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2'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6.12.30 낼 모래면 50이다 1
  2. 2016.12.22 시대 분류, 순실의 시대
  3. 2016.12.16 삶의 전환기 7

낼 모래면 50이다

 

1.

2016 12 29, 진짜로 낼 모래면 50이 될 그런 날이다. 오후에 두 아이 어린이집 하원 시키느라 잠시 주차하고 있다가 문자 메시지를 하나 받았다.

 

"황준욱 박사가 오늘 10:50 별세했습니다."

 

그가 오래 살지 못한다는 것은 지난 여름에 들었다.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사람들 오지 않았으면 했다고 했다. 나보다 한 학번 위의 선배이다. 같이 공부했고, 같이 축구도 했다. 그는 진짜 마라도나처럼 축구를 잘 했다. 그리고 요리도 잘 했다. 가끔 내가 아이들한테 양 갈비 같은 것을 양념에 재워서 구워주는 적이 있다. 아이들도, 아내도, 아주 잘 먹는다. 그걸 준욱이형한테 배웠다. 유학생 살림이 그렇게 넉넉하지는 않은데, 그 양반은 조금 가격이 싼 양고기를 잘 썼다. 그 때 요리법을 배웠다. 그렇게 긴 기간은 아니지만, 총리실에도 같이 근무했었다. 거기 있는 줄 모르다가, 진짜로 우연히 만났다. DJ 시절, 전자정부 만든다고 한참 난리칠 때, 전자정부 담당 전문가로 파견 근무 나왔다. 경제 조직론을 그와 같이 공부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후에도 종종 만났다. 황준욱, 그는 이것저것 해보고 싶은 게 많았다. 늘 나에게 뭔가 하자고 했었는데, 나는 늘 별 관심 없다고 했었다. 경제 전문대학원 같은 것을 만들어보고 싶어했고, 혁신형 교육기구 같은 것도 만들고 싶어했다. 나는 그냥, 내가 벌려놓은 일이나마 망가지지 않게 하느라고 늘 정신이 없었고, 새로운 일을 벌릴 여력이 없었다. 그리고 전문 대학원은, 이미 만들어본 적이 있다. 한 번 해 본 일을 또 하는 데 그렇게 매력이 당기지는 않았다.

 

아내와 대학생 아들 하나를 두고, 친구처럼 평생을 살았던 선배가 그렇게 떠났다.

 

2.

친구의 초상에 친구들이 모이는 것은 처음 한 경험은 아니다. 내가 가장 친했던, 내 인생의 친구는 벌써 갔다. 명박 시대, 순실의 시대, 이 기간을 거치면서 좋은 녀석들이 참 많이도 죽었다. 그리고 다들 아깝다. 채 피워보지 못한 천재라고, 시간이 가면서 더 아쉬워지는 사람으로 수의사 박상표가 생각났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그가 아깝고, 그래서 더 많이 보고 싶어진다. 광우병 촛불집회 때, 수의사 한 명이 맹활약 한 적이 있다. 그가 박상표다. 그가 그렇게 유명해지기 전에, 대학로 근처에서 낮술을 종종 했다. 그는 아는 게 참 많았다. 삶을 지고 가는 게 그렇게 어려웠나. 자살했다.

 

마흔이 될 때에도 생각을 많이 했다. 진짜로 많이 했었다. 그 때는 뭘 해야겠다, 어떻게 살아야겠다, 욕망과 윤리 이런 것들 사이에서 삶을 돌아보는 게 그 시절에 많이 했던 생각이다. 이제 나도 낼 모래면 50, 쉰이 돤다. 막상 이 새로운 전환점이 되는 순간, 떠나버린 친구들에 대한 생각이 더 많이 난다. 상징적으로 그럴 것이라는 생각은 했었다. 50도 채우지 못하고 떠나간 친구들, 나는 뭔데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가나, 이런 생각도 했던 적이 있었다. 이런 얘기를, 진짜로 낼 모래면 50이 되는 날, 친구들과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너나 나처럼, 불규칙하게 대충 막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준욱이 형이 먼저 죽다니, ."

 

빈이 소주 한 잔 기울이면서 한 얘기다. 맞기는 맞는 말이다. 나는 대충 살았다. 그리고 나만큼이나 빈도 대충 살았다. 우리와는 다르게, 황준욱, 그는 부지런했고, 규칙적으로 살았고, 진짜로 열심히 살았다. 말도 잘 하고, 잘 생기고, 사람들도 잘 챙겼다. 그리고 축구도 잘 하고공부도 괜찮게 했다.

 

3.

20대 중반 때, 같이 경제학 공부하던 세 명의 친구가 있었다. 나는 흔한 성씨는 아니지만, 다른 두 친구들에 비하면 희성 축에도 들어가지 못할 정도였다. 한 명이 빈, 또 다른 한 명이 옥이었다. 그 시절에는 빈은 결혼을 했었다. 우리는 빈네 집에 가서 밥 먹고, 나오면서 옥이랑 한 잔씩 더 했다. "한국에서 가장 희귀한 성씨는 볍씨", 이런 아재 개그가 우리들에게 따라 다니던 농담이었다. 볍씨가 성으로 있을 리가 없다. 기구하다는 얘기도 많이 들었다. 한국에서 흔히 보기 어려운 우씨, 빈씨, 옥씨가 파리까지 와서 그렇게 점심, 저녁 같이 먹으면서 어울려 다니는 게 남들 눈에는 기구해보였나 보다. 다들 가는 미국 유학을 안 가고 파리에서 모인 세 명의 희성 경제학도들옥은 변과 결혼을 했다. 희성 시리즈는 아직도 계속 된다.

 

옥은 지방에서 오느라고 늦었고, 빈과 옥의 아내 변, 그렇게 소주 한 잔을 기울였다. 옥은 OECD에 근무하다가 지방대학 교수다 되었다. 빈은, 그냥 민간연구소에서 정년을 맞을까 하는데, 연구소에서 나이 많다고 자꾸 나가라고 해서 고민이 생겼다. 그의 아들은 이제 대학교 2학년이 된다. 우리 집 애들은, 이제 네 살, 여섯 살이 된다. 갈 길이 멀다. 옥은 조금 얌전하게 살았고, 빈과 나는, 대충 살았다. 정열적으로 살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50을 바라보는 지금,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대충 산 거다. 되면 되고, 말면 말고, 재밌으면 하고, 재미없으면 심통 부리고세 친구는 오랫동안 같이 모이지 못하다가 2년 전부터는 좀 자주 모였고, 자주 봤다. 술도 종종 했다. 옥은 이제 주량이 줄었다. 물론 줄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남들 보다는 많이 마신다.

 

우리가 그렇게 몰려 다닐 때, 바로 위의 선배가 황준욱이었다. 아직 결정된 것이 거의 없던 20대 경제학도들의 세상이 그렇게 소박하지만 꿈만은 찬란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을 어느덧 20년도 더 된 기억으로 돌리며, 상가집에서 소주 한 잔 기울이는 것, 그런 게 50대의 삶이라는 것을 너무 상징적으로 보게 된 것 같다.

 

4.

상가집에서 나와서 빈과 감자탕 집에 들렀다. 소주 한 잔 하지 않고 그냥 집에 가기는 좀 그랬다. 50이 되면 걱정이 줄어들까? 빈은 걱정이 없거나, 걱정이 있어도 하지를 않으면서 살았다. 산업은행을 그만두고 유학길에 오를 때, 오죽 걱정이 많았겠나. 내 주변에 산업은행 출신들이 몇 명 있는데, 그 중에 삶이 가장 고달픈 것은 빈이었다. 그래도 그는 별로 걱정하지 않고, 어떻게 되겠지, 그러면서 살았다. 그가 나와 같이 50줄에 들어서면서, 이제는 걱정이 많아졌다.

 

은퇴를 몇 년 앞둔 중앙일보 기자와 만난 적이 있었다.

 

"이대로 정년을 맞는 게, 유일한 꿈이지요."

 

나는 그 얘기를 그냥 흘려 들었다. 중앙일보에서 대충 세상에 맞추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말 하는 정년이라, 그런 약간의 멍멍한 감정 같은 얘기로 들었다. 그는 실제로 정년을 맞았다. 그리고 다시 만났다. 마치 먹고 사느라고 평생 하고 싶은 얘기나 하고 싶은 일을 하나도 못했다는 듯이, 진짜로 자유롭게 말하고, 소신 있게 행동했다. 그 시절의 사람들은, 그래도 조금만 소신을 굽히면 정년을 맞기는 했던 것 같다. 내 주변의 친구들 중에서 안온하게 정년을 맞을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그렇게 많아 보이지는 않는다.

 

"제 마음대로 하겠습니다."

 

빈은 평생을 그렇게 살았다. 산업은행도 그냥 그만두었고, 공부 주제도 진짜 밥 먹고 살기 힘든 화폐론으로 골랐다. 한 때, 그와 나는 같이 화폐론을 전공했었는데, 나는 심장이 떨려서 박사 논문 주제 정하면서, 그래도 최소한 밥은 먹고 살 수 있는 걸로 바꾸었다. 실제로, 그렇게 바꾼 전공으로 밥은 먹고 살았다. 진짜로 자기 하고 싶은 길로 가겠다며 살았던 빈도, 구조조정 앞에서 떨고 있다. 소주가 목구멍으로 넘어가는지, 심장으로 그냥 직행하는지 모를 정도로 서늘한 마음이 들었다.

 

5.

나에게는 걱정이 없을까? 물론 나도 걱정이 조금은 있다. 아이들은, 극단적일 정도로 어리고, 통장이 그렇게 두둑한 편도 아니다. 누가 돈 준다고 하면, 나는 그게 그렇게 싫었다. 내가 노동으로 벌은 돈 말고는 진짜로 돈 받기가 싫었다. 세상에 공짜가 어딨냐? 공짜는 없다. 돈을 받으면, 결국은 몸을 움직이거나, 이름을 팔아야 한다.

 

50, 이제는 살아온 삶보다 남아있는 삶이 현저히 적은 나이이다. 그리고 사회적 삶으로 생각하면, 잘 해야 10, 억지를 쓰면서 길게 버텨야 20, 남아있는 시간이 별로 없다. 그렇다고 뭔가 새로운 것을 할 수도 없는 나이이다. 50 전에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것은 진짜로 위험하다. 하던 것을 반복하거나, 반복하는 게 싫으면 약간 개선하는 일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정말로 많은 용기를 낸다면, 이미 했던 것들이 전혀 새로운 조합을 만들 수 있다. 여기에도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나처럼 겁 많은 사람들은, 그런 새로운 조합도 하기가 어렵다. 하던 일을 줄이고, 줄일 수 있는 것을 더 많이 줄이고, 그렇게 야주 약간의 일에 집중하는 것, 그 정도가 내가 생각해볼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난 평생 대충 살았던 것처럼, 앞으로도 대충 살려고 한다. 갑자기 내가 열심히 살려고 하면, 말 그대로 '급살' 맞을 것 같다. 무섭다.

 

50년을 돌아보면, 정말로 나는 대충 살았다. 경제학과가 뭔지도 모르고, 그냥 연세대학교에 원서를 냈다. 다들 재수해서 무조건 서울대 가야 한다고 했는데, 귀찮았다. 전공이 중요하다는 생각도 별로 안 했고, 대학이 엄청나게 많은 것을 결정한다는 생각도 안 했다. 공직 초기, 내가 서울대 안 나왔다고 "그래서 너는 바보야"라고 틈만 나면 얘기하던 정부 과장이 있다. '케스케이드형 택스'를 아무리 설명해줘도 이해 못하던 공무원이었는데, 나보러 맨날 바보라고 엄청 구박했다. 그래도 그렇게 싫어하지는 않았고, 좀 안스럽게 생각했다. 나중에 뇌물죄로 감옥 갔다. 지나와서 보면, 전공은 정말로 아무 것도 아니고, 학벌은 더더욱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럼 열심히 사는 게 중요할까? 내가 알던 공무원 간부 중에서 정말로 열심히 살았던 몇 사람이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한 명 빼고는 다 감옥 갔다. 내가 하던 일은, 눈 앞에서 현금이 막 움직이는데, 그 돈도 정말로 규모가 컸다. 내가 다루던 예산이 한참 컸을 때 1 5천억이었다. 그 시절, 나와 동료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국가의 발전, 산업의 융성, 경제의 효율성, 그런 건 아니었다. 감옥 가지 않는 것, 그걸 1차 덕목으로 정했다. 우리는, 감옥 가지는 않았다. 내 앞에서 이 일을 했던 사람, 내 뒤에 그 을을 하던 사람, 대부분이 결국 감옥에 갔다. 한 명이 감옥에 안 갔는데, 암으로 정말 일찍 죽었다. 그 시절, 대충 사는 것을 몸에 익혔다. 더 이익을 추구할 수 있고, 더 승진할 수 있고, 더 가질 수 있는 것, 대충 살면서 그런 건 동료들과 수 십년 후의 안주거리로 남겨두는 게 좋다. 그런 게 대충 사는 것이다.

 

앞으로도 대충 살 것이다. 대충 살면 좋은 게, 마음 속에 맺히는 '', 그 딴 게 없다. 어차피 대충 했는데, 잘 되면 정말 운이 좋은 거고, 잘 안되면, 원래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음에 맺힐 게 없다. 그러면 재미 없지 않느냐? 감옥 가는 것보다는 재밌고, 되지 않은 일을 회상하면서 눈물 흘리고 궁상 떠는 것보다도 재밌다.

 

'가늘고 길게', 어느덧 내 인생의 좌우명이 되었다.

 

"나비는 누에고치 속의 번데기 시절을 겪고 껍질을 뚫고 나오는 과정을 통해 날개가 힘을 얻어서 화려하게 날아오를 있다. 만약 나비가 나오기 쉽게 껍질을 뚫어주면 며칠 살지 못한다고 한다."

 

근혜가 이런 허망한 얘기를 해서 우리를 대박 웃긴 적이 있었다. 누에고치 속에 있는 건 나비가 아니라 누에나방이고, 누에나방은 못 난다. 사람에게 너무 길들여져서 날지도 못하다. 누에는 하다 못해 새가 덤빌 때 잎파리 뒤에 숨는 정도로 몸을 뒤척이는 것도 못한다. 도대체 뭔 나비 하는 얘기인지도 모르겠고, 무슨 소리 하는 건지도 모르는 얘기를 근혜는 종종 했다.

 

바로 이 누에가 만든 고치를 사람들이 실로 바꿀 때, '가늘고 길게'가 목표이다. 그리고 그 실로 짠 옷감이 비단이다. 비단실만 그런 게 아니다. 무명이든, 모든 실은 가늘고 길게,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게 언젠가 누군가의 손에 의해서 천이 되고, 사람을 따뜻하게도 하고, 멋지게도 하고, 그렇게 되는 거다.

 

한 번도 큰 꿈이 없었고, 한 번도 되고 싶은 것도 없이 나이 50을 맞게 되었다. 여지껏 대충 살았는데, 앞으로는 열심히 살겠다, 이거 이상하다. 그리고 그렇게 되지도 않는다. 지금까지 대충 살았던 것처럼, 앞으로도 대충 살기로 마음을 먹었다. 내일 모래면 50이 되는 날, 아무 마음도 새롭게 먹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 나한테는, 이것도 큰 결심이다. 중요한 결심은 물론이고, 소소한 결심도 거의 안 하면서 살았다. 그냥, 소소하게 살아갈 생각이다. 가늘면 길어지는가? 그렇지는 않다. 그래서 가늘고 길게, 이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 원래 쉽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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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도 분석을 위해서는 시대 구분을 하게 된다. 그리고 많은 경우, 대통령별로 구분을 하는 게 좀 쉽다. 물론 현실이 그렇게 정부별로 확연하게 갈리지는 않지만, 주요 정책들은 실제 대통령별로 특징을 갖는다.

지금까지 내가 잠정적으로 사용하던 분석틀을 다음과 같다.

YS 시대 - 군사 정권에서 민간 정권으로의 전환기. 서로 공존하기 어려운 정책들이 혼재 되어 있다. 잘 한 것도 있고, 못한 것도 있고.

DJ 시대 - 완화된 신자유주의.

노무현 시대 - 강화된 신자유주의.

여기까지가 '괴물의 탄생'에서 썼던 분류 기준이다.

명박 시대 - '사기꾼의 시대'

'살아있는 것의 경제학'에서 이렇게 언급을 한 적이 있는데, 내년 봄에 나올 책에서 이걸 좀 더 강화시켜서 '국가의 사기'라는 개념으로 정면으로 다루어볼 생각이다.

근혜 시대 - 순실의 시대

이건 아직 사용한 적이 없는 가설적 내용이다. 지금 하는 사회적 경제 책 분석에서, 어쨌든 근혜가 뭘 했는지, 아니면 뭘 안했는지, 이 분석이 필요해서 가설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근혜 시대가 사기꾼의 시대가 아닌 점은 명확하다. 사기꾼은 자기가 뭘 하는지 알아야 하는데, 근혜는 자기가 뭘 하는지도 모르니까, 사기꾼도 못된다. 조희팔은 자기가 사기 치는지 명확히 알았다. 명박도 알았다. 근혜는 그 급도 못된다.

순실의 시대, 근혜는 뭔가 한 게 없고, 순실은 뭔가 한 게 있다.

순실이 한 것을 결국 역사가 알게 될까?

언론으로 드러나지 않은, 최소한 두 가지 분야에 대해서 알고 있다. 일부는 진행 중에 사건이 터져서 중간에 정지, 일부는 미수에 그친 사건.

순실의 시대는, 결국 우리가 상상했던 것보다 깊고 넓은 것 같다.

100년 후의 역사에, 근혜 정부에서 '근혜'라는 이름은 결국 사라지고, '순실'만이 남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박근혜 정부'라고 스스로 부르려고 했던 이 시대는, 아마도 '순실의 시대'로 남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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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전환기


1.

올해 3, 둘째가 폐렴으로 병원에 거푸 입원하면서 내 삶도 많이 바뀌었다. 주변에 정신 없이 널려 있던 일들을 내려놓았다. 어떤 건 정리하고, 어떤 건, 말 그대로 그냥 내려놓았다. 내가 누굴까, 글쎄 그런 어려운 질문을 할 겨를이 없었다.

 

내년 3월이면 다시 봄이 된다. 그 때까지는 아이들과 있을 시간을 많이 가지려고 한다. 그리고 둘째가 아팠던 때부터 1년이 지나서도 아프지 않고 넘어가면, 그 때부터는 좀 움직여 보려고 한다. 아프면? 아프지 않을 때까지, 더 붙어 있는 수밖에 없다. 그 때가 되면, 나는 이제 쉰이다. 전혀 생각해보지 않은 시간이다.

 

2.

마흔이 될 때에는 이것저것, 미리 생각을 좀 많이 했었다. 물론 생각한 대로 살지는 못했다. 그냥 정신 없이 시간이 흘렀다. 아이 둘이 거푸 태어나다 보니, 진짜로 아무 생각이 없었다. 시간은 쏜살과 같이 지나갔다. 머리 속에 남은 것도, 특별하게 남은 기억도 없다.

 

요즘 1주일에 집밖으로 나가는 것은 한 두 번이다. 가끔은 한 번도 안 나갈 때도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보니까, 나는 진짜로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혼자 노는 걸 제일 좋아하는 것 같다.

 

요즘 만나는 사람들은 뻔하다. 젊은 경제학 박사 몇 명을 보고, 영화 기획하는 2~3명의 동료들을 매주 만난다. 회사에서 연구하는 사람들을 몇 사람을 만나고, 에너지 쪽의 오래된 동료들을 가끔 만난다. 이래저래, 열 손가락 안 쪽이다.

 

발전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좀 더 만나려고 하는데, 이젠 다 지방으로 내려가서 서울에는 남아있는 동료들이 별로 없다. 내 차는 벌써 지난 여름 다른 사람에게 줘버려서, 버스 타고 잠깐 갈 수 있는 곳 아니면 이동하기도 쉽지 않다. 이래저래, 그냥 집에 있는다.

 

둘째는 가을이 되자마자 후두염에 약한 폐렴, 겨울이 되자마자 심한 후두염을 앓았다. 그래도 입원하지는 않고 넘어갔다. 큰 걱정 덜었다.

 

살다 보면, 중간중간에 섭섭한 일도 생기고, 서러운 일도 생긴다. 1년 가까이 그냥 집에 있으니까, 별로 잘 기억도 안 난다. 아주 오래된 동료들이 가끔 보고 싶어지기는 한다. 섭섭해서 헤어졌던 옛 동료들에 대한 생각도, 그냥 애틋함만 남는 것 같다. 그래도 억지로 연락해서 보지는 않는다.

 

'이러니까, 내가 이 양반이 싫었던 거야.'

 

보지 않다 보면 애틋해지는데, 억지로 다시 만나서 예의 악의적인 수다스러움을 참으면서 웃고 있을 필요는 없다. 그냥 시간이 가면서, 가슴 속에 먼지처럼 내려앉는 것에 불과하다.

 

3.

1월에 책이 나간다. 이번에는 저자 소개를 바꾸려고 한다. 예전에 쓰던 저자 소개는 너무 오랜 시간에 걸쳐 조금씩 바뀐 거라서, 지금 와서 보면 주접스럽다. 요즘 감성으로는, 아주 짧고 드라이한 게 더 좋다. 내가 누구냐, 이걸 설명하기 위해서 너무 많은 공을 들이는 일이, 요즘은 귀찮다. 그리고 스스로 추접스러워 보인다. 내가 누군가와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분명히 다른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4.

1월이면 아내가 다시 일을 시작한다. 둘째는 태어나자마자 숨을 못 쉬었다. 아내는 어쩔 수 없이 퇴사를 하고, 아이를 돌봤다. 아내 힘만으로도 벅차서, 나까지 달라 붙어 있었다. 지난 몇 달, 아이를 돌보면서, 아내가 다시 일을 할 수 있게, 나도 시간을 좀 많이 썼다.

 

아내의 연봉은 많이 줄었다. 예전에는 꽤 높은 직급이었는데, 그런 자리로 돌아가기는 어렵다.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 아기가 많이 아팠고, 나도 아내도, 삶의 많은 부분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우리의 삶은 훨씬 단촐해졌고, 조용해졌다. 이 조용해진 삶이, 나는 훨씬 편하다. 뭔가 꼭 해야 하는 일도 없고, 안 하면 큰 일 나는 일도 없다.

 

5.

봄이 되면 뭘 할까? 아직은 잘 모르겠다.

 

몇 달 쉬면서 보니까 경제 다큐 같은 것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들지만, 지금 내가 벌릴 수 있는 형편은 아니다. 잘 준비된 경제 다큐 같은 게 있으면 사회적으로 좋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성공시킬 자신은 없다. 그리고 그렇게 많은 시간을 들일 자신도 없다.

 

그래서 아직은 뭐, 특별히 생각해놓은 것은 없다. 아기가 아플지, 안 아플지도 모르는 일인데, 미리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이런 건 좀 생각을 해보는 중이다.

 

30대와 40대처럼 살지는 않을 것이다. 더 편안하게, 더 푸근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은 좀 한다. 내가 피곤해서, 그렇게 못 살겠다.

 

나를 위해서는 더 많이 웃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는 더 많이 눈물 흘리고, 그렇게 지내고 싶다. 그리고 나머지는, 그냥 시간에 맡겨두려고 한다.

 

아직 결정된 것은 아무 것도 없고, 결정이 아예 없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좋든 싫든, 이 겨울, 삶의 중요한 전환기를 보내는 중이라는 것은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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