쿡 티브 때문에 어지간해서는 볼 것 같지 않은 지난 10년 동안의 한국 영화들을 섭렵하는 중이다. 어쨌거나... 참 좋은 시절이었다.

 

영화의 성공과는 상관없이, 소재도 다양하고, 주제도 생각보다는 다양해보였다.

 

이제 그 시절도 끝나간다고 생각하면, 마음 한구석이 좀 아련하기는 하다.

 

그야말로 있을 때 잘해...

 

DVD 시장은 완전히 죽은 듯. 나오는 게 없다. 미국의 주요 메이저사가 한국에서 대부분 철수했다고 하더니, 정말로 그런가보다. 해리포터는 극장에서 아차 하다 놓쳤는데, DVD 출시가 안된다. 이미 샀던 옛날 거만 계속 묶어서 패키지로 팔고, 정작 혼혈왕자는 출시될 시간을 훨 넘겨서 안 나온다.

 

야, 이제 정말 한국은 망했구나!

 

이제 간단한 영화도 DVD로 구하려면 일본 가서 사야하는, 그 암흑 시대가 다시 오겠구나, 싶다.

 

하여간 극장에서 상여할 때에는 정말 볼 것 같지 않은 영화들도 10년 지나서 다시 보니, 소록소록 하고, 맛도 새롭다.

 

예전에 아내가 질색해서 별로 말도 못했던 <친구>도 새로 봤다. 뭐, 이걸 볼 수 있다는 게 그냥 고마울 뿐이고, 그냥 재밌을 뿐이다.

 

팬덤이라고 하면, 좀 쑥스러울 나이이지만, 그래도 팬질만큼 재밌는 것도 없다. 류승완의 영화 짝패는 DVD, ost 다 샀고, 이건 100번도 넘게 봐서 그야말로 본전 완전 뽑은 드물게 성공한 DVD였다.

 

팬은 원래 뒤에서 눈치 보지 않게 응원하면서, 하여간 나오는 족족 사주는 게 진정한 팬이다... 라는 작은 믿음이 있다.

 

이상은 CD는 이래저래 선물용으로 50개 정도는 사주지 않았나 싶고, 장기하는 팬은 아니더라도 외국에서 손님들 올 때마다, 요즘 한국에서는 이게 유행이야... 하면서 하나씩 사서 주었다.

 

그래도 직접 만나지는 않는다. 내가 생각하는 팬으로서의 에티켓이다. 그저 열심히 사주고, 열심히 선물로 돌리는 게, 진정한 팬의 완성!

 

별로 성실하게 사는 편은 아니지만, 팬질만큼은 성실하게 하려는 편이다.

 

그리하여...

 

이상은이나 류승완이나,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얼굴을 알고, 직접 인사하면, 팬으로서의 격이 떨어진다는, 그런 이상한 믿음을.

 

얼마 전에 정태춘 근처에 있다가 누가 인사시켜준다고 해서, 허겁지겁 도망갔다. 한 달에 한 두번은 정태춘 CD를 걸어놓고, 새로 살았던 80년대, 내가 살았던 90년대, 그런 센티멘탈 블루스 놀이 같은 것도 한다.

 

한 때... 희한하게 연애인들 많이 만날 기회가 생겨서, 멋도 모르고 인사시켜주는 대로 다 인사하고 살았던 적이 있었다. 된장... 돌아보니 그 시절이 화려해 보이기는 했어도, 내 인생에서 가장 어렵던 시기였다.

 

팬은 팬답게, 열심히 사주고, 먼 발치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콩당콩당.

 

그래야 팬이라는 믿음을.

 

(아, 그래도 류현진 왼손, 그 손이라도 한 번 잡아보면 소원이 없겠다! 카스트로도 극찬한 류현진!)

 

하여간 이런 이유로 류승완을 만날 자리 같은 게 있으면 일부러 피하기도 하고 그랬다.

 

(나는 아직도 선덕여왕의 칠숙을 오왕재로만 알고 있다. 내가 왕재여, 왕재!, 바로 그 오왕재 말이다.)

 

 

하여간 그랬던 류승완인데.

 

이번 학기의 생태인류학 수업에서 류승완, 장정일, 이런 사람들을 텍스트로 좀 다루는 일이 생긴 관계로, 학생들의 희망을 받아 생태인류학 공개특강 같은 것을 한 번 하기로 했다. 물론 류승완은 자기 영화가 이런 수업에서 이런 희한한 맥락의 텍스트로 사용되는 줄 알면 기겁을 할지도 모르겠지만. 내 맘이다.

 

9월 29일 오후 3시부터 5시까지 연세대학교에서 할 예정인데, 이 시간에 대형강의실을 구하기가 어려워서 장소는 아직 미정이다. 오실 분은 오셔도 된다.

 

아마 입구 쪽에 플랭카드도 하나 걸어놓을 생각이니.

 

혹시 올 분은 <아라한 장풍대작전>과 <짝패>를 보고 오시면 고맙겠다. <다찌마와 리>도 생태적 맥락에서 해석을 해볼까 시도를 했는데, 내 능력으로는 불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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