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2/21'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8.02.21 [초고] 명함과 영혼 한 조각
  2. 2018.02.21 국가의 사기, 2쇄 찍을 때쯤... 2
  3. 2018.02.21 책의 가치에 대한 짧은 생각

 

 

1.

 

신 넘버 38. 용인 아파트 개발현장 인근의 나대지, 어두운 쓰레기 더미 속 - 어느 명함의 독백

 

나는 명함이다. 누구나 그렇게 살겠지만, 나도 최선을 다 해서 산다. 그리고 티 내지 않고 버림받지 않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표준에 맞춘다. 국제적으로 가로 9 센티, 세로 5 센티가 국제 표준형이다. 가끔 튀어보기 위해서 표준을 벗어나려는 놈들도 있지만, 대부분 남의 명함철에 들어가보지도 못하고 바로 버려진다. 자기가 왜 태어났는지, 사명을 잊어버린 등신 같은 놈들이다. 악착 같이 다른 사람의 손에서 살아남아서 몇 달 후, 아니 몇 년 후 주인의 전화번호를 알려주는 것이 우리가 태어난 이유다. 그리고 그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면 우리는 안심하고 사망한다.

 

나는 전생이 없다. 오피스 물품은 오피스 물품끼리 윤회한다. 우리는 그 윤회의 맨 밑바닥이다. 이 윤회의 끝은 만년필이다. 최근에는 노트북에서 끝나기도 한다. 중간 단계에서는 불을 밝히는 독서등이나 스탠드가 되기도 하고, 프린터가 되기도 한다. 아직 몇 단계 더 넘어야 최종적인 주인의 분신, 만년필이 된다. 만년필 다음은? 자동차나 카메라로 태어난다. 진공관 앰프나 스피커로 태어나는 경우도 있다. 그걸 다 마치면? 잘 모른다. 어지간한 큰 공덕을 쌓지 않으면 사람이 될 수는 없지만, 개나 고양이 같은, 정말로 명함 보다는 몇 단계 높은 동물로 태어나기도 한다. 그래도 사람과 다른 것은, 우리의 생애 주기는 짧다. 명함으로 태어나는 것, 진짜로 자랑스러운 일이다. 갈 길이 멀다.

 

그렇지만 모든 명함이 이렇게 사무기기 윤회의 길을 걸어 올라서는 것은 아니다. 명함이 되기 위해서는 주인의 손을 한 번은 거쳐서 세상의 빛을 보아야 한다. 꼭 다른 사람에게 건네지지 않아도 괜찮다. 불법 주차를 하면서 자동차 와이퍼에 끼워놓은 명함이 불법 견인을 막으면 대박이다. 바로 볼펜 수준으로 환생할 수 있다. 물론 수 십억짜리 계약을 성사시킨 명함들은 바로 만년필로 태어나기도 한다. 만년필은 우리처럼 주인의 영혼 한 조각이 담기는 게 아니라, 영혼 그 자체이기도 하다. 처음 주인이 명함을 손에 집을 때, 그의 영혼 한 조각이 우리에게 담긴다. 그 전에는 그냥 종이쪼가리에 불과하다. 그래서 우리가 이 사무기기 윤회의 첫 단계인 것이다.

 

나는 명함이다. 그리고 명함인 것을 자랑스러워 했다. 나에게는 아직 긴 운명 같은 윤회가 길게 남아있었다. 지난 달까지, 나는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으로 내가 명함으로 태어나서 이제 출발점에 서게 된 것을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두 달 전, 드디어 나는 명함 통 맨 앞 줄에 서게 되었다. 통에 들어간지 1주일, 생각보다 시간은 빨리 왔다. 내 앞에 있던 녀석들은 이미 진짜 명함이 되어 주인의 영혼 한 조각과 함께 자기 삶을 시작했을 것이다. 이제 내 차례다, 그랬었다.

 

주인, 아니 그 새끼는 지난 주에 퇴사했다. 그것까지는 알겠는데, 우리를 그냥 버리고 갔다. 나와 내 친구들은 주인의 영혼을 얻기는 커녕, 명함통에서 나와보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대로면 나는 그냥 소멸이다. 그냥 집에 가지고 가서 태우기까지 하지는 않더라도 찢어서 버리기만 해도 나는 다시 명함으로 환생한다. 인쇄소 공장의 좁고 불결한 기계를 지나고 다시 크기에 맞게 재단되는 과정이 공포스럽기는 하지만 그래도 한 번 더 해볼 수는 있다. 그런데 이 새끼, 아니 이 개자식이 그냥 버리고 가버렸다. 그뿐이냐? 심지어 선물로 받은 만년필도 버리고 갔다. 수 십 년을 돌아서 겨우 만년필로 태어났는데, 잉크 한 번 채워보지도 못하고. 이 대학살을! 이런 무식하고 야만스러운 개새끼는 내 명함 인생에 진짜로 처음 봤다.

 

다른 동료 명함들이 며칠 전부터 내게 복수를 얘기하기 시작했다. 같이 쓰레기통에 누워있는 만년필과 서류뭉치들도 나에게 그 얘기를 한다. 난 아직 결심을 못했다. 그러나 결심을 해야 한다면, 아마도 바로 내가 결심을 해야 할 것이다. 왜냐? 난 명함 통 속 맨 위의 명함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도 아니고, 세 번째도 아니고, 바로 내가 맨 앞이다.

 

2.

어느 날 아침이었다. 용인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다. 엄청난 규모의 폐기물 불법 투기가 있었는데, 하여간 거기에서 유일하게 신원이 확인된 게 나라는 거다. 그러니까 선생님께서 현재로서는 불법 투기의 유일한 용의자되십니다! 그러니까 한 번 경찰서로 오셔서... 니가 올래, 우리가 갈까, 그런 분위기였다. 원래 내가 이런 저런 사건에 연류되어서 경험을 해보는 것을 좋아하기는 한다. 만약 며칠 전에 은평경찰서에 갔던 일만 아니었으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MB 서울시장 시절의 일이다. 그의 뉴타운 사업 1호가 은평뉴타운이었는데, 이게 불법 요소가 한 두 개가 아니다. 서울에서 활동하는 시민단체에서 이 건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었다. 흔히 말하는 철거깡패가 멀쩡하던 동네를 온통 공포 분위기로 몰고 가는 일이 벌어졌다.  드라마에서 맨날 나오는 일 중의 하나였는데, 문제는 다음에 대통령이 될지도 모르는 MB의 일이었다. 이래저래 눈치 보면서 빠질 단체와 사람들은 빠지고, 아무 눈치 안 보는 나 같은 막장들이 결국 기자회견에 이름 걸고 나서게 되었다. 그리고 당연한 수순으로 MB 쪽의 철거회사에서 소송을 걸어왔다. 시민단체에서는 잘 걸렸다, 이걸로 대법원까지 가자는 건데, 난 그 때 건강이 안 좋아서 무리한 일은 하면 안 되는 때였다. 아내는 대법원까지 가는 건 힘들고, 그냥 약식기소 나오면 벌금 내고 말자고 했다. 결국 벌금 100만원이 나왔고, 그냥 냈다. 나는 MB와 긴 송사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MB 대통령 시절, CBS 라디오에서 내가 했던 얘기를 방송통신위원회가 문제 삼아서 결국은 대법원까지 가게 되었다. 박근혜 시절, 대법원에서 이겼다. 그리고 다시 방송으로? 그건 아니다. 이적이 <응답하라 1988>에서 어쿠스틱 기타와 함께 노래 불렀다. "지나간 일은, 지나간 대로..."

 

안 그래도 경찰서 여기저기 골치 아프던 기간이라 나는 용인경찰서 형사한테 설명을 해주었다.

 

"선생님, 거긴 제가 퇴사한지 3년 넘구요. 그 명함은 그 때 사무실 쓰레기통에 버리고 온 거예요."

 

형사는 쉽게 전화를 끊지 않았다. 그래도 내 얼굴은 봐야겠다는 얘기를, 이렇게 돌리고 저렇게 돌리고, 그러고 있었다.

 

"몰라요, 그럼 선생님 하고 싶으신 대로 알아서 하시구요."

 

잘 알아듣기 어려운 얘기를 계속 해서, 결국에는 내가 전화를 끊었다. 대학교 시절에도 나는 내부수배만 받았지, 실제로 검거된 적도 없고, 당연히 감옥에 가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시민 운동 쪽에 있으면서 생각보다 경찰서 갈 일도 많아졌고, 재판에도 종종 나간다. CBS 건은 행정재판에서 증인대에 서기도 했다. 지난 수 십 년 간의 부가가치세 세율추이 그래프와 추세선, 역진세 효과를 가지고 있는 정부조치에 대한 통계 같은 것을 보여주었다. 국회 청문회 증인은 몇 번 했었는데, 실제로 법원에 증인으로 출석한 것은 그게 유일한 경험이었다. 옛날에 어른들은 호적에 붉은 줄 간다고, 범죄자가 되는 것을 아주 무서워했다. 우리는 그런 건 무서워하지 않았는데, 고문은 정신적으로 겁나게 생각했다. 그리고 친구들을 밀고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는 것은 정말로 부담스럽다. 어차피 다 사람 아닌가. 정부가 하는 걸 반대하는 일을 하다 보면 이래저래 경찰서 들락날락 할 일들이 많아진다. 군사정권에서는 그런 일련의 일들이 일종의 사상범처럼 처리되었는데, 요즘은 잡범 처리한다. 도로를 불법으로 건넜다거나, 파업이 경제적 영향을 주었으니, 벌금을 내라... 그런데 이 벌금이 좀 세다, 툭하면 수 십억 대다.

 

용인경찰서에서 다시 전화가 오지는 않았다. 아마 그 때 은평 경찰서 왔다갔다하는 일이 없었으면, 나도 궁금해서 결국에는 용인경찰서에 가서, 거기서 나왔다는 옛날 내 명함을 직접 보는 일이 벌어지기는 했을 것 같다. 회사를 그만 둘 때, 워낙 일찍 결정했기 때문에 무거운 책 같은 짐들은 몇 번에 걸쳐서 집에다 갔다 놨다. 가벼운 건 좀 그냥 뒀었다. 그러다 총무 쪽에서 어차피 그만둘 거, 집에서 좀 쉴 수 있게 이렇게 저렇게 연차 등 휴가 처리를 해줬다. 그래서 약간의 짐이 내 자리에 남았었다. 국무조정실장이 주었던 장관표창장이 그렇게 분실되었고, 별로 신경도 안 썼던 명함 박스가 그 때 남았던 것 같다. 몇 년 후에, 진짜로 그 때 두고 간 명함들을 다시 만날 뻔 했다. 버려진 명함의 복수였을까? 그리고 그걸 막아준 건 당시 진짜로 아끼면서 애지중지 사용하던 후지츠 노트북이었고? 진작에 버리자는 걸, 내가 아껴 아껴 쓰고 있었다. 꽤 팔린 책 대부분이 살살 달래가며 쓰던 그 고물 노트북에서 나왔다.

 

어쨌든 그 명함 사건 이후로, 나는 명함을 덜 돌리게 되었다. 한 때는 나도 전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명함 뿌리는 게 일인 직업 협상가이기도 했다. 엄청나게 돌렸다. 그 명함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요즘 가끔 만나는 사람들 중에서, 10년 전의 내 명함을 가지고 와서 그 시절의 기억을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저 미안할 뿐이다. 게다가, 나는 다른 사람의 명함을 그렇게 소중하게 보관하지 못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도저히 정리하기 어려운 정도가 되었는데, 그렇다고 그냥 버리지도 못하겠다. 아내가 대청소하면서, 가끔 뿔난 얼굴로, "이거 어쩔겨?", 이렇게 한 무더기의 명함을 가지고 온다.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명함에는 영혼 한 조각이 담기는 것 같다. 그냥 아무런 종이가 아니다. 그 한 장이 나 같은 경우에는 경찰서에서 좀 오세요, 이런 역할을 했다. 어떤 사람에게는 큰 비즈니스의 기회가 되거나, 출세의 기회가 되기도 했을 것이다. 그리고 돌고 돌아서 사기꾼 손에서 '호구 리스트' 작성에 기여했을 수도 있다. 어느 편이든, 그냥 종이 쪼가리 하나는 아니다.

 

명함은 생각보다 많은 정보를 준다. 이름을 한글로만 쓴 사람은 주로 국내에서 움직이는 사람이다. 이름을 한문으로만 쓴 사람은, 외국 활동이 중요하지만 젊은 사람들은 만날 일이 없는 사람이다. 한문 이름은 중국과 일본에서 유용하다. 그렇지만 요즘 청년들은 잘 못 읽어서 불편해한다. 상대방을 세밀하게 만나야 하는 사람은 그깟 명함 한 장으로 불쾌감을 주지 않기 위해서 가능하면 편안하게 볼 수 있게 한다. 명함에 '청소년 선도위'를 비롯해서 이것저것 경력이나 하는 일을 잔뜩 단 명함이 있다. 초짜 변호사이거나 그만큼 자신이 절박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정말로 중요한 일을 할 때에는 결국 단촐하게 명함을 쓴 사람에게 연락하게 된다. 대통령, 국회의장, 장관, 다 명함이 단촐하다. 내가 본 명함 중에서 가장 멋졌던 것은, 미국 유명대학 교수였는데, 그걸 그만두고 정부 협상에 자문하러 다니는 경제학자였다. 말년을 그냥 학교에 있기 보다는 정부에 좀 기여를 하고, 덤으로 전세계 여행도 하고, 그렇게 자신을 설명했다. 실무적이고 기술적인 일에서 나도 도움을 많이 받았다. 미국 국무성만 표기되어 있고, 직함에 Senior Economist라고만 적혀 있었다. 그가 학회를 비롯해서 자신의 업적을 쓰려면 A4 한 장이 넘었을 것이다. 내가 실무에서 만난 사람 중 가장 똑똑한 할아버지였다. 미국 국무성 자문 경제학자, 폼은 안 날지 모르지만 아는 것만큼은 진짜 최고였다.

 

3.

명함에 준 사람의 영혼이 한 조각 실려 있을지 아닐지, 진실은 아직도 모르겠다. 그러나 명함이 요물인 것은 맞다. 특히 50이 넘은 사람들에게 명함은 때때로 진짜 요물이 된다. 요물에게 정신이 홀려서 자신의 전 재산은 물론이고 미래의 재산도 절반을 차압 당한 사람들을 몇 명 안다. 흔한 '바지사장' 같은 경우는 기본이다. 예전에는 장부에 이름 올리는 등기이사들이 회사에서 대출할 때 연대보증을 서기 때문에, 왕창 망한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50이 되어서 자기 조직에서 나간 사람들이 근사한 명함을 위해서 너무 많은 희생을 하게 되었다. 너무 이런 피해자들이 많아지니까 제도 개선이 좀 생기기는 했다. 연대 보증도 완화되었고, 월급도 기본 생활은 가능하게 절반 이상은 차압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렇게 차압이 된 사람 중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은 차관까지 가는 건 보았다. 그야말로 인간 승리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학문적 양심을 팔았다.

 

조금 더 근사한 명함을 위해서 재단을 만드는 사람도 가끔은 보았다. 그냥 가진 돈 가지고 편하게 살아도 되는데, 그걸 또 쪼개서 '이사장' 같은 직함을 위해서 재단을 만드는 성가신 일을 하기도 한다. 한국에서 '성실하게' 살아온 50대는 명함이 없는 상황을 참지 못한다. 그래서 뭐라도 한다. 그리고 점점 더 자신의 삶을 불편하게 만든다. 명함이 요물은 요물이다. 종이와 잉크, 명함은 평등하다. 그러나 명함을 든 사람들끼리는 여전히 평등하지 않다. 더 든든한 명함을 가지고 싶어하고, 더 쎈 명함을 가지고 싶어한다. 50이 되면 명함이 진짜로 요물로서의 자기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정년이 65세까지 보장된 교수가 아닌 이상, 대부분의 조직에 있는 사람들은 50이 되면 쓰던 명함을 내려놓게 되는 순간이 온다. 열심히 살았다, 그렇게 편안한 마음을 먹는 사람은 득도한 사람이다. 대부분, 그 때부터 다음 명함을 위해서 초조해지기 시작한다. 손바닥보다도 작은 종이 쪼가리 한 장이 거대한 요물로, 심지어는 꿈자리까지 찾아오게 된다. 열심히 살았던 표준적 50대 남성들은 여기서 대부분 무너진다. 영혼 한 조각이 아니라 영혼이 뭉터기로 명함에게 빨려 들어간다.

 

여의도는 4년 내내 거대한 명함 쟁탈전이 벌어지는 곳이다. 별 의미는 없지만 명함은 팔 수 있는 자리가 수 천 개는 된다. 저강도 전쟁이 4년간 벌어지다가 고강도 전쟁이 몇 달간 벌어진다. 살아남은 사람의 영광 뒤로 수 천명이 상처 투성이로 남는다. 청와대는 정년 없이 명함을 발행할 수 있는 사람을 임명하는 권한이 있다. 5년에 한 번 목숨을 걸고, 나머지 5년 동안 줄을 선다. 명함이 요물 아니라고? 20대에 받는 첫 명함과 50대의 마지막 명함의 무게를 생각해보자. 명함 한 장을 위해서 목숨도 걸 수 있는 나이가 50대다.

 

좋든 싫든, 50이 되는 순간, 지금 쓰는 명함을 내려놓는 순간을 준비하기 시작해야 한다. 이 사회가 그렇게 설계되어 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노회한 사냥꾼들 사이의 마지막 전투로 끌려들어가게 된다. 민주투사? 죽어라고 노력하면서 스스로 엄청나게 성숙하게 된 사람이 아니라면, 100%의 확률로 명함 투사로 변하게 된다.

 

명함에 관해서 내가 들은 얘기 중에서 가장 슬픈 얘기는 한국의 보수들이 해준 얘기다.

 

"책이요? 명함 대신 쓰는 거 아니예요?"

 

한국의 돈과 학계는 언제나 그리고 여전히 보수주의자들이 쥐고 있다. 그들이 나에게 진짜로 솔직하게 해 준 얘기는, 명함 대신 돌리는 게 책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5년 후, 한국의 보수 정권은 무너졌다. 책 앞에 한 줄 쓰고 명함 대신 돌린다고 생각하는 보수적 학자들을 앞세우고 통치하기에, 한국은 이미 너무 커졌고 복잡해졌다. 명함 대신 돌리는 게 책이라는 얘기를 듣고, 나는 보수 정권이 더 이상 버티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명함이 한국에서 얼마나 중요할까? 박근혜 탄핵을 최종적으로 결정한 것은 헌법재판소다. 대통령 탄핵, 과외 금지, 요 정도 사안들이 헌재까지 간다. 누가 명함을 돌릴 것인가, 이 질문이 헌재까지 갔다. 국회의원 예비후보의 배우자는 명함을 돌릴 수 있는데, 이게 배우자 없는 사람에게는 불리하다는 것이다. 결국 명함 사안은 헌법재판소까지 갔다.

 

50, 결국은 자기 명함을 돌아보는 순간이 온다. 나는 누구인가, 헤겔 등 독일 성철학파가 했던 질문은 한국에서는 아예 필요 없는 질문이다. 지금 헤겔이나 칸트가 우리의 50대에게 그 질문을 했다면, 묵묵히 자신의 명함을 꺼내서 그에게 내밀 것이다. 뭐 이런 걸 질문이라고 하시느냐는 표정을 지을 것이다. 나는 명함인가, 명함이 나인가? 내 명함이 나는 아니다. 내가 누구냐고 묻는 데 명함을 들이미는 것은 상대방의 지성을 모독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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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사기 2쇄 찍는답니다. 정말로 많은 분들이 도와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다시. 사회적 경제 책이 얼마 전에 3쇄 들어갔구요. 예전에 10쇄는 간단히 넘어가던 시절에는, 쇄 넘어가는 줄도 잘 몰랐고, 그런가보다 했었습니다. 옛날 얘기입니다. 요즘은 책이 진짜로 잘 안 팔립니다. 쇄 넘어갈 때마다 얼마나 많은 분들이 도와주고 계신 건가, 요즘에야 좀 느껴집니다. 역시 좀 어려워져야 고개를 숙이는... 출판사에서 대학생 티타임도 하면 좋겠다고 해서, 그것도 고맙습니다, 말만 그런 게 아니라 마음도 그렇더군요.

한동안 사람들이 한국에서 처음 등장한 사회과학 전업작가라고 했습니다. 요즘은 여기에 더해서, 출판사 사람들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등장했던'이라는 수식어를 더 달아줍니다. 출판계가 다 어렵지만, 사회과학은 초죽음이라고 할 정도로 어렵습니다. 저도 이제 그만 써야겠다고 몇 번 생각을 했는데, 사회과학 md를 비롯한 요 쪽 분야 사람들이, 그래도 명맥이라도 이어갈 수 있게 해주시라, 요렇게 가끔 부탁들을.

저는 아직도 한국의 사회과학 르네상스를 꿈꾸고 있습니다. 좋은 시대를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가 꼭 한 번 거쳐가야 하는 관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간만에 날이 풀려 볕이 따사합니다. 우리 사회에도 그런 따사한 볕이 드는 날이 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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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를 만난 적은 없다. 그러나 그의 시와 글을 좋아하기는 했다. 대학에들어가자마자 연세문학회에 갔었다. 1시간 정도 앉아서 이런저런 얘기를 들었는데, 그 때 바로 알았다. 내가 여기서 이 사람들과 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언덕길을 내려오고 그 길로 바로 가입한 동아리가 국악반이었다. 시를 쓰더라도 연세문학회에서 쓸 것 같지는 않았고, 어차피 시도 안 쓸 거, 악기를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기형도는 만나지 못했지만, 기형도가 만났던 장정일은 만났다. '짧은 여행의 기록'에 시인들만 있는 것 같은 이상한 도시의 천재 소년 장정일... 그랬드랬나보다. 그리고 나는 장정일을 선배라고 부른다. 서로 동선을 맞추다 보니 연세대학교 학생회관 벤치에서 만났다. 그리고는 드립다, 술만 마셨다.

세 번째 술자리였나. 그 때 선배로서 장정일이 그런 말을 했다. 책을 10년쯤 쓰면 밥은 먹고 살게 될 거라고. 듣자마자 나는 그 말이 맞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가 예로 들었던 게 신경숙이었다. 이청준의 글을 필사하면서 습작 시절을 보냈던 신경숙의 얘기는 워낙 유명한 얘기다. 그 때 나는 괜히 토를 달았다. 신경숙이 다행히 이청준을 필사 대상으로 했으니까 그렇게 되었지, 만약 요즘이라서 김훈을 필사했으면 밥 먹고 살기 어렵지 않았을까요? 20대, 김훈의 글을 아주 좋아했던 시절이 나에게도 있었다. 그러나 김훈의 신문기사를 필사하지는 않았다. 유학 시절, 한국의 일간지를 배달받기에는 너무 비쌌다. 김훈의 글을 보기 위해서 당시 시사저널을 구독했다. 그렇지만 나라도 이청준과 김훈 중에서 필사 대상을 선택하라면 당연히 이청준을 골랐을 것 같다.

나도 책을 쓰기 시작한지 10년은 벌써 넘어갔다. 10년간 책을 쓰면 먹고는 살게 된다는 말은, 내 경우는 맞았던 것 같다. 물론 아내의 경차를 빌려타고 다니기는 하지만, 그것도 감지덕지라고 생각한다. 누군가에게 손 벌리지 않고, 아침에 일어나 아이들 세 끼 밥 먹일 걱정하지 않고 산다. 인류는 100년 전만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날 하루 세 끼를 뭐 먹고 사나 고민했었다. 우리가 잠시 잊고 있을 뿐이다.

20대에 경제인류학 공부를 생각보다 많이 했다. 파리 10대학에서 내가 속해있던 연구소 이름이 경제인류학 연구소였다. 나는 기준이 하루에 세 끼 밥 먹을 걱정을 하는가, 안 하는가, 그렇다. 나머지는? 프레스티지, 허영에 관한 이야기다. 선진국이라고 해도 배고픔으로부터 벗어난 게 그렇게 오래 되지 않고, 우리는 더더욱 그렇다. 지금 선진국이라고 하는 스위스도 20세기 전반은 굶어죽을 정도로 온 국민이 가난했던 나라다.

문학은 뭐고, 예술은 뭐고. 그런 생각을 온 국민이 해보게 되는 것 같다. 아내는 오태석 희곡상을 탔다. 내가 늘 자랑스러워하는 일이다. 아내가 아침에 재수없다는 얘기를 했다. 오태석도 성희롱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언론에서 들어보지 못한 얘기들을 아내에게 들었다.

글에 대한 내 태도는 언제나 같다. 밥이나 먹고 살면 고마운 거다... 친한 친구들은 이제 책 좀 그만 쓰고, 좀 편하게 즐기면서 살라고 한다. 생각만큼 나는 책을 쓰면서 고통스럽지는 않은데, 녀석들은 무슨 판타지가 있는지, 쥐어짜면서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내가 보내는 줄 안다. 고통스러운 것은, 10분만 더 자고 싶은데, 큰 애가 내 얼굴을 쥐어짜고, 둘째가 "아빠 일어나", 그러면서 내 배 위로 올라가 뛰는 것이다. 진지하게 묻는다. 책 안 쓰고, 그냥 편하게 살면 안돼? 지금 나는 태어나서 처음인 것처럼 그렇게 편하게 산다. 이보다 더 편한 삶이 있을까?

사회학 하는 친구들은 내가 아주 나쁜 사례라서 많은 대학원생들을 망치고 있다고 한다. 책을 써도 먹고 살 수 있다는 되지도 않는 환상을 준단다나... 그 환상을 빨리 깨달라고, 진짜로 진지하게 부탁하기도 한다.

책을 10년을 쓰면 먹고는 산다, 장정일의 얘기는 맞는 것 같다. 한국을 발칵뒤집은 최영미의 시 '괴물'이 7만원짜리라고 알고 있다. 최영미쯤 되는데, 원고료가 그렇게 밖에 안돼? 뒤집으면, 그 7만원짜리 시가 한국을 바꾼다. 가성비, 최고다. 예전에 소형의 날치라는 이름의 엑소세가 항공모함을 잡은 적이 있다. 프랑스 엔지니어들이 엑소세의 guidage를 해줬는지 안해줬는지, 외교전으로까지 번진 적이 있다. 시는 엑소세 같은 것 아닌가? 그렇다면 내가 쓰는 글은? 항공모함 갑판 위에 던져져서 그냥 깨진 코카콜라 병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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