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쓰기와 보람

 

몇 년 동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요즘은 그래도 아이들이 덜 아프고, 내 삶에도 약간의 루틴이 생겼다. 몇 년째 밀리고 밀려온 책들을 요즘 정리하는 중이다. 언제가 하기는 해야 하는 일이라서, 별 일 없는 요즘 약간 무리해서 하는 중이다.

 

사회적 경제와 관련된 책이 나가면서 나도 이것저것 잔상이 많아졌다. 내가 하는 공부는 처음부터 비주류 중의 비주류, 비인기 종목들이었다. 누군가는 해야 하기는 하는데, 아무도 하고 싶어하지 않는, 그런 것들을 공부하는 걸 좋아했다. 비인기이거나 너무 일찍, 그래서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그런 주제들을 다루었다. 당연히 책도 인기가 없는 종류이다.

 

미세먼지를 다루었던 <아픈 아이들의 세대>로 데뷔를 했다. 요즘은 인기 종목이 되었지만, 내가 그 주제 다루던 시절만 해도, 그런 게 있는 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허걱허걱, 겨우 1쇄 다 털고 절판되었다. 복간하자는 얘기가 있기는 했는데, 그 때는 내가 정신이 없어서 손을 댈 수가 없었다.

 

비주류의 비주류, 마이너의 마이너, 그게 학문적으로 내 위치다. 생태학, 농업, 사회적 경제, 이런 걸 20대 때부터 봤다. 좌파 내에서도 노동과 관련된 주제, 재벌과 관련된 주제, 이런 건 그 시절에도 인기 종목이었다. 내가 성격이 좀 더럽다. 남들이 다 하려고 하는 것, 그런 건 갑자기 하기가 싫어진다. 남들 다 하는데, 뭐하러 나까지 해? 그런 생각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런 인기 있는 분야는 어깨싸움도 많이 해야 하고, 줄도 잘 서야 한다. 어깨싸움도 싫고, 줄 서는 건 더더욱 싫었다.

 

얼마 전 정세균 국회의장이 갑자기 연락을 해서, 난데없이 차를 한 잔 마시게 되었다.

 

"너네는 설에 왜 세배 안 와?"

 

그게 첫마디였다. 정세균과 친한 사람들은 세배 가나보다. 내가 이끌던 전문가 집단은 정세균계로 분류가 되었었나보다. 한 때는 친문으로 분류되다가, 한 때는 친 김종인, 또 한 때는 반 김종인, 그렇게들 분류를 하다가 나중에는 정세균계로 분류를 했다고 한단다. 알 게 뭐냐. 나는 누구한테도 줄 선 적 없고, 앞으로도 아무에게도 줄 설 생각 없다. 늙은 아빠가 아이들 줄 맞춰서 밥 먹이는 것만으로도 힘들다.

 

그래도 설날 세배 얘기 들으면서 아주 오래 전 강사시절 생각이 났다. 시간강사들, 우리들끼라는 주니어 박사 혹은 주니어라고 부른다. 설날이 되면 아주 괴롭다. 주류에 해당하는 선생들 중 한 명을 골라서 세배를 가야 한다. 물론 간다고 뭐가 생기는 건 아닌데, 안 가면 아주 괴로워진다.

 

누구한테 줄을 서야 하나? 고민을 하다가 그냥 설 전날 술 때려 마시고 푹 자버렸다. 내가 아버지한테도 세배 안 하던 시절인데, 세배는 누구한테! 공무원 시절에도 세배를 가는 걸 봤다. 역시 안 갔다. 그리하여 결국 이 날 이 때까지, 아무한테도 세배를 한 적이 없다. 

 

그래서 주제도 비주류, 살아가는 패턴도 비주류, 난 늘 혼자 있는 게 좋았고, 혼자 노는 게 좋았다. 어깨싸움도 싫고, 패거리도 싫고. 학자가 된 이후로, 그렇게 혼자 지냈다. 그러나 보니, 내가 다루는 주제가 자연스럽게 비주류의 비주류, 절대로 팔리지 않을 주제의 책이 되었다.

 

<사회적 경제는 좌우를 넘는다>, 그래도 이렇게 잘 다루기 어렵고, 해봐야 티도 안 나고 인기도 없을 책을 발간시키고 나면, 보람이 느껴진다. 이 번 책이 특히 그렇다.

 

앞으로 나올 책들도, 별로 다루지 않고, 방치된 분야의 책들이다.

 

이제 슬슬 마무리 작업으로 들어가는 <국가의 사기> 역시, 별로 인기 주제는 아니다. 금융사기와 다단계 사기 얘기로 시작하지만, 주된 내용은 경제에 관한 행정 분야이다. 경제 행정, 역시 인기 없다. 경제 공무원은 누구나 되고 싶어하지만, 이걸 어떻게 견제하고, 어떻게 폭주를 막을 것인가, 그런 건 비인기 종목이 된다.

 

작년 7월부터 준비하기 시작한 소설책이 한 권 있다. 이건 에너지와 전기에 관한 이야기이다. 빠르면 8, 늦으면 9월에 나올 것 같다.

 

아이들 낳고 난 이후로 나는 긴축생활 중이다. 버는 돈은 유동적인데, 나가는 돈은 고정적이다. 줄이고 조심하는 수밖에 없다. 그래도 소설책 준비하면서 이번에는 히로시마에 취재 여행을 갔다 올 생각이다. 히로시마 공과대학에서 찾아볼 게 좀 있다.

 

소설책 준비하면서 모아둔 자료들이 좀 있고, 조금 더 모을 생각이다. 한국에서는 한 번도 다루지 않은 주제이고, 세계적으로도 드문 주제이다. 물론 외국에서 많이 다루지 않은 건, 한국에만 집중적으로 발생하는 문제라서 그런 것이고. 자료들 모으다가, 충분히 의미 있는 자료가 걸리면 에너지 책으로 발간할 생각도 있다. 그만큼 좋은 자료가 모일지 아닐지, 아직은 모른다. 잘 모아지면 출간할 생각은 있다.

 

내가 다루는 주제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닌데, 생소하다. 그리고 사람들이 대중적으로 원하는 것과는 반대의 결론 그리고 시각 자체가 반대인 경우가 많다. 한 마디로, 싫어할 주제들이다. 그런 얘기 안 하고 싶어하는데, 그래도 우리 모두의 미래를 위해서 이런 고민도 해야 하는 것 아니겠어? 그런 마음으로  책을 준비한다.

 

그렇게 몇 년 준비한 책들이 실제 발간되면, 진짜로 보람이 느껴진다. 물론 내가 준비한 모든 책이 다 발간되는 건 아니다. 결론이 영 없다, 그러면 막판이라도 포기한다. 누군가는 해야 하는데,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가면 그것도 못한다. 농업경제학이 그렇다. 박근혜 시절에, 농정은 개판 정도가 아니라 진짜 반대편으로 갔다. 그런 걸 한 번 털어야 한다는 생각은 드는데, 도저히 엄두가 안 난다. 이게 주요 현장이 대부분 지방이라서, 이거 할려면 차부터 사야 하는데,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

 

새만금과 관련된 다큐나 책을 하나 준비해볼 생각이 있는데, 이것도 엄두 안 나기는 마찬가지다. KBS MBC에서 다루면 그만인데, 영 난색이다. KBS에 토스하고 털려고 했는데, 토스가 잘 안 된다. 대선 전에는 보수 정권이라 힘들다고, 대선 끝나고 나니 청와대에서 싫어할 거라고 눈치보고. 이런 

 

나는 살아가는 게 편한 사람이다. 예전에는 힘들었지만, 요즘은 특별히 어려울 것도 없고, 아이들도 제일 힘들 때는 한 고비 지나서, 진짜로 한시름 놓았다.

 

TV나 언론에서 다루지 않는 일들, 신문에서도 맘 먹고 다루기 힘든 긴 호흡의 얘기들, 이런 것을 다룰 때 책이 매체로서는 확실한 장점이 있다. 몇 년 준비해야 하는 일, TV에서는 50분 이내로 다루고 그만이다. 실제로 TV 다큐가 스스로 주제를 정하고 분석하는 것은 아니고, 많은 경우 누군가가 기초 연구를 해놓고 어느 정도 정리를 해놓으면 그걸 가지고 따라가게 된다. 장기 기획, TV 다큐는 못한다. 게다가 정권 눈치도 많이 봐야 하고. 당당하게? 노무현 때에도 그렇게는 못했고, 신정권에서도 포괄적 자유는 있더라도 구체적 자유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신문은? 역시 마찬가지다. 누군가 집요하게 몇 년간 들여다봐야 하는 일, 신문도 그런 일은 못한다.

 

정부 연구소? 장난치나? 언제 정부가 자신에게 불리한 것을 진지하게, 그것도 긴 시간을 가지고 연구하게 해주는 것 봤나? 연구원들 월급이 지나치게 인센티브 위주로 구성되어서 소신을 가지면, 배고프거나 쫓겨나거나. 장기 승진 누락되면 버티기가 힘들다.

 

매체로서 책만이 갖는 장점과 힘이 있다. 그리고 그 한 구석에서 나도 힘을 보태고 있다고 생각하면, 보람이 느껴진다. 보람이 밥 먹여주나? 보람은 삶의 의미를 준다. 내가 왜 사는가, 그런 문제로 머리를 쥐어뜯지 않을 수 있게 해준다. 어느 교육부 국장이 민중은 개돼지라고 했다. 나는 공무원이 그런 소리를 술 자리에서라도 하지 않을 나라를 꿈꾼다. 그래서 내 삶이 보람 있는 것이다.

 

시장에서의 주류 상품, 학계에서의 메이저, 공직에서의 간부들, 그런 데에서 다루지 않는 주제를 나는 다룬다. 그게 내가 생각하는 내 삶의 작은 보람 중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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