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운동연합 토론회에서 쓸 발제문 쓰고 나니까 2시가 넘었다. 30대 때에는 관련된 거의 대부분의 토론회 발제문을 썼었다. 40대 때에는, 초반에는 좀 쓰다가 나중에는 꾀가 나서, 아예 토론회 참석을 안했다. 바쁘다는 핑게를 댔지만, 핑게는 핑게일 뿐이다.


옛날 서울말로 나이가 50이 되면, 입은 다물고 지갑은 열라고 했다. 그 말이 진리라고 생각하고 살았다. 내가 본 많은 영감들이 나이를 먹으면 지갑은 점점 더 꽁꽁 닫고, 입을 엄청 열었다. 이것저것 사정 아는 처지에, 정말 꼴값이라는 생각 많이 했었다, 내 처지에, 여전히 지갑을 열 형편은 아니다. 미안하니까 입이라도 연다는 건데, 이게 참 꼴값이라는 생각이 든다. 저 나이 되면 저러지 말아야지 하고 살았는데, 딱 그렇게 생겨먹는 꼴이다. 진짜 간만에 토론회 발제문 쓰고 나니, 역시 나도 나이를 먹으니까 지갑 대신 입을 여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인가?


근혜 말대로, 내가 이러려고 공부했나, 자괴감 들어...


50이 넘으면서 단호함 같은 게 생기기는 했다. 재미와 즐거움을 위해서 움직이고, 보람이 있는 일을 피하지는 않겠다... 내가 생각하는 경제가, 모두가 재미와 즐거움 그리고 보람에 의해서 움직이는 그런 세계이다. 돈 때문에, 의무감 때문에, 그게 좋은 건 아니다. 잠시 그렇게 움직일 수는 있지만, 평생 그렇게 움직이면 삶 자체에 자괴감 외에는 남는 게 없다. 돈이 모든 것을 보상해줄까? 돈은 잠시 행복하게 해주지만, 길게 기쁨을 주지는 않는다. 생물학에서 얘기하는 역치의 법칙 그대로이다. 없으면 티가 금방 나지만, 있으면 조금 더 있다고 해서 조금 더 행복해지지는 않는다.


돈 없으면 꽝이다, 사회 구성원들끼리 서로 이렇게 얘기하는 사회, 좋은 사회는 아니다. 정상적인 사회도 아니고. 성숙과는 거리가 먼, 그저 순실이 같은 얘들한테 놀림받기 딱 좋은 사회 아닌가 싶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정말로 대한민국이 순실이 놀이터였다. 신나게 놀고, 재밌게 놀고, 딱 털고 나가려는 순간, 그야말로 재수가 없어서 걸린 거 아닌가 싶다.


한국이 빠른 시간에 그렇게 좋아질 것 같지는 않다. 그래도 우리 아이들이 자랐을 때, "돈 없으면 꽝이다", 너도 알고 나도 알고, 그런 것을 법칙처럼 모시지 않아도 좋은 사회를 만들고 싶다. 그 편이 서로에게 편하다. 돈과 권력이 마법의 열쇠가 되어서 뭐든지 열고 다닐 수 있는 사회, 그렇게 좋은 사회는 아니다. 한국의 상층부, 마법 열쇠 들고 다니는 순실에게는 그냥 훌렁훌렁 열렸다. 그들이 청년에게는, 약자에게는 또 얼마나 단호하게 잘 난 척을 하시고, 갑질들을 하셨는지...


스스로 돌아보게 된다. 지갑을 열 수 없으면, 입이라도 다물어야지... 토론회 발제문 다시 들여다보면서, 이렇게 떠벌떠벌 입을 여는 게 과연 잘 하고 있는 것인가, 다시 한 번 물어보게 된다. 그냥 머리 박고 살면서, 이래라 저래라, 그런 거 절대 안하고, 참견질, 상관질, 조언질, 이딴 거 없는 삶, 그렇게 살고 싶다.


입을 열면, 약속을 하게 되고, 약속을 하면 지키고 싶어지고, 그렇게 되면서 집착이 생긴다. 그리고는 욕심이 생긴다. 되고 싶은 것도 생기고, 이루고 싶은 것도 생기고. 그리고 이런 게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그게 바로 꼴불견이다. 순실이도 자신은 충신이 되려고 했다는 거 아니냐...


그렇다고 살아있는 사람이 아예 입을 다물 수는 없고. 어떻게 입을 다물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앞으로 1년간 곰곰히 생각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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