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점심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토요일 점심, 아내와 아이들이 외출한 이후, 동네 식당에서 혼자 육개장을 먹었다. 특이할 것은 아무 것도 없는 메뉴, 간만에 혼자 먹는다는 것 말고는 정말로 특이할 게 없다.

그래도 오늘 점심은 진짜로 특이했다.

어제 박근혜 탄핵이 있었다. 판결문은 생각보다 어조가 강했고, 전원일치로 판결이 나왔다. 그리고 그 다음 날, 간만에 아무 걱정이 없는 날이었다.

지난 10년간, MB 이래로 늘 걱정이 마음 한 구석에, 그야말로 '램상주' 프로그램처럼 상주하고 있었다. 그게 없는 첫 날이었다. 정말이지 아무런 걱정이 없었다.

내가 하는 일들은, 그냥그냥 잘 된다. 어려운 고비들도 많았는데, 이렇게 저렇게, 고비들을 조금씩 넘기고 이제는 자리를 잡아간다. 그렇다고 무슨 엄청난 변화가 생기고 그런 건 아니다. 그저, 세 끼 밥 먹고 살 걱정까지는 없다는 정도...

DJ가 당선되고는 기쁘다고 할 수가 없이, IMF 경제위기 한 가운데였다. 나는 별 일 없었는데, 주변 사람들이 워낙 힘들어서 기쁘다는 생각 자체를 가질 수가 없었다.

노무현의 당선 때는 어땠을까? 며칠 기뻤다. 아주 잠시. 그리고 인수위 명단 보던 순간부터 마음이 확 잡쳤다. 아니나 다를까, 인수위 뒤로 흘러나오는 온갖 잡소리, 거기에 첫 인선들.

내가 정부에서 더 할 일은 없다고 생각하고, 정부 출범한 다음 주 사직서를 냈다. 아직 결혼하기 전인 아내에게 내가 그만둘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하는데 몇 주 걸렸다. 실제로 결혼은 그 후 1년 후에 했다.

가끔 그 시절 얘기를 하면, 노무현 정부 사람들이, 그렇게 알았으면 얘기를 좀 해줘야 했었을 것 아니냐, 내 탓을 한다.

난 그냥 실무 팀장일 뿐이다. 그 선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고, 그렇다고 비선 따라따라 더 위에 "이건 아니다", 그렇게 말할 상황도 아니고.

MB가 되었을 때, 뭐 우리는 바보가 아니니까 그 몇 달 전에는 알았었다.

좃됐다...

이 생각이 들었다.

근혜가 되었을 때, 들었던 생각은 하나다.

도닦자...

다음 날 사놓고 방치되었던 유모차 조립을 했다. 큰 애 태어난지 4개월째 일이다.

MB가 당선되기 직전, 가장 친한 친구가 암으로 죽었다. 오늘 혼자 밥 먹다가 든 생각이, 딱 그거다.

이재영, 참 아깝다...

근혜가 탄핵되기 몇 달 전, 한 살 위의 선배가 암으로 죽었다. 스트레스가 과하면...

노무현 시절에 정부연구소 원장하다가 MB 때 '코드인사' 한다고 쫓겨난 선배도 몇 달 전 암으로 죽었다. 화만 내다 인생의 마지막을 한 번도 웃어보지 못하고...

정말로 아무 걱정 없는 순간, 어른이 되면 그런 순간이 몇 번 없다. 그리고 지난 10년, 아무런 걱정도 없는 순간이 정말로 단 한 번도 없었다. 걱정이 아주 많거나, 그나마 걱정이 좀 줄거나, 그렇게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살았다.

앞으로도 걱정스러운 일이 또 생겨날 것이다. 새로 출범할 정부가 잘 한다는 보장도 없고, 또 그냥 잘할 것이라고 멍하니 보고만 있기도 그렇다.

그래도 미래의 걱정까지 당겨서 미리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어제의 걱정이 어제 끝난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다.

또 걱정이 생기고, 또 조바심낼 일이 생길 것이다. 그러나 그건 그 때 가서 고민하려고 한다.

혼자 앉아서 먹었던 육개장 한 그릇, 정말로 아무 걱정 없이 밥알 하나하나의 맛을 음미하면서 먹었던 밥, 진짜로 오랫만이다.

벌써 20년 전이다. 학위 막 끝내고 한국에 오기 전, 잠시 별 걱정없이 그냥 편안하게 살았던 적이 있었다. 그 때 이후로 처음인 것 같다.

막 학위 받고 제일 처음 제안받은 자리가 아시아 WTO의 아시아담당관이었다. 파리 생활을 7년을 했는데, 또 제네바에서 직장생활을? 그렇게는 못 하겠다고 그냥 서울에 왔다.

그 시절, 큰 걱정이 없었다. 시드니와 싱가폴 같은 데에서도 제안이 왔는데, 그냥 편하게 살래요, 그렇게 하고 서울에 왔다.

그 이후로는? 진짜로 걱정 없는 날이 거의 하루도 없었다.

내가 오늘 얼마나 마음이 편했는가?

며칠 전에 받아놓은 강석훈 선생 전번을 만지작 만지작거리면서 차나 한 잔 하자고 해볼까, 말까, 그렇게 다른 사람을 다 챙길 정도다.

그 양반한테 개인적으로 고맙다고 해야 할 게 좀 있다. 오래된 것도 있고, 그렇게 오래되지 않은 것도 있고. 1년 반 전인가, 국회에서 만나서 소주 한 잔 하자고 서로 신신당부했었다.

그리고는 쪼르르, 나는 아기 아파서 집으로 왔다. 그 양반은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갔다. 이 난감한 시절, 소주 한 잔 마시자고 얘기하기가 좀 그랬다. 순실이 파동이 날 줄, 그 때 그가 알아겠는가? 나도 잘 몰랐다.

대통령 직무정지 그리고 탄핵, 그 시간에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지내는 게 어떤 마음일까? 그래도 위로를 좀 해주고 싶었을 정도로, 내가 오늘은 편한 마음이다. 진짜로 편안하게, 아무 걱정 없이 밥 한 그릇 먹었다.

살면서 진짜로 아무 걱정 없이 밥 먹을 수 있는 날이, 그렇게 몇 번 안된다. 이제 50, 어른이 된 이후로 편안하게 먹은 밥이 진짜로 손가락에 꼽을 정도다. 그리고 오늘이 갑 중의 갑이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 내일, 마음에 깊이 남을 편한한 한 끼를 할 수 있었으면 한다. 원없이 맘 편해도 되는 날, 인생에 몇 번 없다.

다행히 둘째 애의 거친 기침이 어제 조금 가라앉았다. 오늘은 편해도 되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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