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보통 새 책을 쓰기 시작할 때 부담을 느끼거나 긴장하는 일은 거의 없다. 첫 파일을 만들 때, 그냥 여느 일상과 똑 같은 기분으로 그렇게 시작한다. 이번에는 좀 다르다. 이게, 뭔가 엄청 단단한 벽 앞에 서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책을 시작할 때면 블로그 같은 데에 얘기를 시작하고, 사람들 반응을 좀 살핀다. 물론 그런 반응이 꼭 유의미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상관 관계가 있다. 직장 민주주의의 경우는, 진짜 벽 앞에 서 있는 것 같다. 아니면 바닥을 모르는 심연. 구멍 밑의 깊이를 살피기 위해서 돌을 던져봤는데, 바닥에 닫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느낌? , 이건 뭐지? 아무도 듣고 싶어하지 않는 old-fashioned love song… 요 느낌이다. 출간 기준으로도 나도 벌써 13년차다. 이런 식의 터엉, 요런 느낌은 처음이다. 반응의 감도는 알겠는데, 이유는 잘 모르겠다.

 

어쩌지? 방법 없다. 그냥 하는 수밖에.

 

2.

이 책 준비하기 시작하면서 줄넘기를 다시 시작했다. 전에는 책 쓰는 중에는 수영을 주로 했었다. 잘 하는 건 아니다. 그냥 다른 건 할 줄 몰라서. 수영장 안 간지 1년쯤 되는 것 같다. 그리고 그 전에도 한동안 못 갔고. 저녁 시간에 가야 하는데, 애 보다 보면 슁하고 나가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그 시간이면 너무 힘들어서 이제는 규칙적으로 수영장 가기가 어렵다.

 

왜 줄넘기를 갑자기 시작했을까? 큰 애가 줄넘기를 막 배우려고 하면서 집에 줄넘기가 생겼다. 애들 것 뺏어서 줄넘기를.

 

설경구를 직접 만난 적은 없다. 그냥 건너 들은 얘기다. 힘들 때 죽어라고 줄넘기를 했다고 한다. 설경구에 대한 사람들의 판단은 격렬하다. 하여간 그가 힘든 시기를 겼었고, 아직도 겪고 있다고는 알고 있다. 그가 줄넘기를 하던 그 시절, 나는 그냥 술만 마셨다. 사실 나도 그 시절, 그만큼 삶의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난 그냥 술만 마셨다.

 

설경구의 고난이 이제는 끝이 났을까? 아직은 잘 모른다. 영화 <불한당>에서의 연기는 꽤 산뜻했다. 그 시절에 그가 줄넘기를 하루에 만 개씩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도 그냥 술만 마셨다.

 

술 마시고 책 쓰는 사람도 있다고 알고 있다. 좋고 나쁘고는 아니고, 스타일 문제다. 나는 한 잔이라도 마시면 그 날 일은 마감이다. 사진도 안 찍는다. 그렇기는 한데, 책 쓸 때 술을 자주 마시기는 한다. 이유는 많은데, 하여간 평소보다 자주 마신다.

 

3.

다음 주부터는 직장 민주주의 책 쓰기 시작한다. 이번 책 쓰는 동안에는 줄넘기를 하기로 했다. 안 그러면 내가 못 버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술을 아예 안 마시겠다, 그러면 좋겠지만, 그런 건 좀 어려울 것 같고. 책과 관련해서 술을 마시지는 않기로.

 

이 정도면 내가 책과 관해서 가지고 있는 루틴을 거의 다 깨는 셈이다. 하고 싶어서 하는 건 아니다. 직장 민주주의라는 개념이, 그만큼 벽 앞에 서 있는 것처럼 나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이제 나는 더 이상 분노로 움직이지도 않고, 경제적 필요로 움직이지도 않는다. 그럼 절실함으로 움직이는가? 절실함, 그딴 것도 없다. 절실한 마음으로 내가 했던 것은, 사회적으로는 유의미했던 것 같기는 한데. 대체적으로 나에게는 아픔만 주었다. 나의 절실함은 나를 위한 절실함은 아니었던 것 같다.

 

재미가 있으면 딱 좋겠지만, 직장 민주주의는 재미와는 좀 거리가 먼 주제다. 특히 나에게는 이제 더욱 더 그렇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재미로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 같다.

 

명분은 있다. 이게 중요하다는, 그런 명분은 있다. 그러나 명분만으로 사람이 전력투구하게 되지는 않는다. 명분을 향해서 움직일 때, 자기도 모르게 몸이 좀 굼뜨게 된다. 움직이기는 하는데, 머리 꽁지가 서면서 피가 팍 몰리는, 그런 느낌까지 오게 되지는 않는다. 그게 명분의 한계다.

 

그럼 이번 책은 무슨 힘으로?

 

나는 줄넘기의 힘으로 하려고 한다.

 

설경구는 하루에 만 개를 했다고 한다. 된장난 해보니까 천 개도 못한다. 천 개는 커녕, 하도 간만에 하니까 500개도 할까 말까. 그게 나의 줄넘기의 힘이다. 그래도 그 힘으로 직장 민주주의라는 큰 벽을 한 번 올라가보려고 한다. 에게? 그래도 술의 힘이 아닌 게 어디냐. 잘 와닿지도 않는 당위와 명분의 힘 보다는 그게 나을 것 같다.

 

그래도 이 힘든 일을 하는데, 나한테 보상이 좀 있어야 할 것 아니냐? (하루에 줄넘기 천 개 하고 무슨 보상!!)

 

내가 제일 하기 싫은 게 강연이다. 이번 책 무사히 마무리하고 나면, 책 나오고 하는 강연을 제외한 나머지 강연은 이제 내 인생에서 포에버 굿바이. 장소, 주체,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이제 더 이상 강연은 안하는

 

그리하여 나는 하기 싫은 줄넘기를 나에게 강요하고, 그 대신 무사히 마무리하면 따로 부탁받아서 하는 강연은 다시는 안 하는 것으로 내 안의 거래를 마쳤다 (나도 뭔가 남는 게 있어야…)

 

이렇게 나는 새로운 책을 시작하기 위한 준비를 마치게 되었다.

 

나도 진짜 몸부림을 치는 중이다.

 

(간만에 애기똥풀 접사를 찍다 얻어걸린 벌. 조리개를 조금 더 조이고 싶었는데, 꿈지락거리면 벌은 그냥 날라가버린다. 그냥 사정 되는대로... 이 사진을 찍으면서 나는 다음 주부터 쓰기 시작할 새 책에 대한 걱정을 하고 있었다. 이 긴장된 상황에서도 걱정이 내려가지를 않는다...)

Posted by reti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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