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닝의 무지막지한 활용법) 

 

1.

행운이나 불운, 별로 과학적인 용어는 아니다. 확률과 누적효과 혹은 후광효과와 같은 간접효과로 설명할 수 있다. 문제는, 우리가 그런 전체 데이타를 알 수가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일부는 나중에 사후적으로 알 수도 있지만, 사전적으로 그런 모든 데이타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만약 그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면, 세상에 전쟁은 사라질 것이다. 그건 인공지능도 마찬가지다. 인공지능이라고 해서 행운과 불운에서부터 해방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 가지 행운과 불운이 갖는 법칙적인 양상이 있기는 하다. 이런 것은 깡패와 같다. 혼자 다니지 않고 꼭 몰려 다닌다. 고등학교 다닐 때 버스를 타고 다녔다. 4대의 서로 다른 경로로 집에 갔다. 이 버스들은 종종 깡패들처럼 같이 다녔다. 행운도 몰려서 오고, 불운도 몰려서 온다. 좀 따로따로 다니면 좋겠다. 하여간 몰려 다니면서 나쁜 짓 하는 놈들은 다 깡패들이다.

 

내 삶에 가장 큰 변화가 그 시절에 생겼다. 결혼하고 9년 만에 아이가 태어났고, 연달아 둘째도 태어났다. 둘째는 날 때 숨을 쉬지 못해서 바로 집중치료실로 들어갔다. 세 살이 되었을 때 폐렴으로 입원을 했다. 그리고 퇴원한지 얼마 안되어 다시 입원을 했다. 요즘 세상에 폐렴은 병도 아니다. 폐렴은 아무 문제도 아닌데, 폐가 다 아물기 전에 다시 폐렴이 오면 이제 천식이 된다. 어린 시절의 폐렴은 감기 수준인데, 천식은 평생 고생을 하게 된다. 아내가 천식이 있다. 큰 아이 가졌을 때 천식이 심해져서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었다. 그렇지만 폐렴으로 병원에 입원했다는 사실 때문에 마음이 움직인 것은 아니다.

 

병원에 입원한 아이의 다리는 정말이지 나무 젓가락처럼 가늘었다. 그 때 진짜로 존재론적인 고민을 했다. 과연 인생에서 뭐가 중요할까? 아이가 천식을 갖게 되면, 평생 나는 후회할 것 같았다. 그래서 외부에서 하던 일들을 모두 정리했다. 매일 움직여야 하는 일은 물론이고, 주기적으로 시간을 정해놓고 하는 일도 할 수가 없었다. 아이는 언제 입원할지 몰랐다.

 

그 해에는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크게 생각한 일은 크게 안되었고, 작게 생각한 일도 크게 안되었다. 하나를 하면 하나가 안 되었고, 둘을 하면 둘이 안되었다. 나중에는 무서워서 아무 것도 안 했다. ", 아이를 위해서 희생하는 일이야", 이렇게 대범하게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그게 되면 부처님이 되어 벌써 열반했지, 뭐 하러 여기에서 여기에서 이렇게 궁상맞게 살고 있을까?

 

나만 안 되는 게 아니라 내 주변의 동료들도 다 집단적으로 헤맸다. 하다 힘드니까 동료의 아내가 강화도에 용하다는 점집에 갔다 왔다.

 

"동지 때에는 다 되어 있을테니까, 걱장하지 마시고들..."

 

달리 기댈 데도 없으니까, 동지까지 꿈 참았다. 그리고도 동지가 한 번 더 지나갔다. 염병, 다시는 점쟁이 얘기에 귀를 기울이나 봐라. 너무 힘드니까, 사주에 대한 얘기를 만들어보자는 제안들이 있었다. 나는 택도 없는 소리 하지도 말라고 했다. 힘들면 점집 가게 되어 있다. 그게 사람이다.

 

나중에 지나보니까, 그게 아홉수였다. 열 아홉 살 때에는 차에 치어서 죽을 뻔 했다. 그 때부터 나는 덤으로 사는 인생이 되었다. 그리고 50이 될 때, 죽도록 힘들었다. 아이까지 덩달아 힘들었다. 그래서 알게 되었다. 아홉수는 과학이다. 아멘! 그냥 외울 일이다. 난 행운도 믿지 않고 불운도 믿지 않는다. 그러나 아홉수는 믿기도 하고, 외우기도 한다. 그건 과학이니까.

 

나는 둘째와 죽어라고 놀아주고, 먹을 것을 챙겼다. 그 후로도 두 번 정도 폐렴이 왔고, 독감으로 응급실에도 한 번 갔다. 그러나 체중이 늘어나면서 병원에 입원은 하지 않고 버텼다. 기분이 너무 좋았는지 밥을 네 그릇 먹은 날이 있었다. 몸무게가 태어날 때 하위 5%였다. 이제는 중간 정도 된다. 나의 아홉수도 끝났다.

 

2.

아홉수를 지내는 동안에 내가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아홉수 한 가운데를 지나가는 여름에 내 차를 없앴다. 쓰는 돈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급한 일이 생기면 아내의 경차, 빨간색 모닝을 빌려 탔다. 지방에 자주 가게 된다. KTX를 타면 생기는 마일리지가 교통카드처럼 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마일리지 가지고 핸드폰으로 버스와 지하철을 탈 수 있다. 핸드폰은 교통 카드에 비하면 인식이 잘 안 된다. 70살이 되어야 가능한 교통버스 무료 시대에 일찍 들어갔다.

 

경차를 타면 어떤 좋은 일이 있을까? 아침 기도 100일 하는 것보다 낫다. 면벽 수도 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깨우치게 된다. 교회나 절에 다니면서 훌륭해진 사람을 보기는 쉽지 않다. 경차를 타면 그것보다는 더 빨리 훌륭한 사람이 된다.

 

길에서 빨간색 모닝에게 양보하는 차는 거의 한 대도 없다. 벤츠는 형님이라고 부르게 되고, BMW는 큰 성님이라고 부르게 된다. 벤츠는 가끔은 모닝에게 차선을 비워주는 거룩하신 일을 하신다. 그래서 마음 속 깊이 형님이라고 부른다. BMW는 아직 양보하는 차를 한 대도 못 보았다. 똥은 더러워서 피한다. 조폭 피하는 것과 같다. 잠깐이라고 긁히거나 스쳐도 집에 있는 스피커를 내다 팔아야 하는 불상사가 일어난다. 나는 누구에게나 양보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렇게 양보하다 보면 결구에는 마음도 바뀐다. 큰 성님이, 아마도 급한 일이 있으실 거야. 시내에서 나는 아무도 추월하지 않는다.

 

고속도로에서는 겸손과 자연을 배운다. 빨리 오는 차는 무조건 피해준다. 가끔 1차선에도 들어가지만, 그것은 자연의 법칙에 맞지 않는다. 자연은 원래 느린 것이고, 천천히 변하는 것이다. 생태학을 그렇게 오래 공부했지만, 나는 자연에 대해서 1도 몰랐던 것 같다. 느리게 움직이는 자연과 같아졌다.

 

그리고 나는 감사하는 법을 배웠다. 고속도로 톨게이트에서 절반의 비용을 내면서 감사하고, 주차장에서 반값을 내면서 꼬박꼬박 "고맙습니다"라고 인사한다. 나는 한 게 아무 것도 없다. 그냥 아내의 차를 빌려 타고 왔을 뿐인데, 그들은 나에게 특혜를 준다. 진정으로,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감사하는 마음이 생겨났다.

 

모닝에도 같이 타고 가주는 사람은 친구다. 모닝이라서 차를 보여주고 싶지 않고, 같이 가자고 말 하기도 민망한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친구 아니다. 지금은 큰 애 덩치가 커져서 카 시트 하나를 떼었다. 거의 대부분의 시간에 카시트가 두 개나 달려 있었다. 그래도 앞에 한 자리 남은 걸 같이 타는 사람은 진정한 친구다. 나는 누가 내 친구고, 누가 친구가 아닌지, 이해하게 되었다.

 

불편함이 없지는 않다. 워낙 엔진 힘이 딸려서 고속도로에서 고속 주행을 길게 하면 무릎과 허벅지가 아프다. 일정을 잘못 잡아서 오후에 울산, 저녁 때 청주에 가야 할 일이 생겼다. 울산과 충주 사이를 한 번도 안 쉬고 최고속도로 주파해야 했다. 모닝은 그 주행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그리고 이틀은 운전을 안 했다. 요즘 나오는 모닝에는 기본형 크루즈 정도는 달려 나온다.

 

나 말고 내 주변에서 경차 타는 사람은 두 명이 있다. 이준익 감독은 영화 <소원>을 찍던 시절부터 레이를 타기 시작했다. 지금은 미니쿠페를 탄다. MBC 해직기자인 이상호도 레이를 탄다. 상호와는 고등학교는 달랐는데, 동네 친구였다. 아주 오래된 친구다.

 

모닝과 함께 나는 아홉수를 보냈다. 아홉수가 끝나자 아내는 취직이 되었고, 다시 상근을 시작했다. 둘째가 아프면서 아내는 전에 다니는 직장에 사직서를 냈었다. 나도 다시 차가 필요하게 되었다. 다시 모닝을 살려고 했다. 아내가 '쌍모닝' 할 일 있냐고 질색을 했다. 그 꼴은 보기 싫다고, 아내가 버스를 타기 시작했다. 다시 차를 살 명분이 없어졌다.

 

모닝이기는 하지만, 윈터 타이어는 달려 있다. 눈 와도 어린이집은 가야 한다. 윈터 타이어 단 모닝은 전국에 몇 대 없을 거라고 한다.

 

영화 <여배우>에서 윤여정이 이런 얘기를 한다.

 

"내가, 출연료 깎자고 하면 막 화가 나다가도, 그래 내가 피부가 좀 안 좋지, 이러면서 참아."

 

영화 참 많이 봤다. 지금도 많이 본다. 영화 <여배우>가 내 삶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영화가 되었다. 화가 막 나다가도, 그래 참 내가 모닝이지, 이러면 길 가는 모든 차를 다 형님으로 모시면서 살 수 있다. 마음 속으로 배우 윤여정을 선생님으로 모시게 되었다. 생각보다 나는 차별을 많이 받고 살았다. 그걸 부당한 대우라고 생각했는데, 그 때마다, 참 내가 좌파지, 그러고 참았다. 좌파라서 참는 것보다는 모닝이라서 참는 게 훨씬 더 우아하다. 둘째가 아픈 다음에 나는 예전보다 훨씬 잘 참고, 기꺼이 참는 사람이 되었다. 아이를 키우면서 부모의 마음이라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모닝 타고 다니면 저절로 잘 참는 사람이 된다.

 

3.

경차 전부는 아니고 모닝만 가지고 출고차 통계를 비교해 본 적이 있다. 젊은 여성이 경차를 많이 탈 것이라는 사람들의 생각은 전혀 검증되지 않는다. 다섯 살씩 나이를 끊으면 40대 초반과 50대 초반이 가장 많이 탄다. 40대 후반과 50대 후반은 좀 덜 탄다. 성별 차이는 남자가 약간 많은데, 운전사 비율까지 고려하면 거의 없다고 볼 정도다. 그냥 일반적인 상품 분석을 해보면 연령과 세대 효과는 크지 없고, 경제성 효과가 가장 크다고 보는 게 맞다. 50대 초반은 20대보다 두 배 약간 안되게, 30대보다 월등히 많이 경차를 탄다.

 

이 수치들만 놓고 보면 한국에서 남의 눈치 제일 안 보고 사는 사람들은 40대 초반이다. 40대 중반이 되면 이젠 좀 눈치를 본다. 그리고 다시 50대가 되면 눈치 안 보기 시작한다. 외제차 판매 비율의 추이와 비교를 해보면, 거의 정확하게 역순이다. 노인들이 경차 탈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거의 안 탄다. 60세 이상부터 경차 비율이 뚝 떨어지고, 65세 이상에서는 이제 2%대다.

 

역시 또 다른 경차인 스파크의 광고는 과학적이고 체계적이다. 신구가 손녀가 탈 차를 골라서 며느리에게 사주는 얘기다. 지금 한국의 자연스러운 추세는 그렇다. 나이를 먹으면 경차만 덜 타는 게 아니라, 자 자체를 덜 탄다. 그리고 언젠가, 아예 운전을 할 수 없게 된다. 모건 프리먼이 나오는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 (1989)> 70이 넘어서 운전을 할 수 없게 된 데이지 여사가 새로 온 운전사와 벌어지는 인간적 갈등에 관한 영화다.

 

모닝을 타면서 느낀 것은, 386이라고 불리게 될 내 또래 친구들에게 해줄 얘기가 생겼다는 것이다. 50, 살아남은 자들은 외제차와 관용차를 놓고 경쟁한다. 많은 경우, 관용차를 선호한다. 그게 안되면 더 비싼 외제차를 산다. 그리고 자기 자존심이라고 한다. 수많은 이유를 단다. 수의를 입은 최순실이 "민주주의 특검이 아니다"라고 고함을 쳤다. 그리고 "너무 억울하다"고 말했다. 이것을 지켜보던 청소 아줌마가 짧게 외쳤다.

 

"염병하네."

 

정부 부처에서는 전에는 1급까지 관용차가 나왔다. 그러다가 자기 차에 기사만 제공을 했는데, 세종시로 내려가면서 이제는 장차관에게만 관용차가 나온다. 민간기업에서는 전무급 본부장들부터 관용차가 나온다. 공기업 감사에게도 나온다. 그걸 위해서 경쟁을 한다. 수컷들의 전쟁터 같은 어깨 싸움은 결국 관용차를 놓고 벌이는 자기들끼리의 경쟁이기도 하다. 이럴 필요가 있을까? 대통령이나 국회의장처럼 정말로 경호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경호용 차량이 나가는 것은 맞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렇지 않은 자리는 자기 차를 가지고 오고, 차량 기사만 제공해도 좋을 것 같다. 차가 없으면? 렌트 비용을 내면 되지 않는가?

 

70년대 군사정권 이래로 관용차는 권위의 상징이었다. 87년의 주역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관용차를 내려놓으면 사람들이 변화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차가 경차라면? MB가 집권하고 청와대 직원들이 더 작은 차를 타는 흐름을 만들었다. 그들도 그 정도는 했다. 386이라는 이름에는, 이제 저항과 희생이라는 상징은 사라졌다. 권력 투쟁, 자리 독점, 단물만 먹는 세대, 그런 상징이 곧 불을 것이다. 그리고 유럽의 68세대와 노동자 정치인들이 결국 그렇게 된 것처럼, 부패라는 오명이 붙을 것이다. 우리가 관용차를 양보하고, 경차로 바꾸면? 우리의 역사가 생겨난다.

 

노무현 정권 초기에 진짜 젊었던 386 국회의원들이 "우리도 이제는 골프를 쳐야 한다"고 골프장으로들 달려갔다. 바로 정권 말아먹었다. 청렴, 정직, 희생, 이런 건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경차는 눈에 잘 보인다. 교황이 한국에 방문했을 때 소울을 행사용 차량으로 사용했다. 물론 그 뒤에도 소울의 판매가 한국에서 늘지는 않았다. 교황이 아무 생각 없이 작은 차인 소울을 선택했겠는가? 교황청은 상징의 대가들이다. 경차가 상징이 되는 것은 나쁘지 않다.

 

경제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많은 50대 초반은 지금도 경차를 많이 탄다. 자연스러운 흐름이기도 하다. 50, 돈 아껴 쓰기 시작해야 하는 나이다. 아직도 살 날이 많다. 이제 청와대에 가거나 공기업 간부가 되는 내 또래 친구들에게, 관용차 대신 경차를 타는 것을 진지하게 고민해보라고 권해주고 싶다.

 

UN 협상가 시절에 느낀 것이다. 미국은 먼 거리 가는 공무원들은 비행기 비즈니스 탄다. 우리는 국장급 이상만 탄다. 미국은 우리보다 부자라서? 작은 정부를 추진하는 것은 미국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국가든 회사든, 비행기 마일리지를 개인에게 준다. 그러나 정부 돈으로 생긴 마일리지를 정부가 갖는 것이 맞는 것 아닌가? 그렇게 모은 정부 마일리지로 힘든 여정을 가는 공무원들은 국장급 아니더라도 비즈니스로 승격시켜 준다. 마일리지를 뺐길 공무원들에게는 섭섭한 일이겠지만, 그게 다 국민의 돈이다.

 

내 친구들에게 잠깐이라도 경차를 소유하는 경험을 해보라고 말하고 싶다. 관공서 같은 데 경차 자리가 따로 있다. 아무리 자리 없더라도 주차 관리원이 경차 자리 정도는 어떻게든 마련해준다. 아무 데나 쑤셔 넣고 갔다 올 수 있다. 남이 나를 보는 것은 잠깐이지만, 통장의 돈은 실익으로 남는다. 김기춘은 70이 넘어서도 관용차 타는 맛을 들였다가 감옥 갔다. 그들은 그들의 시대를 아직도 살고 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아직 오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의 시대를 살아야 한다. 그래도 요즘 경차는 핸들에도 열선 들어가고, 무적의 완소 아이템 '엉뜨'도 있다.

 

우리가 만들어갈 50대는 관용차와 외제차의 시대가 아니라 경차의 시대면 좋겠다. 그래야 나중에 한열이 볼 면이 서지 않겠나? 50대 엘리트들이 경차의 새로운 고객으로 돌아오는 것, 이 정도는 해야 87년의 주역들이 진짜로 지금 세상을 바꾸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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