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생난리가 한 번 났었다. 옥토넛 탐험선 H가 있는데, 큰 애 것이다. 둘째 생일 때 큰 옥토넛 탐험선 A를 사주면서, 아주 작은 걸 큰 애를 같이 사줬다. 오늘따라, 둘째가 그걸 들고 놀기 시작하니까 늘 양보만 하던 큰 애가 부아가 났다.


"내가 먼저 잡았어, 내가 먼저야."


둘째는 이러고 울고 있다.


"내끄야, 내끄야."


큰 애도 이러고 울고 있다.


"둘 다 이빨 닦고 와, 그 때까지 탐사선은 아빠가."


옥토넛 탐사선을 뺏었다. 이 때부터 둘이 대성통곡을 시작했다. 큰 애는 큰 애대로, 작은 애는 작은 애대로 서러움이 터졌는지, 울음보들이 제대로 터졌다.


양치질하고, 옷 갈아입히다 보니, 옥토넛 탐사선은 어느덧 까먹었다. 그래서 마무리되었을까?


어린이집 갈려고 나가는데, 둘째가 엄마한테 "아빠, 무서웠어", 일러준다. 물론 나도 마음 아프다. 둘째는 어리지만 뒷끝 있는 스타일이다. 아침마다 실강이 한 번씩 하지만, 오늘은 특히 심했다. 어마어마하게 울어들 댔다. 내일 아침이 걱정된다.


_______


그리고 저녁



어제 영화 <꾼> 시사회에 갔다가 이벤트 풍선을 받아왔다. 손에 들어간다. 분명히 두 개를 받아왔는데, 양손에 낀다고 저녁 먹고 나서 또 한바탕 사건이 벌어졌다. 결국에는 둘째 애 비행기 놀이, 헬기 놀이, 착륙, 이착륙 그리고 고장, 들고 30분 동안 빙빙 돌았다. 나중에는 큰 애까지 비행기 탄다고 난리를 쳐서, 비행 기지 고장... 그리고야 끝이 났다. 온몸이 안 아픈 데가 없다.


방법이 없다. 그냥 많이 같이 놀아주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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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에세이, 작업을 시작하며

 

1.

시간이라는 게 도대체 뭘까? 내 삶은 시간이라는 측면에서는 온통 뒤죽박죽이다. 너무 빠른 것과 너무 늦은 것, 그런 것들이 혼재되어 있다. 몇 개의 최연소 기록을 가지고는 있는데, 별 의미는 없다. 하여간 20대 박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유학 시절에는 77학번들과 공부를 같이 했다. 그 사람들이 오랫동안 동료였다. 국내에서는 82학번들이 데뷔하던 시절에 같이 데뷔했다. 집도 엄청 빨리 샀다. 결혼하고 9년 만에 아이를 낳았다. 친구 자식들이 대학을 갔거나 가려고 할 때, 우리 집 아이들은 4, 6, 그러다 보니 아이들 친구 때문에 만나는 부모들은 이제 한참 젊은 부모들이다.

 

너무 빠르거나, 너무 늦거나, 살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그렇게 살다 보니, 나이와 시간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예민해진다. 원래 예민했던 게 아니라, 그렇게 된 것 같다. 나이를 기준으로 생각해보는 습관이 생기다 보니 '88만원 세대' 같은 책을 쓰게 된 것도 아주 우연한 일은 아니다. 소피스트의 시대에 "흐르는 물에는 다시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이 있다. 대학교 국민윤리 시간에 처음 들은 말인데, 친구들은 그 말을 다 잊어버렸지만 나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말 중의 하나가 되었다. 내가 들어간 그 물은, 다시는 아무도 들어가지 못한다. 그리고 나도 다시 들어갈 수 없다.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이란, 그런 것이다.

 

그 시간의 문턱을 넘으며, 매번 기뻐하고, 좌절하고, 놀라움을 겪는다. 그리고 금방 잊어버린다. 지나간 것은, 그런 것이다.

 

2.

아주 어렸을 적부터, 나는 꿈과 희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고 싶은 것도 없고, 되고 싶은 것도 없었다. 아주 가끔은, 정말로 간절히 원한 적이 있기는 하다. 첫사랑 때 한 번, 성신여대 교수임용 파이널 총장면접에서 떨어질 때, 그리고 아마 한 두 번 정도 더, 간절히 원한 순간이 있기는 했다. 내가 그 시절 진심으로 원했던 것은, 단 한 가지도 이루어진 것이 없다. 더더욱 나는 간절히 원하지 않는다.

 

소망하면 이루어진다, 그런 건 믿지 않는다. 논리적으로도 믿지 않고, 정서적으로도 믿지 않는다. 그냥 하루하루를 언젠가 내 스스로를 돌이켜볼 때 너무 창피하지만 않을 정도로, 진짜로 면피만 하면서 살아간다. 누가 봐도 창피하고, 내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그런 짓은 하지 말자, 그 정도로 대충 산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50이 되는 순간, 나는 하고 싶은 것도 없고 되고 싶은 것도 없었다. 할 일도 없었으면 더더욱 좋았겠지만, 그러지는 못했다. 두 아이를 조금씩은 돌봐야 했고, 돈도 조금씩은 벌어서 생활비를 마련하기도 해야 했다. 들째는 게속 아팠다. 아이를 아주 열심히 봤고, 일은 아주 조금만 했다. 그래도 돼?

 

아주 더운 여름 날, 차를 치웠다. 10만 조금 넘은 차인데, 수동이라 팔 데도 없을 것 같고, 폐차할까 생각 중이었다. 마침 동료가 힘들어하길래, 그냥 줘버렸다. 차가 없으면, 생활이 조금 더 단촐해지고, 돈도 조금 덜 쓰게 된다. 그 정도 조정은 했다.

 

내 삶의 대부분은 하고 싶은 것도 없고, 되고 싶은 것도 없는 상태였다. 초등학교 때 미래 희망을 쓰라고 해서, 외교관이라고 썼다. 별 거 아니다. 내 짝 아버지의 직업이었을 뿐이다. 한 번도 외교관이 되고 싶었던 적은 없었다. 별로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한동안 전문 외교협상관 일을 했다. 가끔 초등학교 때 써냈던 친구 아버지 직업이 생각나기는 했다. 그 집에 미니카가 엄청나게 많았다. 살면서 남을 부러워하는 게 별로 없었는데, 마루의 서재 하나를 가득 채운 그 미니카들은 좀 부러웠다. 촌놈이, 정말 미니카라는 걸 처음 봤을 때의 그 충격이란!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하고 싶은 것도 없고, 되고 싶은 것도 없으면 큰 일 날 것처럼 주변 사람들은 펄펄 뛴다. 그렇지만 난 원래 그렇게 살았다. 되는 대로, 그 때 그 때 형편 맞춰가면서 살았다. 그래도 한 평생 사는데 아무 문제 없다. 그렇다고 내가 한국 사회가 어떻게 가야 하고,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나는 개돼지로 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어느 문화부 공무원이 우리 아이들을 개돼지라고 불렀다. 물어보니까 이래저래 한 다리 건너면 직접 알 수 있는 관계고, 나와도 아주 무관하지는 않다고 한다. 진짜로 만나서 그 말이 복잡한 총체성을 물어보고 싶었던 순간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개돼지라는 말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20, 우리가 만들고 싶었던 세상이 있었다. 우리가 권력자들이 민중을 개돼지라고 부르는 그 시대를 만든 것 아닌가? 나한테 개돼지라고 그러는 것은 상관이 없지만, 자식들도 개돼지 취급받는 사회를 그들에게 넘겨주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친구들에게 해야 할 말이 생겼다. 민중을 개돼지라고 부른 그 공무원도, 한 때는 다 우리들의 친구 같은 존재였고, 같은 건물에서 공부도 하고, 밥도 먹고 지냈었다.

 

하고 싶은 것도 없고, 되고 싶은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해야 할 말도 없는 것은 아니다. 지금부터 10, 내 친구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한 때 조선이라고 불렸던 나라의 미래가 결정될 것이다. 우리는 지금 중대한 내면적 전환점 사이에 서 있다.

 

3.

내가 마흔이 되었을 때, MB가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었다. 그렇게 나의 40대는 지나가버렸다. 나에게 아직도 젊음의 흔적이 남아있던 시절, 그 나이는 그렇게 흘러가 버렸다.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은 거의 다 봉쇄되어 있었다.

 

50대의 힘은 2012년 대선 때 많은 사람을 경악하게 하였다. 투표율 82%, 어마무시한 수치가 나왔다. 병원에 있는 사람, 등대와 같이 어쩔 수 없는 노동조건을 가진 사람들, 해외에 단기 체류 중인 사람들, 이런 사람들 빼면 다 한 것이다. 많은 기관과 연구자들이 50대에 대해서 연구하였다. 지금 국토부 장관인 김현미가 그 때 만든 연구소가 시니어 연구소다. 그도 한 때 청년 문제가 최고 중요하다고 하던 사람인데, 그 대선 이후 시니어 연구로 방향을 살짝 틀었다. 사람이 바뀐 건 아니지만, 방향이 약간 바뀌었다.

 

나도 나이를 먹었다. 이제 내가 50이 되었다. 그리고 그 해, 정권이 바뀌었다. 보수의 핵심 축이던 50, 이제 50대도 변한다. 시간이 지나면 더 많이 변해있을 것이다. 촛불집회로 임시로 열린 대선이 끝나는 날, 나는 의무감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할만큼 했다.

 

기뻤을까? 솔직히 기쁘지는 않았다. 조금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 갈 길은 멀다. 앞으로 펼쳐질 일들을 생각하면, 암담하다고 하는 게 더 솔직할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만 하기로 했다. 더 이상 시대가 던져준 의무감 때문에 내 삶을 살지는 않으려고 한다. 10년을 그렇게 살았다. 할만큼 했다. 아마 대통령 문재인도 더는 나에게 뭘 도와달라고 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럴 일도 없고. 그가 당대표 되기 이전부터, 아니 지난 대선 후보 시절부터, 몇 년간 진짜로 도울 만큼 도왔다. 이젠 나도 나의 두 아이와 아내를 돕고 싶다.

 

새 시대, 그냥 조용히 나는 내 삶을 살기로 했다. '우리', '시대', '역사', 이런 어려운 말은 더는 모르겠다. 아침에 일어나서 오늘 세 끼 밥이 입에 들어올까, 그런 고민을 하지는 않는다. 이 땅에 태어난 다른 사람도 그런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있으면 된다. 그 날이 올까? 왔으면 좋겠다. 그걸 위해서, 나는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 정도, 그렇게 살까 한다.

 

4.

초등학교, 중학교 때 아주 친했던 친구를 얼마 전 만났다. 큰 대기업에 상무가 되어 있었다. 많이 친했던 친구다. 50대라는 나이가 그런 나이다. 살아남아서 한 두 번 더 올라갈 기회가 있거나, 이제는 자기가 일하던 곳에서 돌아서야 하는 선택이 기다리는 나이다. 큰 선거 때 투표하는 것, 그리고 약간의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다 하는 것, 그것은 개인의 삶에서 아무 것도 아닌 일이다. 20년을 더 살지, 30년을 더 살지 모른다. 30년이 되면, 거의 확실하게 운전은 할 수 없는 나이가 된다. (그때쯤이면 자율운행차가 일반화될까?)

 

좋든 싫든, 뭔가 선택을 해야 하는 나이가 50대이기도 하다. 하다 보니까, 나는 그 선택을 35세에 했다. 공기업 부장도 어느 정도 연수가 차서, 슬슬 승진을 준비하기 시작해야 하는 그런 순간이었다. 팀장도 해먹을 만큼 해먹고, 그 윗자리로 가라는 압력이 슬슬 들어오기 시작했다. , 조금 더 작은 조직으로 옮겨서 팀장말고 본부장하라는 얘기인데, 그게 그렇게 매력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니지만, 나는 사직서를 내고, 남들이 요즘 엄청나게 들어가고 싶어하는 바로 그 평생 직장을 나왔다.

 

일본에서는 '드롭 아웃'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나는 그냥 학자로서의 자유를 가지고 싶어서 그만둔 것일 뿐이다. 엄청난 이유가 있거나, 위대한 결심(!)이 있거나, 그런 것은 아니다. 왠지 더 재밌는 길이 있을 것 같아서

 

그 후로도 몇 번의 큰 선택을 더 했다. 그 선택을 개인적으로 하게 된다. 그런 게 50대다. 65세까지 정년이 보장되는 정교수가 아니라면, 대부분 50대에 뭔가 선택을 하게 된다. 사회가 그렇게 설계되어 있다. 그래도 아쉽다고 난리다. 지금의 20대는 그런 선택을 아주 일부만이 할 수 있게 된다.

 

뭔가 같이 생각해보고, 고민해볼 얘기가 있을 것 같다. 친구들 만나면, 몇 명 빼고는 대부분이 남은 삶을 어떻게 살아갈까 하는 걱정이다. 친한 70대 노친네들이 좀 있다. 남은 삶을 고민하는 건 맞는데, 같이 만나면 점심 메뉴를 뭘 할까가 제일 큰 걱정이다. 지금의 50대는, 선택 받은 70대만큼 풍요롭지는 못할 것이다. 풍요의 시대는 한국에서 이미 끝났다. 그리고 그 풍요의 뒷 끝은 더 심해질 것이다.

 

5.

50대의 얘기는 과거에 대한 얘기 아니면 미래에 대한 얘기일 가능성이 높다. 지난 시절의 영광에 대한 과거 혹은 남루했던 청춘과 같은 과거의 얘기는 재미없다. 나도 모르고 너도 모르는 미래에 대한 얘기는, 서로 시간 낭비다. 안철수의 미래에 대한 얘기가 공허한 것은, 자기도 모르고 우리도 모르는 것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나는 '지금 여기'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다. 우리는 전환기다. 짧게는 10년간의 황당했던 순간, 좀 넓게 보면 전두환에서 유신까지 올라가는 종 기괴한 관행과 습관, 그런 것들에서 새로운 것들이 튀어나오는 그런 순간이다. 그런 게 바로 지금 여기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뉴라이트들의 말이 맞다면, 한국은 일본에게 배워서 자본주의를 시작했다. 원래 한국 모델은 일본이다. 그리고 일본이 모델로 했던 독일이나 네덜란드 모습들이 우리 안에 숨어 있다. 박정희가 따라했던 프랑스 모델도 유신의 흔적 속에 깊게 남아있다. 그리고는 미국 모델이다. 워낙 미국 식민지처럼 수 십년을 살았고, 모국과의 관계로 1등 국민과 2등 국민이 나누어지는 것 같은 식민지 모델로 작동했으니 말이다. 이제 한국의 기업들은 식민지 모델에서는 좀 벗어났지만, 대학은 이제 완전히 식민지 모델이다. 그리고 가끔 스웨덴 같은 북구 모델을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촛불집회 이후, 우리는 우리가 교과서다. 프랑스 혁명과 촛불집회는 다르다. 그래서 걸어가는 길도 상당히 다를 것이다. 이제는 모델도 없다. 우리가 걸어가는 대로 그게 그냥 교과서가, 우리가 하는 대로 그대로 모델이다. 이런 전환기는 80년에도 없었고, 98년에도 없었고, 2003년에는 더더욱 없었다.

 

별로 즐겁지도 않은 옛날 얘기를 과거적 방식으로 얘기하는 것은 재미없다. 잘 알지도 못하는 미래에 대해서 서로 시간 쪼개가며 얘기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애들한테 동화책 한 권 더 읽어주는 게 훨씬 더 가치 있다.

 

하나마나한 얘기는, 이제 재미없다. 지금 내가 사는 삶, 지금 우리가 겪는 일들, 그런 게 조금이라도 더 살갑고, 약간이라도 더 재미있다.

 

그 얘기를, 경차를 가지고 시작해보려고 한다. 차 살거냐 말거냐? 산다면 무슨 차를 살 거냐? 경차 가지고도 충분히 철학과 미학을 얘기할 수 있고, 인생관과 윤리를 얘기할 수 있고, 경제 얘기를 할 수 있다. 골프나 당구 혹은 바둑 가지고 하는 얘기보다는 훨씬 살갑다. 그런 얘기를 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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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책 내고 신문 인터뷰 사진. 금향 기자가 급해서 핸펀으로 그냥 찍었던 걸로 기억...)



강연에 대해서

 

1.

몇 달 동안 강연을 꽤 많이 했다.

 

몇 년 동안 사람들에게 신세만 지고, 뭔가 챙겨준 게 너무 없다. 진짜로 몇 년간 도움만 받았다. 머리 숙이는 걸 진짜로 싫어하는데, 선거 몇 번 치루면서 도와달라고 부탁만 하고 다녔다. 그런 사람들이 강연 부탁하면, 안 한다고 할 수는 없는 거. 기왕에 하는 거, 최선을 다 해서 한다고 했더니, 이래저래 너무 많이 했다. 하여간 몇 달 동안, 진찌로 강원도 빼고는 거의 전국을 다 이잡듯이 다녔던 것 같다. 제주도만 제주시, 서귀포시, 그렇게 두 번을 갔다.

 

12월이 되면, 전에 약속한 것 몇 개만 남고, 내년 봄이 오기 전까지는 강연은 안 하려고 한다. 특별히 안 하는 거라기 보다는, 원래도 안 하던 거, 그냥 안 하는 상태로.

 

2.

90년대에 내 강연은 비쌌다. 특별히 내가 비싸게 받은 건 아닌데, 그 때는 후하게들 줬다. 한 번에 보통 500만원 정도 받은 것 같고, 더 준 경우도 있다. LG였던 걸로 기억난다. 500만원 준다고 했는데, 강연 끝나고 나니까 경영진이 너무 고마웠다고 결국은 천 만원을 받았던 것 같다.

 

그 시절에, 내가 아는 지식은 우리나라 최고였다. 지금은 그 정도 아는 사람들은 가끔 있기는 한데, 그 때 환경 문제에 관해서 공장 관리인들이 알아야 할 지식으로는, 내가 최고였다. 그걸 업으로 했으면, 아마 많이 벌었을 것 같다. 그러나 나는 그 때에, 정말 넉넉하게 벌었고, 특별히 돈에 대해서 욕심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아마도 가장 비싸게 받을 뻔했던 것은, 전경련 소속 사장들이 일본으로 골프 여행을 가는데, 거기 동행해서 몇 번의 강의를 해주는 걸로

 

근데 나는 잠시 짬을 내서라도 별도로 강의를 하는 건 줄 알았는데, 골프 라운딩을 하면서 틈틈히 얘기해주는 그런 거였다.

 

안 한다고 그랬다. 골프 질 줄 모른다. 전경련에서는 그냥 골프 치는 시늉만 하면 안되느냐, 그래서 골프 안 치는 건 내 철학이라고 그랬다. 이래저래, 돈 겁나게 많이 준다고 그러기는 했는데, 일 없슈

 

그 시절에도 돈과 철학이 부딪히면, 나는 철학을 선택했다.

 

3.

아내가 나에 대해서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풀뿌리 시민단체나 생협 조직들 전국으로 찾아다니면서 5만원, 10만원짜리 강연을 하고 다니던 시절이다. 농사지은 쌀을 받아온 적도 있고, 달걀 한 판을 받은 적도 있다. 2000년대 초중반, 책 아직 발간하기 전이다.

 

내가 쓴 거의 대부분의 책들의 논리는 그 시기에 구성된 것이다. 프랑스에서 뭘 배워서개뿔, 배우기는 뭘 배워? 한국의 밑바닥 사람들이 왜 잘못된 정책으로 인하여 고생하는가, 어디서부터가 문제인가, 이런 걸 유학 가서 배우긴 어서 배우나? 정부는 알까? 개뿔, 알긴 뭘 알아총리실과 몇 년간 일했고, 실제로 근무도 했다. 알긴 뭘 알아!

 

진짜로 전국의 바닥을 돌면서, 사람들을 만나고, 내 생각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시절, 건강을 잃었다. 진짜로, 너무 무리했다.

 

아내는 '봉투돈'이라고 불렀다. 내가 봉투에 받아서 아내에게 준 돈들을, 아내는 남편이 가장 자랑스럽던 시절로 기억한다. 그 때, 5만원, 10만원, 이렇게 집에 가져간 돈 들을 아내는 꼭 통장에 넣었다. 나는 그냥 쓰라고 했는데, 아내는 꼭 통장에 입금시키고는 했다. 그렇게라도 내가 돈을 벌었다는 흔적을 남기지 않으면, 나중에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르고, 그러면 슬퍼질 것 같다고 했다.

 

아내는 그 시절의 지금도 나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자기가 아는 학자 중에서, 이렇게 밑바닥을 돌면서, 사람들의 문제를 진짜로 해결하기 위해서 고민하는 사람은 없다고 한다.

 

그 시절에 아내와 외국에서 좀 길게 체류하는 일들도 몇 번 있었다. 우리의 문제를 보고, 외국에서는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하나, 그렇게 외국에 있다가, 그런 시절이 꽤 길게 지나갔다.

 

그 고민이 어느 정도 정리되었을 때, 책을 내기 시작하고, 강연은 정리를 했다. 더 하면, 내가 죽을 것 같았다.

 

4.

지금도 가끔 강연을 하기는 하는데, 기본적으로는 책 나왔을 때 출판사에서 부탁하는 몇 번 정도다. 그 외에는 안 한다. 할 얘기는 책에 다 썼고, 그걸 일일이 다니면서 소개하는 건 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안 팔리면? 그만이다. 내 능력이 거기까지니까, 아니면 그만이다.

 

그래도 꼭 강연을 하려면?

 

이제는 명분이 필요하다. 어려운 시민단체나 정부기관에서 꼭 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일부, 지역의 사회적 경제 관련 단체나, 이 정도, 아니면 가끔 대학. 다른 데에는 나에게 명분이 없다.

 

50이 되면서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명분 없는 일은 절대로 안 하려고 한다. 길게 보니까, 남는 건 명분 밖에 없다.

 

너는 돈 안 필요해? 가끔 나에게 물어보는 사람들도 있다.

 

내가 하는 일들만으로도, 넉넉하지는 않아도 식구들 세 끼 먹고 사는 데에는 아무 문제 없다. 강연으로 가끔 받는 돈은, 없다고 생각하고 살아간다. 아주 어려웠던 잠깐을 제외하면, 지금까지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돈을 벌기 위해서 공부한 것은 아니다. 살기 위해서 가끔은 돈이 필요하니까, 나도 돈 버는 일을 조금씩은 하지만, 내가 아는 것을 사람들에게 얘기하면서 돈을 번다고 생각하면

 

서로 슬퍼지는 일이다.

 

별 큰도 아니고, 슬퍼지기만 하는 일을 왜 해?

 

5.

가끔 강연 부탁이 오면서, 이것저것, 주문을 하는 경우도 있다. 이해는 간다. 어차피 아는 건데, 약간만 수정해서 이렇게, 저렇게

 

이해는 하지만, 나는 그렇게 살지는 않는다.

 

학자는, 지식의 최전선에 사는 사람이다. 요 몇 년, 내가 그런 경험을 가끔 한다. 내가 모르면, 우리나라에서는 물어볼 데가 없는 경우가 있다. 그래야 한다. 아직까지는 그렇게 살았다.

 

지난 몇 달, 내가 나에게 했던 질문이며 동시에 다짐인 얘기가 있다.

 

앞으로 9년 후, 어떤 주제가 가장 중요한 정책적 질문이 될까? 9년 후면, 개헌 등 특별한 일이 없으면 다다음 대선 직전이다. 아직은 잘 모르겠다. 내가 나에게 하는 질문이 그거다.

 

앞의 책들을 보면, 보통 책 낸지 7~8년 정도 되면 대중적 주제가 된다. 그 순간에, 그 문제에 대해서는 내가 최첨단인 것처럼 보인다. 미세먼지의 경우는, 10년도 넘은 후 그 주제가 대중적이 되었다. KBS 했던 미세먼지 강연이 그랬다.

 

보이는 건 그렇지만, 실제로 그 문제를 뒤지고 고민하던 시점은 그 한참 전이다. 지금부터 내가 붙잡고 씨름하는 주제들이, 10년 후 한국의 주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공부한다. 아직까지는 그랬는데, 지금부터도 그럴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도, 그런 각오로 하루를 산다.

 

물론 나도 아주 나이를 먹으면, 예전에 한 것들을 반복하고, 재해석하면서 말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 순간이 오면, 애들 돌보거나, 3살짜리 애들 '기저귀 교실' 여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뭔가 있는 척, 옛날 얘기를 들척거리면서 '잘난 척', 나는 그렇게 살지 않았다. 그냥 집에서 놀고 쉬면 된다. 뭘 잘 모르고, 더 이상 최전선에 서 있지 않은데, 남들 앞에 서는 것, 학자는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복잡한 생각을 하면서, 12월부터 당분간 강연을 안 하기로 결정을 했다.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서, 조용하고 차분하게 집안에 있는 일상으로 돌아갈 필요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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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참여한 패널분들이 너무 극진하게 챙겨주셔서, 진짜로 몸둘 바를 몰랐다...)


오늘 ebs랑 교육부에서 한 광주 지역 토크콘서트에 갔다왔다. 같이 한 패널들이랑 관객들이 너무 극진히 챙겨주시는 바람에, 몸둘 바를 몰랐다. 그냥 나는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삶을 살았을 뿐인데, 그게 다른 사람들에게 의미가 되었다면 다행이고. 누군가에게 의미가 되기 위해 산 것, 사실 그런 건 아니다. 내가 아이들 영어 유치원에 안 보내는 것은, 그게 걔들에게 더 나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뿐이다. 따로 특목고에 보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좀 더 편안하게 청소년 시기를 보내는 것이 길게 삶을 행복하게 보내기에 좀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내 피를 물려 받았다면, 학원은 물론이고, 학교도 안 가겠다고 방방 거릴 것이 분명하다. 초등학교 3학년이 되자, 나는 학교 안 간다고 그냥 버텼다. 몇 달 간을 그냥 집에서 아프다고 버텼다. 학교 가자고 하면, 죽는다고 버텼다. 절대로 공부하라는 얘기나 복잡한 얘기 안 한다고 다짐을 받고서야 2학기 때에나 겨우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나의 두 아이들이 만약 나를 닮았다면, 학원은 물론이고 학교도 죽어도 안 간다고 버틸 가능성이 높다. 특목고? 학교도 자퇴한다고 하기 딱 좋을 성격이다. 대학교 4학년 때, 졸업 한 학기 남겨두고 좌퇴한다고 방방거린 적이 있었다. 그 때 내 마음도 진심이었다.

그냥 고분고분하게, 학교 보내주면 고마워하고, 학원 보내주면 더 고마워하고... 나의 유전자는 그렇지 않다.

뭔가 이유도 없이 잘난 척 하고, 뭔가 가르치려는 사람들, 꺼져... 평생을 그렇게 살았다.

나의 아이들이 그러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이, 없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편하고, 조금이라도 즐겁게...

지금도 수틀리면, 꺼져... 다 필요없어.

이렇게 살면, 돈도 많이 손해보고, 세상 살이도 많이 손해보지만, 속 마음만큼은 편하다. 그렇게 해도, 하루 세 끼 입에 밥 들어가는 데에는 아무 문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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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사기, 초고를 끝내고


 

(이 블로그가, mb 촛불집회 때 공식적으로 깃발 들고 참여했던 블로그였다...)



1.

요즘은 하루에도 몇 번, 내가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고는 한다. 그리고 나중에 돌아보면, 이 순간이 뼈저리게 그리워질 정도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네 살, 여섯 살, 두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세상에 진짜로 중요한 것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제적으로도, 좀 안정이 되었다. 지난 4년 동안, 번 돈과 쓴 돈이 딱 똔똔이었던 것 같다. 쓰는 건 고정적으로 썼는데, 번 돈이 딱 거기 맞았다. 애들 병원비가 많이 나갔고, 이래저래 애들 쓰는 돈은 고정적으로 나간다. 아마 6월이었나? 진짜 몇 년만에 처음으로 흑자가 되었다. 원래 나는 2년 생활비 밑으로 현금이 내려간 적이 없었다. 그러나 박근혜와 함께, 한동안 가진 돈을 쓰면서 버티기도 했다. 줄기만 하던 잔고가, 몇 년만에 처음으로 다시 늘어나기 시작했다. 몇 달 안되었는데, 이래저래 들어올 돈들 생각하면 내년 생활비까지는 되는 것 같다.

 

좀 이상한 일이지만, 원래 나는 집에 가만히 있을 때가 소득이 제일 높다. 아무도 안 만나고 있으면 쓰는 돈이 없고, 가만히 있을 때 돈 버는 일이 가장 많이 생기니까, 가만히 처박혀 있는 게 제일 돈 잘 버는 길이기는 하다.

 

둘째 아픈 것은 이제는 좀 안정기가 들어갔고, 요즘 몸무게도 부쩍 늘고, 키도 좀 자랐다. 큰 애가 가을 내내 감기를 달고 있기는 했는데, 걱정할 정도는 아니고. 애들 데리고 산책 다니고, 같이 운동하는 시간도 좀 더 늘렸다.

 

이렇게 살아가는 와중에, '행복하다'는 생각이 가끔 들기도 한다. 행복은 양보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행복은 포기하는 것도 아니다.

 

저녁에 간만에 불고기를 만들었다. 애들 둘이 정말 맛있다고, 싹싹 긁어먹었다. 아내도 밥 비벼서 간만에 한 공기 넘게 먹었다. 나도 두 공기 먹었다. 이런 게 행복이다.

 

오늘은 <국가의 사기> 초고를 끝낸 날이다.

 

2.

<국가의 사기>에 대한 생각을 시작한 것은, 정확히는 작년 총선 다음날이다. 그날 류승완 감독을 만났다. 사기꾼 얘기는 몇 번 같이 나눈 적이 있었는데, 하여간 뭔가 한 번 준비를 해보기로 얘기를 했다. 그 때 그는 <군함도> 크랭크인 준비 막 시작해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원래는 너무 분석 분량도 많고, 줄기 세우는 것도 까다로울 일이라서, 안하고 싶었다. 아이들 보면서 할 수 있는 종류의 일이 아니다. 그래서 지난 여름쯤에는, 마음 속으로 포기하고 있었다.

 

동료들이 이건 꼭 좀 했으면 좋겠다고, 몇 날 며칠을 날 볼 때마다 물고 늘어졌다. 아내도 이건 좀 하라고 했다. 그리고 후배들이, 간곡하게 부탁을

 

책 준비하는 데, 내 주변 사람들이 전부 매달려서 이건 좀 해야 한다고 그런 적은 없었다.

 

그래서 쓰기로 했다. 그 와중에, 촛불집회가 벌어지고, 또 새로운 정부가 들어섰다.

 

3.

내가 아는 얘기는, 진짜로 탈탈 털어 넣었다. 처음 시작할 때 나하고 했던 다짐이, '하나마나한 소리'는 절대 안 한다

 

하나하나가 키우면 별도로 책 하나가 될만한 아이템들을 절 하나에 쑤셔 넣었다. 그게 이 몇 페이지에 들어갈까 싶은 것을, 줄이고 줄여서 쑤셔넣었다.

 

그리고 다른 아이템에 비해서 중량이 적다고 생각되는 것들은 과감히 날렸다. 새만금에 앞으로 들어갈 돈이 대략 20조원쯤 되는데, 그 정도면 미니 아이템이다. 털어내버렸다.

 

앞 부분에 들어가 있던 이론적 얘기들도, 나중에는 다 들어냈다. 아담 스미스의 자연이자율 얘기는 이번에는 꼭 하고 싶었는데, 결국에는 다 들어냈다. 다루어야 할 소재들을 위해서 분량 확보를 하느라고. 중간에 1/3 정도를 덜어내고, 비중 있는 것들을 꽉꽉.

 

키우면 책이 하나 될만한 아이템들도 절도 아니라 그냥 브리지 신으로 태워버렸다. 진짜, 주머니에 들고 있던 아이템들을 얘기를 강화시키는 부연설명 정도의 브리지로, 다 태웠다. 태우고, 또 태웠다.

 

4.

원고를 쓰는 과정에 내 생각이 바뀌었다.

 

언론에 대해서는 특별한 입장이 없었는데, 불가근 불가원. 방송도 불가근 불가원.

 

나는 학자의 길을 간다. 내 길과 언론의 길은 다르다. 가끔 교차하며 만날 뿐이다.

 

방송 제안도 약간은 있고, 고정 제안 같은 것도 있었는데, 그게 내 길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문에 쓰던 칼럼들도, 이래저래 정리했다.

 

나는 만드는 사람이다. 소개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해도 된다.

 

책은 이슈를 만드는 매체 중에서, 가장 숨이 긴 매체다. 신문 기획기사, 몇 달 준비하면 정말 길게 하는 것이다. 방송사 다큐도 2~3달 정도, 특집 방송이라고 해도 6개월을 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책은, 1년이면 정말 짧은 거다. 짧으면 1, 보통은 2~3년 후에 사람들에게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얘기를 그 때 만드는 일이다. 어지간히 숨 길게 쉬지 않으면, 하기 어렵다.

 

그리고 그게 내 길이다.

 

중간에 사외이사 얘기도 몇 번 있었는데, 그런 것도 다 고사했다. 이제는, 내 길이 아니다.

 

나는 지금 행복하다. 꼬질꼬질하게, 지금의 행복을 유예하면서 굽신굽신 거릴 이유가 없다. 만드는 일이 내 일이다.

 

그리고 아주 마음이 편해졌다. 걱정도 없어졌다. 근심이 사라진 순간, 어쩌면 초등학교 졸업하고 처음인 것 같기도 하다.

 

5.

초고를 끝내고 나니, 지난 몇 달간이 너무 행복했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일이 끝나면, 앞으로 무슨 일을 하지? 모르겠다. 그 때 가서 생각해볼 일이다.

 

큰 산을 정말 몇 번을 넘었는데, 그런 분석 과정이 즐거웠다. 내가 왜 태어났고, 왜 공부를 했고, 왜 이렇게 살고 있는지, 내가 나에게 납득이 되었다. 그게 즐거움이다.

 

지금 계약상으로 남아있는 게 두 권, 어지간하면 내년 여름이 오기 전에 다 끝난다. 그 뒤에는 리스트가 없다.

 

처음 책을 쓰기 시작할 때, 열 권 정도 리스트가 있었다. 어느덧 다 소화하고, 이제는 남은 리스트가 없다. 그리고 그걸 억지로 늘리거나 채우고 싶지도 않다. 순리대로 가는 게 제일이다. 뭔가 생기면 쓰고, 아니면 마는 거다.

 

에세이집은 매년 한 권 정도는 써볼 생각이 있는데, 경제학 책에 대해서는 아직 뚜렷이 생각한 게 없다. 이제 50이다. 해야 한다는 이유로, 의무감으로, 아니면 허전해서, 뭘 하고 싶지는 않다. 그럴 나이도 아니고. 유명한 어른들 중에는 빈 공간이 두려워서 너무 많은 일을 하는 사람들도 가끔 있다.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다.

 

나도 편안하고, 나를 보는 사람들도 편안해지는 사람이 되고 싶다. 아직 내 삶에 시간이 좀 더 남아있다. 내가 해보고 싶은 건 그런 거다.

 

<국가의 사기>를 쓰면서, 나는 정말로 편안하게 되었다. 약간씩 뒤틀어진 아픔 같은 것이 있었는데, 그런 것도 다 사라진 것 같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이 너머의 일은, 내 영역이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그만하면 되었다.

 

에필로그는 두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그 마지막 토막을 쓰면서 눈물이 잠깐 났다. 문득, 내 인생에 이런 글은 다시 쓰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순간이 오늘 지난 것 같다.

 

그래서 행복하고, 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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