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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01.31 50대 에세이, 작업 메모 1
  2. 2018.01.31 [초고] 우리는 지는 법이 없습니다!

 

(나의 50대는 요렇게 생긴 차와 함께 시작되었다...)

 

 

1.

50대 에세이 구상을 시작한 것은 2년 정도 되는 것 같다. 지금까지 20대나 30대에게 말을 거는 책들은 꽤 썼다. 그렇지만 내 또래 친구들에게 하는 얘기를 쓴 적은 아직 없다. 50이라는 나이를 맞고 나서, 주변 친구들에게 하고 싶었던 얘기들을 한 번 해보고 싶어졌다.

 

50대는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우리 또래들이 맞게 된 아주 특수한 50대는? 그리고 앞으로 생겨날 변화들은?

 

대체적으로 이런 것들이 내가 답해보고 싶은 얘기들이다.

 

몇 가지 제목들이 있었는데, 현재로서는 '어영부영 50'가 될 가능성이 제일 많다.

 

부제는 결국 '개수작과의 결별'이 될 것 같다. 이 부제를 집어드는 데 가장 큰 어려움은... 개수작? 과연 나는 그런 위대한 결별을 했을까? 그럼 너는? 그렇게 물어보면 별로 할 말은 없다.

 

뭔가 엄청나게 큰 결심이 있어야 할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50년을 살았다면, 앞으로 평균적으로 지금까지 산 만큼, 50년을 더 살게 될 것이다.

 

무서운 일이다. 그냥 하던 대로 산다면... 무슨 의미가 있고, 무슨 재미가 있겠나 싶다.

 

2.

이번 작업에서는 전체 글은 아니더라도, 주요한 글들은 블로그에 올리려고 한다. 어차피 후반에 빈 내용들을 채워넣고, 다시 수정하는 과정까지 전부 공개하기는 어렵다. 게을러서 그렇다.

 

그렇지만 초고 상태에서 사람들의 의견도 듣고, 넣을 것 뺄 것만이 아니라, 톤이나 내용 같은 것들을 좀 수다스럽게 하고 싶어졌다.

 

어차피 우리 시대의 이야기다. 좀 수다스러워도 좋을 것 같다.

 

블로그에 쓴 글을 책으로 옮기는 것 보다는, 책 초고로 쓴 글을 블로그에 올리는 것에 가까울 것 같다.

 

동아리방이나 학회실에서 속닥속닥, 복닥복닥, 원래 우리 또래들은 좀 수다스럽고 말이 많았다. 87년과 시대의 아픔을 만나면서 깊은 얘기는 아예 하지 않거나, 술 마셔야 얘기하는 습관이 들었던 것인지도.

 

3.

과거의 얘기를 아예 안 할 수는 없지만, 에세이집 전체의 톤은 미래에 대한 얘기를 하려고 한다. 안 그러면 뭐하러 골 아프게 이런 글들을 쓸 필요가 있겠나.

 

나도 오지 않은 미래가 궁금하고, 두렵기도 하다. 그러나 요즘 얘기하는 4차 산업혁명 어쩌구, 그런 소리는 완전히 개소리라고 생각한다. 삶은 기술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건 미래에 대한 얘기는 아니다.

 

존나, 열심히 살아. 안 그러면 너 뒤져. 그리고 니 자식도 뒤져.

 

이런 개소리들은 19세기부터 찬란했다.

 

내가 생각하는 미래에 대한 얘기는 좀 다르다. 좀 더 사회적이고, 좀 더 정치적인 미래에 대한 고민과 불안, 그런 얘기를 하고 싶다.

 

50이 되어서도 원초적인 욕망을 아직 내려놓지 못했거나, 어린 시절의 공포감을 떨구지 못했다면...

 

100년 전만 해도, 이젠 삶을 내려놓고, 손자 보는 재미로 나머지 시간을 버틸 나이다. 의미 없는 것들은 내려놓을 나이도 되었다.

 

4.

하여간 언제까지 쓸지, 언제 나올지, 그런 건 아직 모른다.

 

메모 형식으로 준비한 것들이 좀 있기는 한데, 쓰다 보면 구성과 흐름이 생기기 때문에, 일단 흐름 가는 대로 맡겨놓을 생각이다.

 

하여간 초고는 3월 내에 끝내는 게 목표다. 그렇지만 그건 일단 세워놓은 기계적인 목표고. 중간에 뭔 일이 생기고, 뭔 변덕이 생겨날지, 알게 뭐냐다.

 

한 가지 생각은 있다.

 

이번에는 끝까지 가 볼 생각이다.

 

여러 가지를 고려하면서 얘기를 중간에 세우거나, 멈추거나, 그렇게는 안 할 생각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나도 이 질문에 답해야 하기 때문이다.

 

근혜는 벌써 내려갔고, 명박도 감옥 갈 것 같다. 그럼 세상 좋아질까? 그 다음에 내 삶은?

 

이런 얘기를 나도 고민해보려고 한다. 삶은 늘 그렇게 구질구질하다. 이번에는 구질구질한 얘기를, 가능하면 추접스럽지 않게 끌고 가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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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많은 시간을 보냈는데도, 이재영과 같이 찍은 사진이 하나도 없다...)

 

1.

전라북도 군산 바로 옆에 새만금이라고 부르는 바다가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는 있거나 말거나, 그럴 것이다. 나는 그곳에서 내 삶을 배웠고, 내 삶이 형성되었다. 새만금 방조제 위에 활동가들이 올라갔고, 그 위로 물대포를 쏜 날이 있었다. 그 때 삭발하고 농성하다가 물대포를 맞고 바다에 빠진 사람들이 몇 명 있다. 지금은 국회의원이 된 남인순의 남편이 맨 처음 빠졌다. 그 다음에 빠진 여성 활동가가 있다. 그 다음 해에 나는 그녀와 결혼하였다. 양 쪽 집에서 다 반대가 심해서, 잠시 동거생활을 하기도 했다. 어느 날 밤, 집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 열어."

 

조그만 여행용 캐리어 하나 들고 막 집에서 나온 그녀는 그날부터 나와 같이 살았다.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나는 그녀에게 꼼짝도 못한다. 동거에서 결혼까지 그리고 지금의 삶까지, 내가 결정한 것이 그렇게 많지는 않다. 삭발하고 새만금 반대농성하던 그녀는 아름다운 것을 넘어, 진짜로 강하고 잘 나 보였다.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새만금에 걸었다. 삼보일배 행렬이 서울로 들어올 때, 같이 참여한 유일한 유명인사가 당시 민주노동당 대표였던 권영길이었다. 얼마 못하고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아쉽지만, 거기까지. 그 일을 주선한 민주노동당 파트너가 이재영 정책국장이었다. 그 때 처음 만났다.

 

그와 나 사이에 오고 간 메일들은 실수투성이였고, 배꼽을 넘어 사람들 영혼을 쏙 빼놓은 사연들이 많았다. 이재영은 삼보일배를 '일보삼배'라고 썼는데, 그나 나나, 이 소소한 실수를 알아채지 못했다. 그 메일 그대로 삼보일배 활동가들에게 보냈는데, 난리가 났다.

 

"아니, 삼보일배가 아니라 일보삼배를 해야 권영길이 나온다는 거야?"

 

그들은 이 말을 이렇게 이해했다. 세 번 걸어가고 한 번 절하는 삼보일배도 힘들어 죽겠는데, 민주노동당은 이걸 더 높여서, 한 번 걷고 세 번 절하는 일보삼배를 기대하고 있다... 밤중에 급하게 전화가 왔다.

 

", 진짜로 일보삼배를 해야 하는 거야? 여기 스님들, 신부님들, 다 죽어!"

 

작은 실수 때문에 현장에서는 긴 토론을 했다. 그리고 일보삼배는 어렵겠다고 이쪽에 양해를 구하기로, 진짜 큰 맘 먹고 전화한 것이다. 사람들이 너무 착했다. 

 

2.

이재영은 내가 하던 일을 많이 도왔고, 나도 이재영이 하던 일을 많이 돕게 되었다. 일보삼배 건 이후로도, 이재영의 손에 들어가면 실수든 기획이든, 심각한 일들이 왁자지껄한 코믹 에피소드로 바뀌었다. 그 이후로 몇 년간, 거의 대부분의 일을 이재영과 같이 했다. 여행도 많이 다녔다. 내가 송파구 살던 시절이었는데, 이재영네 집은 바로 옆 동네의 임대주택이었다. 당시 민주노동당 당사가 MB가 집권할 때부터 쓰던 바로 그 한나라당 당사였다. 지금은 한나라당 당사가 된 그 건물 사무실 근처에서도 술 마시고, 집 근처에서도 술 마시고, 엄청나게 마셨다.

 

우리는 결혼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이재영도 연애를 시작했다. 결국 둘 다 결혼을 했다. 송파구에 살다가, 강북으로 이사를 가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서로 얘기를 했다. 그래서 같이 송파구를 떠나서 서로 멀지 않은 동네로 이사를 갔다. 아이도 낳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얘기를 했다. 이재영은 딸과 아들을 낳았다. 우리 집은 아이가 늦게 태어났다. 아들 둘을 낳았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나나 이재영이나, 삶이 거의 하나가 되다시피 했다.

 

나는 이재영의 부탁으로 민주노동당 당원이 되었다. 그리고 같이 2004년 총선을 준비했다. 그 때부터 몇 년간이 이재영과 그를 후배들이 정말로 꽃처럼 아름답던 시절이었다. 그들은 정말로 꽃처럼 아름다웠다. 스웨덴의 사민주의를 이상형처럼 생각했다. 나는 스웨덴이 정답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꿈은 정말로 별처럼 빛났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스웨덴이 만든 압솔류트 보드카를 사 주는 일 정도였다. 나는 스웨덴에 가 본 적도 없고, 그들만큼 소소하게 알지는 못했다.

 

그 시절에 우리는 재밌는 개념들을 많이 만들거나 도입했다. 탈핵이라는 말을 그 때 처음 썼다. 그 전까지는 반핵이라는 말을 주로 썼다. 시민단체는 반대만 해도 되지만 실제로 국회의원을 배출하는 공당에서는 반대만으로 안되고, 그 다음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탈핵이라는 용어를 썼고, 중간 위기 때 버퍼로 사용할 LNG 발전, 그게 내가 만들었던 기본안이었다. 환경성 질환이라는 용어도 그 공약집에서 만들었다. 그 전에는 공해병이라고 불렀는데, 일본 느낌도 많이 나고 환경의 폐해를 너무 좁게 해석하게 되는 문제가 있었다. 몇 년 후 환경부에서 이 용어를 공식적으로 썼고, 관련된 기구도 만들었다. 미세먼지 문제도 그 때 많이 논의했었다. 그런 이유로, 네 첫 책이 미세먼지에 관한 책이 되었다. 결국 그 얘기를 가지고 저자로 데뷔하게 되었다.

 

내가 새로 이사간 집은 마당이 있는 전세집이었다. 지금만큼 유명해지기 전의 노회찬과 이재영과 그 마당에서 삼겹살을 구워먹은 날이 있다. '불판'으로 약간 유명해진 노회찬이 그 날은 고기 굽는 걸 담당했다. 정말 잘 구웠다. 어쩌면 내 삶에서 그 날이 가장 행복하고 화사한 날로 기억될지도 모르겠다. 스필버그의 영화 <에이아이>에서 소년 로봇 데이빗은 단 하루, 엄마와 하루를 같이 지내는 선택을 한다. 나도 내 생의 단 하루를 고르라면, 그 날을 고를지도 모르겠다.

 

한국의 진보정당이 초창기 시절에 주유소가 보이는 작은 사무실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 시절 공식적인 상근자는 노회찬과 이재영 둘이었다.

 

3.

2004년 총선에서 딱 노회찬까지 국회의원이 된다. 그리고 한동안의 평온한 시기가 지난 후, 나중에 민주노동당 분당으로 가고, 결국 몇 번에 걸친 분당으로 치닫게 되는 바로 그 사건이 시작된다. 이재영은 당 정책국장에서 해임된다. 그는 더 이상 당내 주류가 아니었다.

 

이제는 이재영 먹여 살리는 일이 당장의 시급한 일이 되었다. 이재영은 레디앙이라는 인터넷 신문의 기자가 되었고, 나는 레디앙에서 책을 냈다. 그렇게 같이 준비한 책이 <88만원 세대>였다. 원래는 좀 더 복잡한 계획이 었었는데, 이재영의 월급이 급하게 되면서 나도 급작스럽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책을 준비하자는 첫 얘기를 이재영과 했는데, 결국 책의 최종 편집도 그가 하게 되었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책은 정말 잘 팔렸고, 이재영이 레디앙에서 월급 받는 데 문제가 없게 되었다. 그는 매 주 여러 인사들을 만나면서 인터뷰 기사를 썼고, 나는 그와 나누었던 얘기들을 계속 책으로 냈다.

 

한동안 이재영은 방이동에서 여의도까지 자전거로 출퇴근을 했다. 그 때는 술 한 번 마시는 게 진짜 거창한 행사였다. 일단 여의도까지 차를 몰고 가서, 왜건형 차 뒷트렁크에 자전거를 쑤셔 넣었다. 그리고 그의 집에 가서 자전거를 내려놓고, 다시 우리 집에 와서 차를 주차를 한다. 술 먹는 준비 작업까지 최소 두 시간은 걸리지만, 그 불편 정도는 돈이 없는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이재영은 거의 돈이 없었고, 나도 늘 돈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술은 너무 먹고 싶은데, 둘 다 돈이 없었다. 그렇다고 돈 있는 누군가를 부르는 것은 창피한 일이었고. 이재영이 잠시 기다려보라고 하고 은행으로 갔다. 은행에서 나오면서 진짜로 해사하게 밝은 표정으로 주먹을 쥐고 말했다.

 

"우리는 지는 법이 없지~!"

 

민주노총에서 그가 얼마 전에 했던 강연료 20만원이 막 입금되었다. 석촌호수 근처에서 진짜 재밌게 놀았다. 그 후로 "우리는 지는 법이 없습니다!", 이 말이 나와 이재영이 가장 좋아하는 말이 되었다. 책에 사인할 때, 이 글귀를 자주 쓴다. 그 시절, 나와 이재영은 지는 것을 상상하지 못했다. 아니, 그런 상상을 싫어했다.

 

그 시절에 이재영과 했던 약속이 있었다. 우리가 아주 나이를 먹으면 무엇을 할까, 그런 얘기를 했었다. 우리나라에서 사민주의 정당도 자리를 잡고, 녹색당도 자리를 잡으면, 그 때는 정말 아무 고민 없이 공산당을 만들면 좋겠다는 얘기들을 서로 했었다. 조선 공산당 말고, 그냥 제도화되어서 약간씩 부패도 한 그런 유럽식 공산당, 그런 게 있으면 좋을 것 같다. 그게 그와 했던 거의 유일한 약속이었다. 유럽에서 공산당은 그렇게 참신하지도 않고, 어느 정도는 기득권이기도 하다. 그 정도 정당 하나는 언젠가 한국에도 있으면 좋지 않을까?

 

4.

이재영은 공식적으로는 국졸이다. 중학교, 고등학교를 전부 검정고시로 나왔다. 대학은 서울대에 입학은 했지만, 운동 하느라고 졸업은 못했다. 최종 학력이 인정되지 않으면 중간 학력도 인정되지 않아서 자신은 국졸이라는 것이 이재영의 주장이었다. 물론 아무도 확인하지 못한 얘기다.

 

원래도 학력, 학벌, 그런 얘기를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다. 이재영과 지내면서, 진짜로 나도 학교, 학벌, 학번, 나이, 이런 거 전혀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그런 거 물어보지도 않고,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그 대신에 어떻게 하면 웃길까, 어떻게 하면 웃을까, 그런 걸 더 많이 고민하게 되었다. 소수파에서도 소수파, 마이너에서도 마이너, 그렇게 살았다. 환경운동은 좌파 내에서도 소수다. 진짜로 명랑한 삶은 이재영에게서 보았다.

 

이재영은 인민노련 출신이다. 말만 그래서 가끔 '인민'으로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인천 지역을 의미한다. 워낙 이재영과 그의 친구들과 같이 다녔더니, 나중에는 나도 인민노련 계열로 분류되었다. 인천에 있던 공돌이 이재영이 울산 지역에 작전을 하기 위해서 처음 경주로 내려간 얘기는 감동적이다. 그 얘기를 가지고 <이상한 나라의 인민노련>이라는 책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표지에는 이재영과 노회찬의 얼굴을 넣고, 버스 광고를 꼭 하고 싶었다. 진짜로 노회찬 얼굴이 버스에 달려서 질주하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 책은 쓸 수 없게 되었다. 그 비밀조직의 은밀한 사연들을 얘기해줄 사람이 없다.

 

2012년 대선을 며칠 앞두고, 이재영은 죽었다. 암이었다. 그 해 여름에 큰 아이가 태어났다. 우리 집 큰 애는 아빠의 친구 이재영을 한 번도 보지 못하게 되었다. <이상한 나라의 인민노련>의 주인공은 너무 일찍 죽었다. 이재영이 죽으면서 나는 공산당을 만들 필요가 없어졌다. 이제 나는 아무에게도 지켜야 할 약속이 남지 않게 되었다. 그는 MB 시대를 버텨내지 못했다.

 

50이라는 나이는 그런 나이다. 정말로 친했던 친구나 지인 한 두명은 이미 세상을 떠난 이후, 그게 청춘의 꽃 같은 삶과 다른 점 아닐까? 내 친구들은 참 많이도 죽었다. 민주노동당에 재영이가 두 명이 있었다. 정책을 맡았던 이재영, 조직을 맡았던 오재영, 나는 두 명의 재영이와 다 친했다. 오재영은 다음 주에 술 마시기로 한 전주에 과로로 죽었다. 광우병 싸움으로 유명해진 수의사 박상표는 자살했다. 꽃 같고 아름다웠던 친구들이 50이라는 나이를 보지 못하고 죽었다. 우리끼리 이제 보이면, 너무나 친했던 친구나 지인이 한 두 명 죽는 건 술자리 화제거리 축에 들어가지도 못한다. 그게 20대나 30대와 우리가 다른 점이다. 이젠 죽음에 좀 더 익숙해진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의 죽음도 준비해가기 시작한다. 이젠 남의 일이 아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붉은 돼지>에 나오는 대사가 진짜로 이젠 남의 일이 아니다.

 

"좋은 놈들은 벌써 다 죽었어."

 

이재영의 죽음과 함께, 내가 누렸던 명랑의 시대도 끝이 났다. 그리고 "우리는 지는 법이 없습니다!", 그 한 문장만 가슴에 남았다. 그와 내가 같이 만든 문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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