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부다페스트였다. 도나우강에 일본 정부 후원을 받아서 UN에서 배를 띄웠다. 막 사회주의에서 전환된 부다페스트는 딱 한국 70년대 모습 같았다. 공항에서는 서독 마르크를 받았고. 해질 무렵부터 진짜 호화판으로 먹고 마시고. 그 때 도나우강을 멍하니 쳐다보면서 내 인생이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 시절 외교부에서 파견 근무를 나왔으면 좋겠다는 얘기가 있었고, 청와대 외곽 조직 한 군데에서도 파견 희망을 했었다. .. 눈 딱 감았으면 UN 기구에 좀 높은 자리로 가는 순번이었다.

 

IEA, International Energy Agency, 국제에너지기구, 파리에 본부가 있다. 우리는 그걸 International Excursion Agency, 국제소풍기구라고 불렀다. 절경마다 찾아다녔고, 툭하면 칵테일 파티였다. 그 시절 나는 개혁파 young chair, 진짜 젊은 의장이었다. 몇 년 지나면 개혁파 지지로 서브스타 의장 정도는 할 거라고 사람들이 생각했나 보다. 하여간 혼자 차 한 잔 마시기가 어려웠다. 화려함으로 치면 극강의 화려함을 추구할 수 있는 자리였는데..

 

부다페스트에서 이렇게 사는 건 좀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2.

‘88만원 세대의 출발 버전이 여러 개가 있다. 세 번째 버전인가가 LG 투수 이상훈 얘기로 시작하는 버전이 하나 있었다. 그걸 갈아 엎으면서 어깨에 힘 빼고 던지기라고 메모를 적었다. 그 앞의 얘기들에 너무 힘이 들어가 있었다. ‘첫 섹스의 경제학이라고 이름 붙인 장은 그 한참 뒤의 버전이었다. 결국 그걸로 출발점을 삼았다.

 

그래도 그 시절에는 사는 게 좀 힘들기는 했다. ‘악으로 깡으로’, 사실은 이런 말을 더 좋아했던 지도 모른다. 시간이 흘렀다. 이제는 악도 없고, 깡도 없다. 남은 건 늘어난 배 밖에 없다. 배가 나오고 살이 붙이 시작하면서, 존심도 사라졌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까, 악과 깡으로, 그런 말이 정말 몹쓸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 천민 자본주의가 해줄 거 제대로 안 해주면서 그냥 쥐어짜기만 하려다 보니까 이런 이상한 말들을 만들어낸 거 아닌가 싶다.

 

악과 깡을 권하는 시대, 정말 거지 같은 시대를 우리가 살았다. 요즘은 좀 낫나? 올해 프로야구의 키워드는 절실함이었다. 절실함이 있는 선수와 절실함이 없는 선수, 악과 깡의 21세기 버전일 뿐이다. 지랄맞다.

 

3.

나라고 가슴 아픈 순간이 없겠나? 더럽게 안 팔리는 책들, 가슴 한 켠에 묻을 때는 솔직히 눈물 찔끔 나려고 한다. 그래도 순간이다. 요즘은 훨씬 쉽게 그런 걸 잊는다. 남 탓도 이젠 잘 안 한다. 그냥, 재수 없는 것에 불과하다. 잘 되든, 못 되든, 과도한 의미부여 같은 것도 잘 안 하려고 한다. 그냥, 재수가 없는 것이다. “내 탓이요”, 요 딴 것도 싫다. 남들은 뭔데? 거적데기여?

 

요 몇 년 사이, 남들한테 화 내는 일도 거의 없다. 유일하게 화 내는 건 우리 애들. 좀 정리 좀 하시고 사세요들.

 

그냥 기능적으로, 한다, 안 한다, 이렇게는 안 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무감각하고 무심하게 조건만 얘기할 뿐이다.

 

그래도 가끔 어깨에 더 힘을 빼야 한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기도 하다. 진짜 이상하게 끼어드는 벤츠 보고, 저 놈의 벤츠 새끼가.. 그리고 금방 후회한다. 왜 욕을 해, 어차피 듣지도 못할 건데, 비겁하게 숨어서.

 

4.

뭔가 정부기관 기관장들 모아놓고 석학 발표 같은 것을 해달라고 한다. 뭔지도 모르고 추천한 사람 얼굴 보고 그냥 한다고 그랬더니, 발제문이 필요하단다. 젠장. 그냥 생각 자유롭게 얘기하면 된다고 하더니, 뭔 발표문이야.

 

가만히 돌아서서 생각해보니까, 근데 내가 석학인가? 나는 그냥 애 둘 키우는 아빠일 뿐. 뭔가 새로운 생각을 해야 한다는, 바로 그 생각을 안 한지 벌써 몇 년 된다.

 

나이만 처먹으면 그냥 대우가 높아지는 것은, 전형적인 개발도상국의 장유유서 분위기. .

 

되고 싶은 것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는 상태에 도달한지 몇 년 된다. 2년 조금 넘는 것 같다. 광주의 모 공기업 사장 자리 안 간다고 한 뒤로, 되고 싶은 것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는 상태에 드디어 도달한 것 같다.

 

남들은 불쌍하게 보는데, 나는 이 편안한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 몇 년간 내 속을 몇 번씩 다 뒤집어가며 남은 허세들 탈탈 털었다.

 

그래도 아직은 어깨에 힘이 들어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젠장, 나오기 시작한 배에 신경 쓰여서 배에 힘을 주다 보니, 온 몸에 다시 힘이 들어가는. 이거 아닌데.

 

5.

어떤 데에서 올해의 책 선정 해달라는 부탁이 왔다. 지방 여행 중이라, 바로 답변을 못했다.

 

잠시 생각을 했다. 올해의 책 선정을 전혀 안 한 건 아닌데, 나는 무슨 심사위원 이런 거 안 한다. 내일은 그 얘기를 하고, “저는 빼주세요”, 통화를 해야겠다.

 

그런데 이런 마음에는 약간의 심통도 있다. 지 책도 제대로 못 파는데, 무슨 심사는 심사. 한 물간 노털 느낌 드는 것도 좀 편치는 않다. 써야 할 글도 잔뜩 밀렸구만, 책 선정이나 하는 건, 약간 가슴이 서늘한 느낌도.

 

좀 더 넓게 마음을 먹고, 이것도 예, 저것도 예, 그냥 그렇게 대충 살아야 하는데, 지켜야하는 원칙이 아직은 너무 많다. 이것도 안 해, 저것도 안 해, 이건, 그냥 기분 나빠서 안 해..

 

애 보는 아빠가 이 정도는 좀 가려도 되지 않나, 나에게만 넓고 관대한.

 

teleology라는, 목적론이라는 개념이 있다. , 별로 안 좋아한다. 그래서 생태학 공부를 시작하게 되기도 하였다. 인생에 도달할 목표, 그딴 거 없다. 하면 뭐하게? 하면 더 행복해질까?

 

개인이 집을 사는 게 목표가 아니라, 국민들이 집 같은 거 고민하지 않게 해주는 게 북구 스타일이다. 아직은 전환기다. 국가의 목표가 하나하나씩 개인에게 전이되어, 개인들이 결국 악과 깡으로 살게 만드는 개떡 같은 나라 흔적을 아직도 못 버렸다.

 

목표는 국가가 고민해야 하는 거지, 개인은 목표 같은 거 필요 없다. 그게 선진국이다.

 

꿈이라는 것은 로보트 태권브이를 만들고 싶다, 달나라에 가보고 싶다, 그런 것을 꿈이라고 부른다. ‘해저 2만리같은 것이 꿈이다 (그리고 쥘베른은 해저2만리에서 제국주의가 진짜 꼬진 것이라고 끊임없이 외친다..)

 

그래도 어쩌겠냐, 국민들 소득수준은 선진국인데, 개도국 수준도 채 못 마치는 청와대 행정을 보면서 살아야 하니, 자꾸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그래서 어깨에 힘을 빼고 또 빼야 한다. 그러면 정말 좋은 볼을 던질 수 있게 된다. 언젠가는.

 

(국립 제주박물관에서 다섯 살 둘째가 난리를 치면서 찍어준 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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