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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훈 블로그, 뭐든 만들어야 입에 밥이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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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보관함

 

며칠 동안 카펜터스의 베스트 앨범과 사운드 오브 뮤직 ost만 계속 돌리다가, 오늘은 큰 맘 먹고 앨범을 좀 바꿔보았다. 되는 대로 잡아보니, 데카에서 나온 게오르그 솔티가 지휘한 베토벤 심포니 9번이 걸렸다.

 

9번이 워낙 시간이 길어서 더블 앨범 형식으로 되어있다. 교향곡 한 번을 듣기 위해서 3번을 뒤집는 일을 해야 하지만, 앉아서 9번을 다시 한 번 듣는데 그 정도의 수고야.

 

베토벤 9번은 더는 얘기할 필요가 없는, 전국민이 다 아는 음악일 것이다. 어쩐지 말러를 들어주지 않으면 좀 궁상맞다는 얘기가 10년 전에 유행한 적이 있었던 것 같기는 한데, 한 때의 말러 열풍도 지나간 것 같고, 모짜르트 열풍도 지나간 것 같다. 나는 한동안 바그너를 열심히 듣기는 했는데, <촌놈들의 제국주의>를 바그너를 모티브로 썼다가, 책 판매가 영 신통치 않은 것을 보고, 괜히 바그너 듣고 있으면 짜증이 생겨나는 증상이 생겼다. 원래도 바그너 좋아하지는 않았는데, 히틀러의 등장을 즈음한 독일의 분위기들을 연상하기 위해서 일부러 들었던 것인데. 그래도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하면, 아마 이 책이 좀 팔렸으면, 다 바그너 덕이다라고 그랬을지도 모른, 그런 천상 속물인 셈이다.

 

어쨌든 대부분의 사람이 베토벤 9번에서 가장 즐겁게 듣는 장면은, 말할 것도 없이 합창 교향곡이 바로 그 시원한 합창이 터져나오는 장면일 것이다. 말러의 소프라노가 돋보이는 교향곡들도 좋지만, 촌놈이라서 그런지, 나도 역시 합창이라고 하면 역시 9번의 시원스러운 합창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러나 몇 년 전부터 내가 9번에서 가장 좋아하고, 또 궁상맞게도 들을 때마다 반사적으로 눈물이 왈칵 쏟아져나오려고 하는 장면은, 바로 1악장이 시작하는 부문의 튜닝에 가까운 가벼운 음맞춤이 진행되는 장면이다. 이 아주 긴 심포니의 시작을 위해서 잠깐의 몸풀이 그리고 바로 튀어나오는 튀어져나갈 듯한 총주.

 

 

이 대목은 영화 <이퀄리브리움>에 감동적으로 묘사된다. 약품에 의해서 감정을 인위적으로 억제당하고 무감정한 상태에서 파시즘을 유지하는 '감시자'가 역할을 하던 주인공이 LP로 베토벤을 들으면서 눈물을 되찾게 된다. 그 때 흘러나온 대목이 바로 베토벤 심포니 9번의 첫 장면이다.

 

나는 이 장면을 보고 나서 턴테이블을 다시 샀고, 여기저기 흩어져있던 나의 LP들을 다시 수거해와서 LP 세계로 다시 돌아왔다.

 

물론 그릴 일은 없겠지만...

 

우리에게 LP를 뺐는 것은 우리의 감정을 뺐고, 결국은 음악을 비롯한 예술을 앗아가고, 그런 이후에 파시즘의 세계를 만들려고 하는 음모와 관련되어 있다고, 철썩 같이 믿고 있다.

 

베토벤이 실제로 그런 생각을 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에게 심포니 9번의 첫 장면은 절대로 내가 파시즘의 세계와 타협할 수 없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하게 만들었다.

 

물론 말만 그렇게 하고, 실제로 심포니 9번의 전곡을 듣는 것은 일년에 몇 번 안된다.

 

음악은, 맥락이 만들어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에게 심포니 9번은 영원히, <이퀄리브리움>의 파시즘에서 벗어나기 위한 예술을 되찾기, 그 첫 순간의 기억으로 남는다.

Comment

  1. 끄적임 2009.11.05 23:36 신고

    이퀼리브리엄...생존의 최소 조건이 메트릭스인걸...사진을 올린 의미는???우후훗...오늘 세번째 방문....아...내가 왜 이러는지 몰라...연습장에 내 댓글을 연습으로 쓰는건지...

  2. 동동 2009.11.06 00:08 신고

    ...베토벤....스탠리 큐브릭 <시계테엽오렌지>에 대한 오마주같기도 하네요...

  3. Favicon of http://deepsea.egloos.com BlogIcon 2009.11.06 00:17 신고

    9번은 정말 안팍으로 의미심장한 곡 같아요.
    카핑 베토벤이라는 영화에서처럼 희한한 이야기를 집어넣을 필요도 없이.

    첫 연주 때 귀도 안들리는 주제에 박자도 안맞는 지휘를 고집했던거나, 유행이 살짝 지나서 시들했던 수입에 실망해서 버럭했던거나...

    고집불통에 자존심만 강한 꼴통이었던 베토벤이 인류의 대화합이라는 테마를 썼던 것이 참 재미있어요. 저는 클래식은 그렇게 많이 듣는 편이 아닌데 베토벤의 교향곡 몇개는 꼭꼭 듣게 되더라구요.

  4. ㅠㅠ 2009.11.06 02:50 신고

    이퀄리브리엄에서..
    특A급인 주인공이 180도 변하는 걸 보면서..
    그 trigger가 베토벤음악에 의한 격변이든..
    강아지라는 한 생명에 대한 순수한 마음이든..
    사랑하게 된 여자를 지키지못한 자괴감이든..
    저런 사람이 변하면..더 무섭고 철저하게 변하는구나..
    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가장 썰렁했던 사람을..가장 불타는 사람으로 만드는..무엇..
    그 앞에선..인간도..한없이 무기력해져서..
    다 내려놓고 눈물흘리게 만드는.. 그 무엇..

  5. 직장인 2009.11.06 08:54 신고

    음...베토벤도 외게인입니다...으흐흐

  6. midwest 2009.11.06 14:58 신고

    어제밤 tv에서 이퀼리브리엄을 해주더라구요. 사실 크리스천 베일보다는 션 빈이랑 도비니크 퍼셀이 먼저 보이더라구요...그 친구들이 주인공일줄 알았는데...초반에 끝나고.....어 아닌가 싶어서 보다보니...그냥 빨려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예이츠도 없고, 강아지도 없는 세상 어찌 살려고 하는지....근데...점점 그렇게 되어 가는 것 같네요....-.-;;

  7. 구독자 2009.11.06 20:24 신고

    더블앨범이라니.. 솔티의 템포가 카라얀의 것보다는 긴가 보네요
    좌파경제학자로서 베토벤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가능할까요? 언제 윤소영 선생의 베토벤론에 대한 커멘트도 부탁드려봅니다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