본 고민이다. 문체와 서술 방법에 대한 고민은 꽤 했는데, 양식 자체에 대한 고민은 나도 처음이다. 주제가 주제라서 그렇다.

 

나라고 무슨 엄청난 방법을 처음부터 가지고 이 문제에 접근한 것은 아니다. 얘기를 하나씩 정리하다보니 결국 양식의 문제까지

 

8.

일단 결정한 것은, 상황을 설명하는 몇 개의 콩트를 넣기로 한 것이다. 단편소설 보다 훨씬 짧은 A4 2장 내외의 콩트를 통해서 압축적으로 상황을 설정하는 것. 재밌는 시도이기는 하다.

 

문제는, 이것을 몇 개나, 어느 정도의 비중으로 할 것인가? 아직 마음을 못 정했다.

 

극단적으로는 전체 얘기를 전부 개별 꽁트로 바꾸고, 여기에 약간의 설명들을 뒤에 다는 방식이 있을 수 있다. 하려면 할 수는 있는데, 제도의 기원과 유래와 같은 깊은 얘기들을 설명하는 데에는 양식 자체가 한계가 있다. 국가 복지와 기업 복지의 차이 같은 것을 이런 방식으로 설명하려면, 머리에 쥐 엄청 날 것 같다. 쥐 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아예 설명 자체가 부차적으로 보여서 아에 못 달 수도 있다. 이 정도 되면, 뭐가 우선인가, 좀 생각해보게 된다.

 

그래서 남아있는 결정은, 설정에 해당하는 꽁트와 설명을 어느 정도의 비중으로 할 것인가, 그 정도 된다. 말은 복잡하지만 10, 20, 30, 이런 개수에 해당한다. 개수가 늘면 설명이 줄고, 개수를 줄이면 서술적인 설명 부분이 더 늘어나게 되고.

 

지난 한 달 동안, 솔직히 이 개수를 두고 아침에 맘 변하고 저녁 때 맘 변하고, 그랬다. 별로 본질적인 것도 아닌데, 어느 정도의 실험적 시도를 할 것인가, 사실 그걸 놓고 오락가락 하는 내가 좀 한심해 보이기는 한다.

 

사실 책은 내용이 가장 중요한데, 내용과는 별 상관도 없는 양식 문제를 가지고 몇 주째 죽을 동 살 동 몸부림을 치고 있는 나를 보면 좀 한심 맞기도 하고.

 

그래도 방법이 다른 없다. 더 고민을 해보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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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의 극한치가 변화의 극한치다 1/2

 

1.

살다 보면 얻어 걸리는 게 가끔은 있기 마련이다. 노력한 것이 그 사람이 삶에서 얻는 모든 것은 아니다. 가끔 자신이 노력하지 않은 것도 얻어 걸린다. 좀 극단적인 얘기일 수도 있지만, 얻어 걸리는 것 중의 최고는 부자 아빠일 수도 있다. 대한항공 조씨라고 부르기는 하는 대한항공 자녀들의 일탈을 보다 보면, 가족은 무엇이고 자본주의는 무엇일까, 그런 질문을 하게 된다. 자본주의는 공평할까? 공정할까? 그렇다고 볼 수도 있고, 아니라고 볼 수도 있다. 그렇지만 기업에서 회장님 자녀들이 그냥 고속 승진하고, “어차피 내 꺼야”, 이런 되도 않는 꼴불견을 연출할 때, “쟤는 너무 많이 얻어걸린 거 아닌가”, 그런 생각도 들게 된다. 당연한 일이 아닐까 싶다.

 

이렇게 부모로부터 너무 많은 것을 받은 사람들이 회사를 자기 맘대로 움직이는 것이 당연한 일일까? 우리가 왕조 시대를 사는 것은 아니쟎아? 물론 그렇기는 하다. 가끔 2세 혹은 3세 정치인이 있기는 하다. 일본의 아베 총리는 3세 정치인이다. 아베 가문은 그보다 훨씬 더 예전의 통일 이전에도 가끔 등장하는 가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그냥 자식이 아버지의 정치적 권능을 그냥 물려받는 것은 아니다. 아주 예외적인 경우다. 박근혜도 아버지의 권능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그 능력까지 물려받은 것은 아닌가 보다. 지금은 감옥에 있다. 아마도 독재자의 자식이, 그냥 아버지의 권능을 물려받아 대통령까지 가는 일은 한국에서 다시 벌어지지는 않을 것 같다.

 

5년 전, 아버지의 권능을 물려받아 대통령이 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국민의 절반이 넘었다. 불과 5년 전,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았다. 한국에서 시간은 정말 빠르다.

 

2.

대한항공 직원 1,800명이 참여한 단톡방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직원의 1/10 가량이 참여했다고 한다. 대한항공 조씨 일가의 부당한 대우에 관한 얘기들이 차고 넘친다. 자발적인 참여이고, 많은 사람들은 글을 쓰면서 여전히 두려워하는 것 같다. 여기서 나온 특별한 얘기들은 두 개다.

 

1) 사축 나가라회사 가족들과 결탁한 짐승들, 나가라

2) 노조 나가라… (아마 사태를 이렇게 만드는 데 일조했을 것이 분명한) 어용노조 나가라.

 

이 사건은 어떻게 해결될 것일까? 그리고 무엇이 해결일 것일까? 과연 무엇이 궁극의 해결책이고 개선책일까? 이런 것은 진행형의 질문이다.

 

오랫동안 노동에 관해서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노조 나가라라는 질문은 좀 뜨악할 것이다. 노동조합이라는 것을 오해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저기에는 제대로 된 노조가 아니라 어용노조가 있어서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면 좀 편하다. 시간이 지나면 제대로 된 노조가 저기에도 생겨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결국 노조의 영향력이 많아져서 모든 것이 좋아질 것이다

 

이 논의는 87 6월에 뒤 이은 877월 이후로 우리가 노동에 대해서 생각한 기본적인 시각이다. 지금 노조가 없어서 그렇지, 노조만 생기면 모든 것이 다 좋아질 것이야

 

전교조 만들 때 아마 우리가 그랬을 것 같다. 교육과 노동이라는 두 가지 주제가 여기서 만났다. 교육 문제가 뭐가 좀 나아졌을까? 솔직히 뭐가 좋아졌는지 전혀 모르겠다. 80년대의 과외 금지 시절 보다 지금의 교육 여건이나 환경에 좀 개선이 있을까? 적어도 교육 문제에 있어서는 전교조가 지금보다 더 본격화되고 더 강화된다고 해서 상황이 나아질 것 같지는 않다.

 

우리가 노동 문제나 개별 부문 문제를 개선하는 데에서 제시했거나 혹은 제시 받은 것은, ‘노조를 만들자’, 대체적으로 이 한 문장일 것이다. 지금 우리는 어쩌면 조금은 다른 시대를 만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박근혜 탄핵까지 가는 큰 흐름의 시작은 이화여자대학교의 학내 분규 과정이었다. 좀 황당한 총장이 이상한 과를 만들고 자기들 맘대로 뭔가 하려고 하는 순간에 학생들이 제동을 걸었다. 이게 더 커지면서 정유라의 특급 대우와 입학 과정에 대한 비리들이 막 쏟아져 나왔다. 이 사건은 커지고 커져서, 결국 현직 대통령의 하야가 아니라 파면까지 끌고 가게 된다. 나중에 생긴 사건들에 묻혀서 지금은 크게 주목을 안 하지만, “돈도 능력이야라고 했던 정유라의 되도 않는 얘기가 그들의 파멸에 도화선이 되었다. 그 때 이대 학생들 사이에서 나왔던 얘기도 대한항공 단톡방에서 나왔던 얘기와 같다.

 

운동권 나가라.”

 

좀 더 복잡한 맥락을 생각할 수 있겠지만, 대한항공에서 노조 나가라는 얘기와 학생들의 게시판에서 운동권 나가라는 얘기가 공통된 부분도 존재한다.

 

3.

전통적인 직장 민주주의에 대한 논의는 산업 민주주의의 하위 분과이며, 작업장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많이 불렸다. 좀 거칠게 단순화시키면, 노조가 힘을 키워서 회사 권력을 제어하자, 이 정도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걸 개별 기업차원에서만 생각하지 말고 좀 더 넓은 산업 차원에서 생각하지, 이런 얘기들이다. 전통적인 좌파의 기업 논의다. 이 얘기가 지금 한국에서 유효할 것인가? 여기에 대해서 답하기는 쉽지 않다.

 

노조와 기업, 아마도 자본주의가 망하는 그 날까지 계속될 질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 단계에서는 좀 뉘앙스 조절이 필요할 것 같다. 노조와 직장 민주주의라고 큰 줄기를 잡으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고민은 노조조직론정도일 것이다. 어떻게 노조 가입률을 높이고, 노조의 활동을 조금 더 강력하게 만들 것인가, 즉 어떻게 노조를 강화시킬 것인가, 그런 질문 하나가 남는다. 방법은?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게 다야?

 

이 줄기를 잡으면 아주 계몽적인 얘기를 할 수밖에 없다. 노조를 잘 몰라서 그런데, 그게 엄청 중요하고또 여러분이 잘 모르셔서 그러시는데, 노조가 결국 사회를 움직이는 핵심이 되는 게 자본주의가 더 나아지는

 

이 얘기가 틀린 얘기는 아니지만, 효과에 대해서는 미지수다. 그리고 결국은 2단계 접근이라는 게, 많은 사람들 힘 빠지게 한다. 1차로 뭘 하고, 2차로 필요한 것은 1차의 결과를 기다리는 것

 

,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내가 서 있는 장소 혹은 출발할 장소가 딱 여기다. 전통적인 접근 방법을 벗어나서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논의를 어떻게 세울 것인가?

 

4.

몇 년 전에 현대자동차 노조를 둘러싸고 좀 큰 논쟁이 한 번 벌어진 적이 있었다. 직원 자녀들이 취업할 때 가산점을 줄 것이냐, 말 것이냐, 이게 논쟁의 핵심이었다. 노조에서 이 가산점을 선거에서 공약으로 걸었었나 보다. 하여간 해야 한다는 게 노조 입장이고, 이건 좀 아니다, 그걸 말리는 사람들이 한 편이었다. 이 논쟁은 생각보다 많은 상처를 남겼다. 노조란 과연 무엇인가? 그리고 노동자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이 흐름은 노조와는 사실 별 상관없는 복지 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 우리는 잘 얘기하지 않지만 회사 복지와 국가 복지라는 두 가지 다른 흐름이 있었다. 당연히 우리는, 미국을 따라서 회사 복지의 길을 걸었다. 그러다보니까 회사가 어디냐, 이게 엄청나게 중요한 나라가 되었다. 그리고 그걸 제공해주는 회사의 권한이 지나치게 강해졌다. 이게 끝까지 가다 보면? 그 회사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중요한 권리가 되는 시대가 오게 된다. 우리가 이미 21세기 초에 만난 한국이다.

 

한국 기업을 얘기하기 위해서는 이게 굉장히 중요한 얘기인데, 외국에서는 잘 다루지 않는 얘기다. 유럽은 그런 거 없으니까 안 다루고, 미국은 그게 기본이니까 안 다루고.

 

기업에 대해서는 중요한 얘기인데, 우린 거의 안 다룬다. 노조 얘기를 강화시키면, 사실 기업 복지에서는 정반대의 방향에 대한 결론이 나올 위험성이 있다.

 

5.

이런 게 내가 직장 민주주의를 다루기 위해서 세워 놓은 줄기들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결정적으로 서술의 방법이라는, 양식과 구성의 문제를 만나게 된다. 자 이 문제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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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동안 애들 셋 보느라고 죽는 줄 알았다. 친척 한 명은 우리 말을 아예 못. 4월은 노는 달로 정해놨는데, 정작 하루도 제대로 놀지 못한 것 같다. 내가 힘들다고 해도, 이게 뭐가 힘들다는 건지, 이해하지 못하는 주변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아이 키우는 건 해보지 않은 부부, 결혼하지도 아이를 낳지 않기로 하고 살아가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내 주변에 많다. 애 키우는 게, 애 딱 혼자 밥 먹이고 그런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아이 주변의 사람들과 싫든 좋든, 일정한 관계를 만드는 것... 원래는 없었을 일을 일부러 만들어, 남의 집에 가서 자고 오기도 하고, 우리 집에 와서 자고 가기도 하고... 그렇기는 한데, 느무느무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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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에세이 출간일이 6월 4일로 잡혔나봅니다. 이제 정말 제목을 정해야 하는 마지막 순간인데... 저는 1) 달달한 50대, 2) 어영부영 50대. 이 정도로 생각합니다. 부제는  1)개수작과의 결별, 2) 바쁘면 지는 거다, 이 정도 하면 어떨까 싶은...

 

의견들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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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할배가 '삼성만큼만 하라 그래', 그런 시대를 열었다...)

 

왜 지금 직장 민주주의인가?

 

1.

기업 문제에 대해서 경제학은 입을 다무는 쪽이다. 기업은 무엇인가, 명확한 정의가 있을 것 같지만 사실은 없다. 투자하는 주체 정도이다. 그리고 이윤 극대화, 이것은 일반균형 모델을 풀기 위해서 왈라스 등 한계효용 학파에서 수리적으로 제시한 가설일 뿐이다. 정확히 말하면, 시장에서 최고 가격을 받고 물건을 파는, 특정 재화의 독점 공급자라고 정도의 위상을 갖는다. Initial endowment라고 하는, 이유는 모르지만 하여간 어떤 물건을 가지고 시장에 거래하러 나오는 사람, 이 사람이 기업이다. 일종의 1인 행위자 모델이다.

 

맑스도 이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생산과정이라는 개념은 있지만,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 이렇게 점 세 개로 처리한다. 모른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기업을 블랙박스라고 불렀다. 진짜 말 그대로 블랙박스다. 우리는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른다. 진짜? 진짜로 그렇다. 밖으로 드러나는 기업의 행위를 알 수 있을 뿐이지, 그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모른다.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이 일에 관심이 있던 사람은, 한국 특히 한국 노조에서는 괴물 정도로 간주되는 장 밥티스트 세이 아니었을까 싶다. 세이는 사장 출신이었다. 그래서 기업 현상에 관심이 많았고, 그 안에서 발생하는 부가가치 현상에도 관심이 많았다. ‘세이의 법칙말고 세이를 들여다보는 사람은 전세계적으로도 드물다. 어쨌든 그는 솔직한 사람인 것은 맞다. 그만큼 싫어하는 사람도 많았다. 기업에 대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한 것은, 세이 정도다.

 

그리고 제도학파, 톨스타인 베블렌으로 넘어온다. 19세기의 얘기들이다. 기업가 정신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기업가의 본능에 대한 얘기는 베블렌이 테이블에 올렸다.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슘페터의 이론을 재해석하는 순간까지도 사람들은 기업이 아니라 기업가에 초점을 맞추었다. 기업=CEO, 이게 보편적인 생각이다. 맑스는 이것을 육류화된 자본, 이렇게 사장을 정의했다. 자본이 피와 살을 갖추면, 그게 사장이다, 그런 얘기다. 그러면 사장 혼자 다 해쳐먹는 거야? 당연히 그 질문이 나온다. 이렇게 물어보면, 경제학자들은 얼버무릴 수밖에 없다. 혁신가 정신이라는 둥, 창조적 파괴의 본능이 있다는 둥, 좀 이상한 소리를 하는 수밖에 없다.

 

신제도학파에서 조직론 정확히는 조직 현상이 주목을 받으면서 기업 내부를 들여다보려는 노력이 있었다. ‘조직의 재발견이라는 졸저는, 이 이론들을 정리했던 책이다. 이 이상 더 자세한 이론은, 경제학에는 없다. 신기하겠지만 기업 내부의 문제는 경제학에서는 거의 다루지 않는다. 에이전시 이론 등이 부분적으로 이 영역을 다룬다. 그러나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 같은, 기업은 이렇고, 이래야 하고, 이런 것은 없다.

 

2.

그럼 뭔 소리를 할꺼야?

 

기본적인 틀은 이렇다. 경제가 사회 속에 존재하고, 그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쉬운 말이다. 물론 이 쉬운 말을 겁나게 어렵게 하는 방법도 있다. 칼 폴라니의 embedness에 관한 것이라고 하고, 우리 말로 배태성이라고 부르면 갑자기 사람들 머리 돌아가기 시작한다. 배태성? 이런 말을 알아 처먹을 한국인이 있을까 싶다. 하여간 경제인류학에 나오는 개념이다.

 

80년대와 90년대, 한국을 선도하는 그룹을 기업이라고 해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한국은 건국 초기 이후로 군인들의 나라였다. 한국의 원형, 그게 군대가 아니라고 해도 이상하다. 70년대에 수출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으면서 이 사이로 상인들 아니 넥타이들의 시대가 열린다. 876월의 넥타이 부대를 가장 부드럽게 정의하는 방법이다. 이즈음에 군인들로부터 회사의 넥타이들로 리딩 그룹에 대한 전환이 발생했다고 가정할 수 있다.

 

90년대 후반에 대기업에 다녔다. 그 때 내가 본 회사는 그렇게 무식한 사람들이 뛰노는 동네는 아니었다. 군인들보다는 나았던 것 같다. 요기까지가 기본 가설이다.

 

21세기가 되었다. 한국 사회는 많이 바뀌었다. 그리고 사회 일반과 기업의 수준에서 역전 현상이 벌어진다.

 

그 전에는 한국에서 무슨 일이 잘 안되면 전부 민도탓을 했다. 국민 수준이 안된다는 얘기다. 군인도 민도라는 말을 입에 썼고, 회사 사장들도 그렇게 했다. 군대, 기업, 이런 데가 엘리트 집단이고 그 밖에 있는 일반 국민들은 제3세계 민중 수준이라는 의미다. 사람들이 무식하니까 되는 일이 없어, 그렇게들 우리의 문제점을 설명했다.

 

민주당 정권 10, 한국당 정권 10, 그렇게 21세기의 시간이 흘렀다.

 

어쨌든 21세기에 들어오려는 시점에 한국 기업이 아주 후지지는 않았다고 치자. 이건희가 고딴 소리를 종종 했다.

 

지난 20년간, 뭔가의 변화가 생겼다. , 이 변화가 무엇일까? 지금 한국의 회사 일반이 국민 일반의 수준보다 높을까? 이제는 그렇게 말하기 어렵다.

 

촛불이 만든 변화라고 하든, 민주주의가 누적된 효과라고 하든, 지금 한국에서 국민의 민도, 이런 얘기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국민들이 무식해서, 대중들이 우매해서, 요딴 얘기는 이제 한국에서는 안 통한다. 그게 촛불이 만든 변화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3.

사회 일반과 기업 일반의 수준에서 불균형이 생겨났다. 이 불균형의 기원에 대해서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아주 다양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논리적으로는 불균형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 이 불균형을 어떻게 할 것인가? 기업을 계속해서 이 사회 내의 블랙박스로 둘 것인가, 아니면 불균형을 시정하기 위한 모종의 과정을 만들어낼 것인가?

 

대한항공 조씨 우리는 그 조가 일가를 이렇게 불렀다, 매우 독특했다 의 문제를 예로 들어보자. 그들은 20세기에도 그 지랄들을 했을 것이고, 21세기가 되어서도 조가 방식으로 계속 지랄들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이게 문제가 돼? 조가들이 이해 못하는 변화가 한국에 생겼다. 이제는 그러면 안된다.

 

근데 문제가 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바뀔 수 있을까?

 

이게 내가 던지고 싶은 질문이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혹은 공기업 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있을까? 임금과 복지는 차이가 있다. 그렇지만 조직 내에서 벌어지는 생지랄은, 대개 거기서 거기다. 이 사회가 같은 사회인데, 민간기업과 공기업 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벌어질까? 있다면 있고, 없다면 없는 정도. 내가 보기에는 별 차이 없다. 민간기업의 50대 이사와 정부의 50대 국장 사이에 엄청난 문화적 차이와 지성의 차이가 있을까?

 

내가 이제 그 나이가 되었다. 그놈이 그놈이다. 중소기업은 좀 차이가 난다. 규모의 차이에 의해서 발생하는 것들이 있고, 지나치게 우대를 받다 보니까 발생하는 부작용이 있는 것 같다.

 

사회 일반과 기업 일반 사이의 차이를 줄이는 것, 이게 지금 한국에서 내가 생각하는 직장 민주주의다.

 

20세기에는 아주 웃긴 대중들에게 회사 사장들이 기업만큼만 해라, 그랬다.

 

삼성만큼만 하라 그래!”

 

이건 정확하게 내가 들은 단어 그대로다. 판사 한 명, 검사 한 명, 진짜로 요렇게 말하는 것을 내 귀로 들었다. 21세기 초반의 일이다. 지금은 이게 역전 되었다.

 

이 차이의 잣대가 효율성, 엄밀성, 정당성, 정의 등등이 있을 수 있는데, 나는 이번에는 민주주의라는 저울을 쓰려고 한다. workplace에서 발생하는 민주주의의 문제

 

(물론 고전적으로 독일에서 얘기하던 산업 민주주의의 일환으로의 직장 민주주의와는 조금은 결이 다른 얘기다좀 더 우리의 상식에 가까운 방식으로 정의한…)

 

http://cafe.daum.net/workdemo/iPgv/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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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관한 얘기들이 아주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소소하게는 좀.


서로 얼굴 보면서 할 수 있는 얘기들이 더 많을 것 같아서,


차 한 잔 마실 수 있는 시간을 잡았습니다.


5월 10일 목요일 7시 반


한겨레 신문사 6층 카페 '짬'



그날 어이하여 카페까지 개설하게 되었는지, 좀 자세하게 말씀 나누겠습니다.


(앞으로도 매주는 아니더라도 종종 모일 생각입니다.)

 

http://cafe.daum.net/workdemo/iPgj/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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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드골은 프랑스의 우파 정치인을 대표하는 사람이다. 정작 본인은, 자신이 우파라고는 한 번도 안했다고 한다. 좌우와는 상관없는 또 다른 무엇그래서 드골을 칭할 때는 드골리즘이라고 하기도. 샤르트르가 알제리 독립을 지지해서 프랑스인들이 생난리를 쳤었다. 알제리 태생인 카뮈는 이 때 침묵했었다고 한다. 모든 원성과 질문이 샤르트르에게 집중되던 시절, 드골이 그도 애국자다”, 이렇게 쉴드를 쳤다고 한다. 내가 생각하는 보수는, 드골 같은 사람이다. 그렇지만 한국의 보수는 드골 보다 더 골때리는 사람들이다. 내가 그들을 우습게 보는 것은 우파라서 그런 게 아니라, 뭐 이렇게 무식한 것들이 다 있어, 진짜 아는 게 없고, 사는 게 무식해서 그렇다. 골프에 이렇게까지 목 걸고 있는 정통 엘리트들이 다른 나라에도 있는지 모르겠다.

 

 

 

하여간 드골 멋있어요, 이런 얘기를 하기 위해서 아직 점심도 안 먹고 펜을 든 건 아니다. 드골이 오늘의 드골이 된 건, 그가 나치 치하에 영국으로 망명해서 단파 라디오 방송 자유 프랑스를 송출한 이후부터이다. 믿거나 말거나, 그의 방송을 듣고 프랑스 전역에서 나치에 저항하는 레지스탕스가 불꽃 같이 일어났다는데. 좌파 대통령 미테랑도 이런 소년 레지스탕스 출신이다. 레지스탕스는 프랑스에서 좌우를 막론하고 정통성으로는 먹어주고 가는 경력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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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옛날 아리랑 고개 시절 생각이 나서 사진 찾아봤다. 2012 1. 오늘 말로만 듣던 아리랑 고개 시절 물어보는 사람이 있어서, 이것저것 생각나는 대로.

 

이 시절, 아직 mb 때였고, 아이 태어나기 전. 걱정 한참 많았었다...


사무실 나갔다 들어오면서 아직 남아있는 산길의 꽃들이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은 딱히 걱정이라고 할 게 없다.


나 혼자 이렇게 편하게 살아도 되는지 잘 모르겠다. 애들이 아프기를 하나, 돈 걱정을 하나. 갑자기 어느 날 일어나서 이제부터 나도 벤츠 타고 살아야겠다는 미친 짓만 안하고 지금처럼 경차, 딱 좋아, 이러고 살면 한 평생 적당히 사는데 아무 문제 없다.

 

연초에 대학 교수 초빙 얘기가 있었는데, 잠시 생각해보고... 다 귀찮아요. 이 나이에 무슨 대학을. 주위 사람들이 잠시 쩝, 했더랬다. 제자 한 명도 없는 게 아쉽지 않느냐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기는 한데, 이 나이에 제자는 무슨… 50이 넘어가니까 제자도 귀찮고, 후배도 귀찮다. 이제는 모든 위계와 수직적 관계 자체가 다 귀찮다. , 아래, 그런 게 어딨나 싶다.

 

최근 일을 위해서 소위 업무조율 같은 거 하는 시간을 따져봤다. 애들 어린이집 보내고 점심 때 즈음 잠시 차 한 잔 마시는 게 보통 일주일에 한 번 아니면 두 번이다. 평균 내면 1.5. 1.5회 차 마시면서 먹고 사는데 별 문제 없는 사람이 또 있는지 모르겠다. 하여간 내 경우는 그렇다. 원래는 2.5회 정도 생각을 했는데, 4월달은 간만에 아무 일도 안 하고 좀 쉬는 달이라서.

 

‘50대 에세이준비하고 쓰는 났더니 내 생각이 많이 정리되었다. 불 필요한 일들과 감정들이 많이 사라졌다. 그리고 삶의 군더더기도 많이.

 

이제 나는 공익과 관련된 일 아니면 안 한다. 먹고 살고, 그러기 위해서 마음에 부대끼고 참고, 그런 건 할 필요가 없다. 공익과 관련이 되어 있어야만 하고, 명분이 없는 일도 안 한다. 그런 것도 할 필요가 없다. 남들이 이미 하는 거, 다른 사람들이 열심히 뭔가 하는 것, 그런 것도 안 한다. 니가 한 거니, 내가 한 거니, 그렇게 별 것도 아닌 공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과 부딪힐 만한 여지가 생기는 것은 안 한다. 그리고 재미 없는 것도 안 한다. 40대에는 먹고 살아야 하니까’, 나한테 그렇게 외치면서 별로 재미 없는 것도 참고 했다. 그 때는 내가 좀 부족했다. “이거 재미 없어서 못하겠어요”, 그렇게 과감하게 말하지 못했다. 의미와 보람 그리고 재미를 찾는 대신, 남들한테 약간은 야박하게 말하는 것은 감수하기로 했다. 안 하겠다, 못 하겠다, 이런 말 하는 게 너무 거칠어 보였다. 그래서 돈도 너무 조금 주고, 별 의미도 없어 보이는 일도 참고 했다. 부작용이 생겼다.

 

싫은 것을 참고 하다 보니까, 술을 너무 마시게 되었다. 좀 야박한 소리 하고, 술 덜 마시는 게 훨씬 나을 것 같다. 술 대신에 신경을 분산시켜서 노는 방법을 별로 못 배웠다.

 

그래서 원칙을 정했다. 무의미하게 속상해서 술을 세 번 이상 마시게 될 것 같은 일은, 아예 안 한다. 좋고 즐거워서 마시는 거야 나도 좋은 일인데, 너무 속상해서 혼자 앉아서 술 마시게 될 것 같은 일은, 아예 시작을 하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다. 50이 넘어가니까, 이젠 술 마신 것도 다 살로 간다. 인생 노년을 술살 껴안고 살 생각은 없다.

 

그런 바보 같은 짓 할 시간 있으면, 그야말로 사람들하고 커피 마시면서 즐거운 미래에 대해서 상상하는 시간을 더 많이 갖는 게 났다 (여러 층위에서 시민 독자 모임 같은 것을 자주 가질까 한다…)

 

방송과 신문 관련된 일을 다 털어냈다. 그리고 겨우 만들어낸 삶의 여유다. 바보 같은 고민하면서 혼자 괴로워할 이유가 없다. 산크리트어로 걱정이 '찐따'라고 한다. 부처를 만들어낸 그들이, 걱정 많으면 찐따라고 불렀던 것 아닌가?

 

(예를 들면, 직장 민주주의에 대한 논의 같은 것들은, 좋은 일이다. 이런 건, 그냥 애기를 많이 하는 것만으로 사회가 조금은 좋아진다. http://cafe.daum.net/workde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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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민주주의 카페, 출발 티타임을 가지기로 했습니다. 장소는 한겨레 신문사에서 할 건데, 요일을 못 정해서. 평일 저녁과 주말 오후 중 선택인데. 의견들 주시문 가급적 많이 오실 수 있는.

 

http://cafe.daum.net/workdemo/iPgv/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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