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쓰는 책들은 작게는 30개 많게는 50개 정도의 꼭지로 구성된다. 처음부터 이걸 다 잡고 시작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대체적으로 시작하면서 아주 초기에 대체적인 꼭지들이 구성된다. 이걸 절이라고 부른다. 중간에 원고를 갈아엎을 때에도, 절이 없어지는 경우가 그렇게 많지 않다. 일종의 카드놀이처럼, 절을 재구성하는 경우가 많다.

 

꼭지를 먼저 잡고 구조를 만드는 경우는? 재밌는 작업이기는 한데, 아직까지는 장 구조를 먼저 생각하고 절은 그 다음에 생각하는 편이다. 절부터 잡으면 병렬형 구조가 된다. 취향상, 병렬형 구조를 그렇게 선호하지는 않는다. 겨울부터 쓰게 될 농업경제학은 50개 정도의 꼭지부터 잡고 시작하려고 한다. 이건 일반적으로 내가 쓰던 방식과 구조와 접근이 전혀 다를 것 같다. 그만큼 농업 얘기 접근이 어려워서, 특단의 대책을.

 

직장 민주주의는 33개 정도의 꼭지로 이루어진다. 그중 28번째가 병원 민주주의다. 인터뷰가 포함된 사례분석에 관한 것이다. 원래는 어제 쓰기 시작하려고 했는데, 어제, 오늘, 수면 부족으로 탈진, 결국 새로운 절에 들어갈 힘이 없어서 일단 포기.

 

책 시작도 어렵지만, 절도 시작하기가 어렵다. 게다가 쭉 연결되어서 앞의 꼭지의 내용을 받아서 뒤로 넘어가면 좀 나은데, 독립된 절의 경우는 매번 만만치 않다. 첫 문장을 못 써서 글을 뒤로 미루기보다는 일단 공격적으로 들어가는 편의 글을 주로 쓴다. 늘 시원스럽게 첫 문장을 시작하는 꿈을 꾼다. 그렇지만 만만치는 않다. 그런 점에서는 짝사랑 연애편지 쓰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오래된 연인과는 달리, 어쩌지, 어쩌지, 그런 고민을 담아서 뭔가 써야할 때, 그 느낌과 안 다를 것 같다. 익숙하지 않은 내용을, 익숙하지 않은 사람과 나누는 글의 첫 부분.

 

병원 민주주의는 골격이 되는 기본 내용은 잡혀 있는데, 이틀째 첫 문장을 시작하지 못해서 내내 미루고 있는 중이다. 이럴 때면 관련된 내용을 몇 개 써보고 다시 들어가면 도움이 될 때도 있다. 혹은 1보 후퇴, 며칠 신나게 딴 거 하고 놀다가 다시 오기도 한다. 그렇지면 너무 놀면, 뭐하다가 손을 놨는지, 아예 까먹기도. 하여간 지금까지 절의 첫 문장을 시작하지 못해서 쓰던 책을 집어던진 적은 없다.

 

병원 얘기가 어려운 게, 친한 사람 중에서 병원에서 일상을 보내는 사람이 없다 보니, 정서적으로 느낌이 팍 오지 않는 이유도 좀 있는 것 같다. 옛날 친구 중에는 의사들도 있고, 간호사도 있는데, 안 보지 너무 오래 되어서 정서적 느낌 같은 건 잘 모르겠다. 은행원, 공무원, 연구원, 이런 사람들이 겁나게 많다. 진짜로 일상적으로 보는 사람 중에는 의사도 없고, 간호사도 없고, 약사도 없고. 공무원, 교수, 교사, 연구원, 이런 사람들만 드립다.. 하나도 도움 안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애꿎은 OECD 자료만 계속 뒤적이고 있다. 병원 관련된 자료가 별로 없다. 다른 분야는 백서가 나오는데, 여기는 그런 것도 별로. 회사 특히 상장된 회사는 이렇게 저렇게 경영보고서 같은 게 공개되는데, 병원 경영 보고서도 잘 못 찾겠다. 헤맬 때 기본적으로 현황 자료들 쭉 보고 다시 마음을 가다듬는데, 병원이나 간호사 관련된 것은 그런 게 다른 데 비해서는 별로 없다. 물론 더 찾으면 어딘가 있을텐데, 그 내용이 바로 필요한 것은 아니라서 목숨 걸면서 병원 경영 보고서까지는 좀.

 

학위 받고는 병원 관련된 연구를 아예 안 한 건 아니다. 이래저래 내가 귀찮아서 깊이 들어가지는 않았는데, 고대병원하고 예방의학 관련된 정책 연구를 할 뻔한 적은 있었다. 연구의 제도 같은 것은 좀 심각하게 검토한 적이 있다. 의료제도도 health economics 연장선에서 몇 번 봤었다. 의사들하고도 연구를 아예 안 한 건 아닌데, 계속 만나거나 그렇게 알고 지내게 되지는 않았다.

 

아주 어렸을 때, 내 친구들 중에도 의사 되겠다고 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나는 그런 건 한 번도 되고 싶지가 않았다. 되고 싶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뭐 하는 건지 관심도 없었다. 하긴. 내가 관심 없는 것은 대부분의 직업 세계가 다 그렇다. 대학 들어갈 때까지도 직업에 대한 희망은 커녕 관심도 없었고, 대학을 졸업할 때에도 아무 관심 없었다. 그리고는 학위가 확정된 시점 쯤에 갑자기 덜컥, 클 났네, 뭐 먹고 살지그랬다.

 

그나마 의사 중에서 가장 많이 마음을 주고, 친하게 지냈던 사람이 수의사 박상표였는데. 아마 나와 낮술 마신 거의 유일한 의사일 듯. 대학로 근처 한 모퉁이에서 편육 놓고 낮술을 몇 번 했다. 나중에 그는 자살했다..

 

간호사라. 친척을 아무리 넓히고 넓혀도 간호사는 진짜 한 명도 없다. 그냥 느닷없이 이건 어떻게 생각해”, 그렇게 전화해서 편하게 물어볼 간호사 한 명 없이 인생을 살았다니. , 그런 의사가 없는 것도 마찬가지고. 만약에 농업 같았으면, 그럭저럭 수십 명 붙들고,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 그랬을 상황인데.

 

생각해보니 모든 걸 나 혼자서 분석하고 해결하려고 하다가, 가끔 어쩔 수 없이 벽에 부딪히는, 그런 문제인 것 같다. 직접 경험은 물론이고, 간접 경험도 없다.

 

그런데 나는 왜 병원 민주주의 같은 생소한 주제를 분석하려고 했을까, 그 출발지부터 다시 질문해보게 된다. 이게 다 태움 때문이야그리고 여자들끼리 있으면 남자들보다 더 하다는 얘기에, 그럴 리가 있나, 다 그런 구조와 상황이 있으니까 그렇겠지, 그런 약간의 열받음이 좀. 그리고 막상 조사를 하다 보니, 경영 및 관리 구조가 너무 허술해서, 뭐 이딴 게 있나 싶기도 했고.

 

병원 민주주의’, ‘학교 민주주의그리고 어쩔 수 없이 후퇴, 뒤로 미루어 놓은 삼성 민주주의’, 그야말로 난제 3종 셋트가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금요일에는 일본으로 출국한다. 그 전에 최소한 이 세 개는 마무리하고 갈 생각이었는데, 힘들 것 같다. 병원 민주주의를 아직 시작도 못했다. 그러면 열흘 넘게 딴 생각하다가 다시 이리로 돌아와야 하는데..

 

다행히 그 사이에 뭔가 새로운 것들이 생각이 많이 나면.. 그렇지만 너무 많이 나면 지금 여기로 다시 돌아오기가 어렵고. 뭐 하다 말았더라, 가물가물하기도 하다.

 

길어봐야 A4 두 장을 절대 넘지 않는 글들은 논리만으로도 쓸 수 있다. 그리고 보고서는 가능하면 논리만으로 쓰는 게 낫다. 위에 상관들이 보게 될 글은, 대가리에 어떤 넘이 있을지 모른다. 꼭 나랑 생각이나 결이 같은 사람이 있을 거라는 보장은 별로 없고, 별 쌩 양아치 같은 넘들도 내 보고서를 보고 결재 도장을 찍어야 하는 상황이니까.. 진짜로 감정이나 감정을 유발할 만한 요소들은 빼고, 논리만으로 쓰는 게 최고다. 약간이라도 감정을 넣으면 이거 쓴 새끼, 보나마나 빨갱이야”, 이런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나만 혼나는 게 아니라, 내 위에 있던 사람들 줄줄이 개박살.. 30대 초반에 내가 쓰던 보고서들은 그래서 감정은 뺄 수 있을 만큼 다 빼고, 혹시라도 감정을 유발할 만한 요소도 철저히 빼고, 극단적으로 드라이하게 썼다. 그 편이 더 효율적이다.

 

그러나 책은 논리만으로는 못 쓴다. 말이 좋아서 50개 꼭지지, 50개의 논리 덩어리를 읽으라고 하는 건데, 그건 고욕이다. 맞는 말이라도, 힘이 들어서 못 읽는다. 그리고 50개의 논리 덩어리를 다 통으로 동의할 사람은 거의 없다. 부부간에도 그러기 어렵다. 생각이 같은 거 일부, 다른 거 일부, 그렇게 구성될 수밖에 없다. 나랑 생각이 다른 사람 건 안 읽어, 그러면 고전 중에서는 읽을 수 있는 책이 한 권도 없다. 대충 참고 하면서 보는 거다. 그렇지만 논리만으로 구성된 50개의 꼭지는 요즘 같으면 읽을 사람이 없다.

 

그래서 감정이 필요하게 된다. 논리만으로 구성하면 글에 감정이 생기지가 않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가장 힘든 게, 쓸 때 감정을 만드는 일이다. 사실 논리는 자료 분석하고, 전체를 구성하다 보면 어느 정도는 세울 수 있다. 기능적인 일이다. 그거야 열심히, 대가리 박고, 군소리 안 하고. 그냥 하면 어느 정도는 한다. 그러나 감정을 만드는 것은, 힘든 일이다.

 

논리와 감정은 움직이는 방향도, 생성 방향도 다른 것 같다. 논리가 선다고 해서 감정이 그때 그때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더 어렵다. 책 특히 요즘 책은 그래서 감정이 더 어려운 것 같다.

 

한 때, 사회과학에서는 날 선 논리로 상대방을 죽죽 무찌르고 가는, 그런 무협지 스타일을 최고로 쳤던 것 같다. 그러던 시절이 우리에게도 있었다. 그러나 현실에서, 모두를 무찌르는 그런 최강의 논리라는 것은 없다. 상황과 맥락에 따라, 옳고 그름도 변한다. 마스터의 시대는 끝났다. 그래서 감정이 더 중요해진 것인지도 모른다. 부작용도 있다. 전혀 감정적인 요소를 느끼지 못하는 독자에게는, 그냥 논리만 세우는 것보다 더 다가가기 어렵다. 나도 안다. 그러나 현실은, 무협의 세계가 아니다. 우리 편, 남의 편, 이러는 것도 좀 이상하지만, 이기는 게 최고인 것만도 아니다.

 

어느 간호사가 자기 일기를 보여주었다. 나에게는 뭔가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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