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권택 감독의 영화를 그렇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이거야 내 취향이니까. 나는 그보다는 훨씬 더 B급 감성을 좋아하고, 류승완의 '아라한 장풍 대작전', 요따구 영화를 더 좋아한다. (이 영화에, 최근처럼 유명해지기 전의 칩거 시절 이외수가 등장한다.)

 

하여간 그래서 임권택 영화는 뜨문뜨문 보고, <서편제>는 영 내 취향 아니다. 하여간 그렇긴 한데.

 

얼마 전부터 쿡 TV를 PD 저널 칼럼 때문에 달게 되었고, 이 안에 VOD 영화들이 있어서, 틈 나면 하나씩 꺼내본다. 그렇게 해서, 정말로 집에서 뒹굴뒹글 하다가 짜장면 시켜먹으면서 동네 비디오 가게에서 보다보다 더 볼게 없어서, 허름한 B급 영화들 중에서 대박을 기대하며 - 물론 대개는 실망하지만 - 보던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간 느낌이다. 쿡 TV의 VOD 서비스는, 정말로 비디오방이 TV 안으로 들어온 딱 느낌이다.

 

하여간 그리그리 하여 임권택의 2004년 영화, <하류인생>을 보았는데.

 

영화는 재밌고, 아련한 기억들을 떠올르기 해주었다.

 

나도 이제는 짤탱이 없이 아저씨인가, 뭐, 그런 묘한 후줄근한 느낌을.

 

제목은 하류인생이지만, 여기에 하류인생은 나오지는 않는다. 중요한 정치적 역할을 하는 무소속 진보주의 정치인, 초등학교 선생님이 된 그녀의 딸, 명동파의 결국 제일 잘 나가게 되는 주먹, 이런 사람들이 주로 나온다.

 

자꾸 시라소니 생각이 났고, "동데, 한 판 붙자우" 하던 <야인시대>의 대사가 자꾸 입에 감기는 듯한 느낌이었다.

 

수채화를 그리고 싶었지만, 결국 유화풍이 되어버린 어색한 느낌 속에 그야말로 '공화국' - 경향신문의 그 공화국 시리즈 - 의 출발이 생각나는 그런 영화였다.

 

여선생 역할을 맡은 여배우가 인상에 남았는데, 그녀의 이름이 김민선이었다. 영화를 짝짝 입에 붙게 맛갈나게 해주는 역할을 해주었는데, 한국 영화에서 이런 여배우를 본 게 도대체 몇 년만인가, 박수를 다 쳐주고 싶었다.

 

하여간 임권택 손에만 들어가면, 하류인생도 상류인생이 되어버리는, 아주 묘한 불균형이 있는데, 어떻게 보면 그 교묘하게 만들어진 불균형이 바로 임권택의 영화를 예술로 만드는 그 힘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김민선이 어깨에 힘 주고 연기했다면, 우와, 또 임권택 필 난다, 하면서 우웩 했을텐데.

 

정말로 어깨에 힘 빼고, 부드러우면서도 도저히 살아갈 길이 없었던 60~70년대의 한국 여인들의 묘한 내적 모순들, 그걸 김민선이 재연한 것 같다.

 

폐암으로 돌아가신 막내 이모 생각이 났고, 어렸을 적에 우리 집에 놀러오시던 그 수많던 교대 출신의 여 선생님들, 나에게 이모라고 말해주던 그 수많은 얼굴들이 살짝 머리를 스쳐갔다.

 

이제는 할머니가 된, 그 당시에는 드문 양장을 곱게 차려입고 우리 집에 놀러오시던 그분들, 지금은 어디서 무얼하실까, 그런 지나버린 시절의 노스탈지아가 살짝 느껴지면서.

 

2004년도 영화인데, 그래도 시간을 다루는 데에는 임권택 만한 사람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 참 다루기 어려운 소재인데, 임권택은 간만에 B급 영화 찍던 다작 시절의 감성을 잠시 회복한 듯 싶었다. 어떻게 보면, 이건 임권택이 자신을 위해서 만들었던 영화인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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