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1차 시장

 

1.

팔순이 다 되는 전병석 선생이 간만에 차 한 잔 하면 좋겠다고 하셔서, 2년 만인가, 다시 차 한 잔 했다. 그 또래의 영감들 중에서 주기적으로 뵙는 분들이 몇 분 있다. 그리고 많이 배운다. 뭘 배울려고 만나는 건 아닌데, 그렇게 오래 산 양반들을 만나면 느껴지는 바가 없지 않다.

 

<데미안>을 처음 읽은 것은 6학년 때의 일이다. 소설이 원래 얘기하려고 했던 거는 잘 이해하지 못했고, 사과 술을 만드는 과정, 그런 게 제일 기억에 남는다. 그렇게 만든 칼바도스 같은 사과술이 있다는 것은 아주 나중에 알았다. 그리고 소설 <개선문>에서 주인공이 칼바도스를 마실 때마다 나는 <데미안>을 처음 읽던 초등학교 6학년 시절의 내 모습을 떠올렸다. <독 짓는 늙은이>도 그 시절에 읽었다.

 

<갈매기 조나단>은 중학교 1학년 때 읽었다. 이 두 책을 읽는 순서가 바뀐 것 같지만, 어쨌든 그렇게 읽었다. 나중에 어른이 되고 나서 조나단 얘기가 그렇게 우아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중학교 1학년 때에는 정말로 재밌었었다. 그리고 다음에 읽은 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이건 도저히 이해도 못하고, 왜 보는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내 주변의 여학생들은 정말로 이걸 재밌게 읽었다. ", 베르트르여, 나의 베르트레여", 이렇게 시작하는 시로 독후감을 쓴 친구가, 그걸 다 읽지 못하고 울었던 것은 평생 잊기 어려운 기억이다. 끝까지 읽기도 힘든 저 소설에 감명 깊어하고, 슬퍼하고, 그리고 그걸 동감하는 내 또래 친구들이 그렇게 많다는 데에, 놀랐다. 정말로 놀랐다. 나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덮고 바로 펄벅의 <대지>를 읽었다. 진짜로 재밌었다.

 

데미안이나 조나단, 내 인생에서 잊지 못할 책들이다. 그걸 출간한 사람이 전병석 선생이다. 그 앞에 앉으면 세월의 기억이 묵중하게 다가온다. 책을 생명처럼 생각하고, 그 삶을 귀하게 여겼던 양반들의 시절이다.

 

전병석 선생도 경제학도였다. 그 시절에 공부하던 얘기를 하고 싶으시면, 이래저래 나에게 연락을 한다. 그 또래 할아버지들 중에는 직접 아는 분도 있고, 건너서만 전설처럼 아는 분도 있다. 하여간 이 양반이 살면서 지키고 살았던 것은 딱 두 가지라고 하신다. 땅을 사지 않는 것, 주식을 하지 않는 것한국 최초의 주식 전공책도 이 양반 출판사에서 냈는데, 초고를 보니까 자본주의에서 허가된 도박이 바로 주식이라는 생각이 드셨다고팔순이 다 된 지금까지, 그걸 지키고 사신다.

 

그런 삶을 마주 대하면, 배우는 것이 적지 않다.

 

2.

저자로 데뷔한지, 나도 이제 10년은 넘었다. 그 동안에 많이 변했다. 기본적으로는, 사람들의 시선이 많이 변했다. 10년 전에 책 쓰겠다고 하면, 걱정은 하면서도 "어려운 일 한다"고 사람들이 약간은 격려를 해주었다. 지금은 책 쓰겠다고 하면, 인생에 적응하지 못한 부적응자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약간의 안스러움, 약간의 경멸, 이런 시선으로 본다. 그 때나 지금이나, 사회과학 책이 거의 안 팔린다는 사실 자체는 변한 게 없는데, 약간의 존경심 같은 것도 사회적으로는 사라진 것 같다. 그 영광은 요즘은 웹툰으로 많이 간 것 같다. 만화와 사회과학 사이에 웹튠의 등장과 함께 교차한 지점이 있다.

 

객관적으로 보면, 가장 크게 변한 것은 1차 시장에서 2차 시장으로 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1차 시장과 2차 시장, 말 그대로 본원적 시장 혹은 선시장과 파생시장 혹은 후시장 사이의 차이이다.

 

예전에 텍스타일에서 파리와 밀라노 관계가 그런 선시장과 후시장 관계였다. 파리 프리미어 비전에서 그 시즌에 유행할 천이 먼저 선보인다. 그리고 1월달쯤, 미처 소화되지 않은 천 혹은 수요조절에 실패한 천이 시즌을 마감하기 전에 후시장으로 나오게 된다. 주로 밀라노에서 열렸다. 유명한 디자이너들은 선시장으로 가지만, 돈을 벌려고 하는 사람들은 후시장으로 갔다. 안목만 뛰어나다면 아직 시즌에 유행하지 않은 천을 대량으로 아주 싼값에 살 수 있다. 그리고 한국이나 중국 같은 개도국을 노리고 저렴한 가격에 크게 한 번 유행을 시킬 수 있다. 별로 틔는 안 나지만 떼돈 벌 수 있는 기회가 있다. 내가 알바로 무역 에이전트 비슷한 거 할 때, 선시장에서 후시장으로 넘어가는 트렌드 분석 같은 것을 했었다. 패션 시장에서는 손 뗀지 워낙 오래라서, 요즘은 후시장 구조를 잘 모른다. 런던 등 여러 곳으로 분산되었다는 얘기를 얼핏 들었다. 폼은 선시장이 나지만, 돈은 후시장이 더 벌기 좋다. 물론 기회 확률을 따지면, 결국에는 비슷해진다.

 

10년 전만 해도, 한국에서 책은 1시장이었고, 선시장이었다. 좋은 책이나 읽기 편한 책을 쓴 사람들이 책 시장에서 알려지고, 신문이나 방송으로 진출하는 방식이 가장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저자 발굴 방식이었다. 유시민도 그랬고, 진중권도 그랬고, 조금은 결이 다르지만 강준만도 그랬다. 어떻게 보면, 나는 그 시절의 맨 끝에 속했다고 할 수도 있다.

 

지금은 책 시장이 1시장도 아니고, 선시장도 아니다. 책으로 유명해지는 것이 아니라, 유명한 사람이 책을 쓴다. 그리고 유명한 사람의 책이라야 그나마 좀 팔린다. 한국의 사회과학 책 시장, 좀 넓게 보면 인문교양을 포함한 '양서 시장', 이 자체가 일종의 파생 상품이 되었다.

 

3.

지난 10, 책 시장과 비슷하게 움직인 시장이 한국에는 또 하나 있다. 정치인 시장이 그렇다.

 

원래 정치는 정치로 유명해지는 것이고, 그런 사람이 그 유명을 기준으로 다른 일을 하는 시장이다. 10년 전까지, 한국은 대체적으로 그랬다. 3김으로 대표되는 정치인들도 그랬고, 노무현도 그랬다. 그들이 무슨 방송을 하거나, 책을 내거나 아니면 또 다른 유명해지는 일을 해서 유명해진 것은 아니다. 민주화의 시절, 한국 정치는 1차 시장이고 선시장의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었다. '3김 시대 청산'이라고 하지만, 지나와서 보니까 3김만 청산한 것이 아니라 정상적인 정치 절차 자체도 청산된 듯하다.

 

지금은 정치를 해서 유명해지는 것이 아니라, 유명해진 사람이 정치를 하는 것이다. MB가 그랬고, 안철수가 그랬고, 조금 먼저는 문국현도 그랬다. 근혜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너무너무 유명한 아버지를 등에 엎고 모든 일을 했다.

 

정치가 정상화된다는 것은, 기초의회나 광역의회, 이런 데에서 성공을 만들어서 유명해지고, 그걸 자산으로 국회의원이 되거나 단체장이 되는 게 일반적인 상황으로 받아지는 것이다. MB가 튀어나오고, 트럼프가 튀어나오고, 장기적으로 보면 좋은 일은 아니다. 지난 10, 한국의 정치도 이렇게 길게 보면 좋은 일이 아닐 것이 일반화되었다. 기초자치단체장인 이재명의 경우는 어떨까? 조금 특이한 경우이기는 한데, 엄밀히 생각하면 자치의 영역에서만 전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아니다. 샌더스 모델과 유사한 점과 상이한 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4.

책과 정치가 1차 시장이나 본원시장이 아니라 2차 시장, 파생 시장이 되었다는 기이한 공통점을 왜 가지고 있을까? 여러 가지로 설명을 시도해볼 수는 있는데, 딱 찍어서 정확하게 말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어쨌든 결론적으로, 한국의 지식 사회 혹은 엘리트 집단의 재생산 구조에 문제점이 생겼다는 것 한 가지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엘리트 집단 역시 노후화된다. 그리고 부차적으로, 연성화된다는 얘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점점 더 딱딱한 지식이나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들고, 그들이 스타가 될 가능성이 줄어든다.

 

이어령이 서울신문 논설위원으로, 당대의 주요 소설들에게 시비를 걸던 게 26세이다. 그 뒤에 이어령만큼 똑똑한 사람이 한국 사회에는 태어나지 않은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그만큼 늙어갔고, 그만큼 벽이 높아졌다. 나이와 상관없이, 저자로서 혹은 작가로서 기성 세대에게 당당하게 버틸 수 있는 장치로는 책 만한 것이 없다. 이런 길이 점점 더 막혀간다.

 

젊은 정치인이 지역에서 성공하면서 정치로 유명해지는 것이 어려운 것만큼, 책으로 유명해지기도 어려워졌다. 이게 지금 당장에는 문제가 아니지만, 5, 10년 혹은 20년 후, 이런 장치를 유지한 사회와 그렇지 않은 사회 사이에 많은 차이가 있을 것은 분명하다.

 

5.

왜 책을 쓰느냐, 나도 10년 만에 다시 이 질문 앞에 서게 되었다. 재미 있어서 쓴 건 아니다. 10년 전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다. 그럼 돈이 없어서? 10년 전도 아니고, 지금도 아니다.

 

10년 전에는, 내가 생각한 것들을 정리해야 한다는 사명감 같은 게 있었다. 생태나 환경 혹은 문화와 같이, 당시에 내가 공부하던 영역은 한국에서 워낙 비주류이고, 좌파 내에서도 소수였다. '비주류의 비주류', 당시 내 위치였다.

 

지금은? 꽤 많은 책을 이미 썼고, 아직도 정리해야 할 것이 그렇게 많이 남아있지 않다. 물론 해보고 싶은 것과 써보고 싶은 것들이 아직 좀 남아있기는 하지만, 죽을 고생을 하면서까지 그걸 꼭 정리해야겠다는 열정은 이미 남아있지 않다. 나도 그 사이, 이제 나이를 먹었다.

 

10년 전에도 팔릴 것이라는 생각을 안하고, 누군가 해야 하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책을 썼다. 그 사이 출판 환경은 더 안 좋아졌다. 안 팔리는 것은, 몇 곱절로 더 안 팔리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책을 쓴다고 하면 '쯧쯧', 진짜 신세 망친 사람처럼 사람들이 지켜본다.

 

간단하게 10년 사이의 변화를 정리해 보면

 

안 팔리는 건 똑같은데, 격려라도 좀 받으면서 쓰는 것과, 만류를 무시하고 쓰는 것,

 

딱 그런 차이라고 할 수 있겠다.

 

왜 나는 책을 쓰는가?

 

그래서 이 질문에 답하기가 더 어려워졌다.

 

답을 하려고 해봤는데, 양심에 맞고, 논리에 맞는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답변을 가름하기로 한다.

 

잠시만

 

공식적이고 논리적인 대답은 이렇게 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속마음은, 한국의 책 시장이 1차 시장이 될 단초라도 생길 때까지, '조금만' 더 버틸 수밖에 없다고.

 

한국이 정상적이 된다는 말은, 책시장이 다시 1차 시장이 되고, 정치가 다시 1차 시장이 된다는 말과 같다. 유명한 사람이 정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를 해서 유명해지는 것, 이게 일반적인 선진국의 정치이다. 우리가 순실이와 함께, 그리고 명박과 함께 겪은 이 이상한 나라는 정상적인 나라가 아니다. 그 동안에, 우리의 정치는 아주 이상해졌다. 정치는 혐오재가 되었고, 정치를 한 사람은 '똥 묻는 사람'과 같은 취급을 받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이미 다른 걸로 유명해진 사람들이 정치를 한다. 그래서 뿌리가 얕다.

 

이런 게 정상적인 된다는 말과, 책이 정상적으로 된다는 것은 같은 과정이다. 동어 반복이기도 하다. 인과의 복잡성이 발생한다. 그렇지만 현상적으로, 결과적으로는 같은 것을 관찰하게 된다.

 

도매 서점 하나의 부도와 함께, 얕고도 얕은 뿌리를 가진 나무가 송두리째 흔들리는 중이다. 정상적인 상황도 아니고, 바람직한 상황도 아니다.

 

책으로 유명해지는 것이 아니라 유명한 사람이 책을 쓰는 지금의 상황, 사실 악몽과 같은 상황이다. 이 상태를 빨리 극복하지 않으면, 다음 세대에게는 '저자'라는 말은, 다른 유명한 나라의 저명한 저술가의 전설 같은 얘기일 뿐이다. 내가 본 태국이 그랬다. 자기 나라에 사회과학이라는 쟝르가 있고, 사회과학 저자가 있다는 얘기를, 내가 아는 태국 교수들이 정말로 부러워했다. 우리의 미래가 그래서는 안될 것 같다.

 

지금의 20~30대 젊은 학자나 저술가 중에서 책으로 유명해지는 사람이 나오는 것을 보고 싶다. 그래야 우리의 미래가 있다. 스위스, 스웨덴, 노르웨이, 인구 천 만도 될까 말까 한 작은 나라들이다. 문화와 학술, 강대국이다.

 

유명한 사람이 정치하는 나라가 정상적이 되기 어렵고, 이미 유명해진 사람들이나 책 쓰는 나라가 선진국이 될 수가 없다. 2017년 한국, 정치든 책이든, 악몽이다. 이 악몽은 빨리 깨어나야 한다. 순실이 패거리가 힘 쓰는 나라, 그 반대에 해당하는 의미가 과연 무엇이겠는가,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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