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박의 시대를 맞아, 많은 것이 바뀌었다. 가장 큰 것은, 친구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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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궁상도 끝까지 가면 미학이 된다. 궁상주의 미학, 진짜로 우리는 슬픈 척하고 못난 척하는 것을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궁상이 통하지 않으면 갑자기 민중을 들이대며 자존심 싸움을 벌였다. 극단적으로 낮은 곳으로 가거나, 극단적으로 높은 곳으로 가는, 그런 게 다 궁상주의 미학의 주요 요소들이었다. 궁상의 꽃은 '센치'였다. 이건 멋있다는 얘기와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센치멘탈 블루스라는 표현이 있다. 센티멘탈의 센티를 ''리고 쓰면 안 된다. 그러면 '센치'한 느낌이 안 난다. 가을에는 본격 센치였고, 겨울에는 눈 와서 센치, 봄에는 남들 봄놀이 간다고 센치 그리고 여름에는 더워서 센치, 마이마이에 테이프를 꽂고 센치멘탈 블루스의 세계에서 나올 줄 몰랐다.

 

멋장이를 의미하는 댄디라는 단어는 90년대 중반 정도에 유행을 했던 것 같다. 아마도 최초로 댄디라는 단어를 달아도 좋은 정치인은 YS였을 것 같다. 하여간 웃겼고, 옷도 잘 입었다. 그리고 잘 생겼다. 해방 이후로 한 방에 그렇게 많은 사람을 웃긴 정치인은 아직도 없었을 것 같다. 2012년 그는 이런 말을 했다.

 

"박근혜는 사자가 아니다. 아주 칠푼이다. 사자가 못 된다."

 

그 때 우리는 YS가 한 칠푼이라는 말의 의미를 잘 몰랐다. 원래는 팔푼이라는 말을 썼는데[, 거기에서 1푼 뺀 것이 칠푼이다. 팔푼이만도 못하다는 YS의 말이 무슨 말인지, 진짜로 아무도 몰랐던 것 같다. 순실이 사건이 나고 나서야 그 말의 의미를 알게 되었고, YS의 유머 속에 얼마나 큰 통찰력이 있었던 것인지를 뒤늦게 알게 되었다.

 

궁상주의 미학이나 댄디즘 모두 IMF 경제위기 이전의 얘기다. IMF와 함께 궁상주의의 시대도 끝났고, 댄디즘의 시대도 끝났다. 흥청망청할 정도로 풍요를 누리던 한국 경제는 21세기의 문턱을 제대로 넘지 못했다. 그리고 한국의 미학은 길을 잃었다. 궁상도 아름다움의 한 방법이고, 댄디즘도 한 방법이다. 집단과 대중의 미학이 사라진 다음, 아름다움의 시대는 끝이 났고, 마케팅만 남았다. 궁상주의 미학의 시대에는 사람들의 궁상을 마케팅이 따라왔다. IMF 경제 위기 이후, 마케팅이 아름다움을 지정했고, 사람들은 따라갔다.

 

몸에 맞지 않는 미학, 사람들은 아름다움에 대한 생각을 잊게 되었다. 생각과 삶 그리고 아름다움이 제각각 놀고, 그것들이 제일기획 같은 기획사 데스크에서 만들어지면서 미학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사라졌다. 궁상주의 미학이 멋지지는 않다. 그래도 그것에는 미학이라고 부를만한 요소가 있는데, 한국의 마케팅은 아직 미학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다. 루이 비통에 입성하며 그 자체로 하나의 미학이 되어버린 마크 제이콥스의 그런지(grunge) 패션, 아직 우리에게는 너무 먼 곳의 이야기이다. 샤넬이 시대가 여전히 흘러가고 있지만, 우리는 박근혜와 함께 난데없는 한복 세계화 바람이 불었다. 사회의 미학은 없고, 자본의 미학은 천박했다. 그러다 보니 시대의 미학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홍준표가 자기 네 당 행사인 '청년 아무 말 대잔치'에 가서 진짜 아무 말을 막하고 왔다.

 

"시골 가서 개량한복 입은 사람은 전부 좌파라고 보면 된다."

 

홍준표가 하고 싶은 말의 느낌은 알 것 같다. 그렇지만 자기들이 여당이던 시절에 추진하던 한복 세계화와는 정면으로 충돌하는 말이다. MB 때는 한식 세계화를, 박근혜 때는 한복 세계화를 정부에서 세게 밀었다. 홍준표는 자기 편 쪽으로 드리볼하고 들어간 셈인데, 나는 홍준표의 미학은 무엇인가, 물어보고 싶어졌다. 아름다움, 과연 이 시대의 미학은 무엇일까?

 

3.

30대가 되었을 때, 나는 궁상은 궁상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상명하복이 너무너무 싫어지기 시작했고, 엄숙한 것이 견디기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센치는 청승일 뿐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원래 멋이 없던 것이었나, 아니면 21세기에 들어오니까 멋이 없어진 것일까? 청승맞은 것이 싫어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내가 가지고 있던 원래 감성하고도 잘 안 맞는다는 생각이 문득 문득 들었다. 만약 그 시절 내 삶이 편안했더라면 그냥 익숙한 감성과 미학을 고수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고, 무엇보다도 내가 하는 일에 내가 만족할 수가 없었다. 지금 돌아 보아도 그 시절의 하루하루는 전부 다 지워버리고 싶다. 그 시절에만 힘들었던 것이 아니라, 지금 생각해도 힘들고 지겨웠다. 시간이 지나면 과거의 많은 것들이 아련해지면서 그리워지기 마련인데, 지금도 그립지 않다,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가끔 그 시절로 돌아가는 꿈을 꾸기는 한다. 악몽이다.

 

1년만 더 채우고 일했으면 기술사 시험을 볼 수 있는 자격이 생기는 시점이었다. 다른 건 아쉬운 게 없는데, 기술사 자격증을 볼 자격을 생각하면서 마지막까지 고민을 했다. 지금은 한국에너지공단으로 이름을 바꾼 에너지관리공단에 결국 사직서를 냈다. 글을 쓰고 싶다는 정도의 생각만 했지, 뭘 구체적으로 생각해놓은 것은 없었다. 살면서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반대하는 데도 내린 결정이 가끔 있다. 그래도 이 때 사직서를 낼 때처럼 아무도 찬성하지 않은 경우는 없었다. 회사의 조건이 나쁜 것도 아니고, 내 처지가 그렇게 비극적인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행복하고 싶었다. 왠 만큼 사는 것, 적당히 누리는 것, 그게 아니라 행복하고 싶었던 것 같다. 행복? 아직도 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엄청나게 불행하다고 느낀다면, 행복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어쨌든 조금만 더 참고 기다리면 3급 부장에서 2급 부장으로, 슬슬 승진이 기다리고 있던 시점에 내가 내린 결정을 이해한 사람은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했다. 아주 가끔, 하고 싶지 않은 일도 했다. 시민단체와 일했고, 녹색당 만드는 일을 했다. 그리고 친구가 도와달라고 해서, 그 시절의 민주노동당이 원내에 진출할 때 같이 했었다. 하고 싶은 일이었다. 물론 폼은 안 나고, 누가 알아주는 일도 아니지만, 나는 그런 일을 하고 싶었다. 행복했다. 내가 왜 공부를 했는지, 내가 왜 태어났는지 좀 알 것 같았다. 내 주변에는 환경운동 등 시민단체와 민중운동 혹은 노동자 정치를 하는 수많은 도시빈민들로 넘쳐났다. 그들과 무엇인가 하는 일은 보람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결혼도 했다. 즐겁고 행복한 시간들이었지만, 나는 건강을 조금 잃었다.

 

그 때 내 삶의 기조가 된 것이 명랑이었다. 명랑하고 싶었고, 명랑한 일만 하고 싶었다. 명랑하게 된 것인지, 명랑을 추구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궁상주의를 더 이상 좋아하지 않게 된 것은 맞는 것 같다. 그 시절에 쓴 글을 모은 책이 <명랑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였다. 아직 30대였다. 궁상주의 미학으로 30대를 시작했지만, 30대를 마칠 때에는 명랑주의에 더 가까워져 있었다.

 

나는 댄디즘 같이 개성과 화려함을 추구할 형편은 못 된다. 그건 잘 생기고, 잘 난 사람들에게는 정말 어울릴지도 모른다. 남 앞에 서는 것도 별로 안 좋아하고, 누군가를 이끄는 것도 행복하지 않다. 그냥 나는 20대를 보내면서 내 몸에 꾸질꾸질하게 배어있던 궁상을 조금이라도 털어내고 싶었고, 센치해야 멋져 보일 것 같은 착각을 줄이고 싶었을 뿐이었는지도 모른다. 명랑은 그 중간에서 찾아낸 타협점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시민단체와 질 것이 거의 뻔한 싸움에 앞에 서 있을 때, 민주노동당이 처음으로 원내에 국회의원을 만들 때, 나는 행복했다. 그 행복이 명랑을 만든 것일지도 모른다.

 

아마 이명박이라는 질척질척거리는 시대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30대의 미학을 내 삶의 마지막까지 끌고 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모두가 진지하고 엄숙하고, 훈계조라고 하더라도, 난 혼자서라도 충분히 명랑하게 살아갈 수 있었을 것 같았다. 혼자 놀기는 진짜 잘 하는 일이다. 명박 시대, 불의 혹은 부정, 부패, 그런 단어로 이해하기 참 어려운 시대다. 거대한 늪같이 질척거리던 시대였다. 그리고 그 시대가 끝나기 전에, 친구가 죽었다. 나의 명랑 시대도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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