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해서 살 수가 없다

 

고려대에서 시작된 안녕하십니까 대자보, 처음 보는 순간 숨이 막히고 먹먹해졌다. 그렇다. 나도 안녕하지 못하다. 그리고 나도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길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냥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박근혜 정권에서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아무런 생각도, 아무런 준비도 없이 2013년이 시작되었고, 그냥 되는대로 살면서 이 한 해를 보내고 있었다.

 

내가 뭘 하든, 아무 것도 하지 않든, 아무 일도 바꾸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 이렇게 얘기하든 저렇게 얘기하든, 국가 기구를 사유물처럼 생각하는 박근혜 정권이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렇게 한 해가 갔다.

 

내가 올해 나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은, 내 개인의 행복과 영광을 위해서 살지는 않았다는 말

 

사실 아무 것도 하지 않았으니까.

 

그런 허탈하게 지나가는 시간의 연속 속에서 어느 날 대학생의 대자보 한 장이 날아들었다.

 

무기력감에 한 해를 보냈는데, 이 한 해는 내가 어른이 된 후에 경험한 그 어떤 시간보다 가혹한 것이었다. 2013년이 가혹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한 해에 한국 정부가 결정한 수많은 결정들, 그것이 향후에 어떤 문제를 일으킬지 너무 뻔해 보였다.

 

일자리는 점점 더 열악해질 것이다.

 

55세 이후로는 비정규직법안과 해당사항이 없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 100% 파견제라는, 전분야 파견직으로 내몰리게 된다. 한국이 일본보다 사회적으로 그나마 나은 게 아직 그들만큼 파견직이 전면화되지 않았다는 점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일본에 유아사 마코토라는 시민단체의 영웅이 있다. 동경법대 대학원에 다니던 그가 시민운동으로 나섰을 때 일본의 보수들이 바짝 긴장했다. 유아사 마코토를 지금의 영웅으로 만든 사건이, 바로 파견 마을라는 2008년의 파견직 대량실업 때였다.

 

한국에서는 신빈곤을 얘기하면 20대에 대해서 얘기하지만, 일본에서는 30대를 지칭한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대량 파업된 실직자들이 바로 파견직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세계 최대를 자랑하던 토요타의 30대 노동자들이 대거 길거리에 내밀렸고, 그들이 길거리에 텐트를 치고 농성을 시작한 게 바로 파견마을 사건이다.

 

지금 우리가 그 방향으로 가고 있다. 55세 이후로 일단 뚫리고 나면, 대부분의 공장 노동자들의 빈 자리를 그렇게 파견직이  채우게 된다. 청년들은 그나마 비정규직 일거리에서도 내몰리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한 번 뚫리면 일본처럼 파견직이 전면화되는 것은 순식간일 것이다.

 

내가 그 시절 일본에서 본 것은 지옥도라고 표현하고 싶다.

 

파견마을 사건 이후 유아사 마코토를 동경에서 만난 적이 있다.

 

그가 나에게 한 딱 한 가지의 얘기는

 

한국은 아직 파견까지 전부 뚫린 건 아니지 않느냐.

 

그랬다. 일하는 사람들은 점점 더 가난해지고, 파견을 주관하는 업체는 대기업이 되었다.

 

누구를 위해서 성장하는가, 누구를 위해서 일하는가?

 

그 질문을 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파견의 일반화이다.

 

유아사 마코토가, 그래도 한국은 낫다, 그렇게 말한 단 하나의 근거가 지금 부숴지는 중이다.

 

토건, 수없이 한 얘기이다. 박근혜 정부는 토건으로 맹속, 달려가는 중이다.

 

집값을 올리면 당연히 전세값도 오르고, 월세값도 같이 오른다. 전세 대책이라고 집값을 올리는 말도 안되는 얘기를 맹렬히 시행했다. 부양하면 집값은 단기적으로 오른다.

 

그런데 왜 거기에 우리의 세금을 써?

 

민영화, 역시 수도 없이 한 얘기이다. 수서를 핑계로 정부기관이 아닌 회사에게 운영권을 주면, 한미 FTA 때 유보받은 성과였던 2005 6월 이전에 만들어진 노선에 대한 정부 감독권을 포기하게 된다. 있는 조항을 정부 스스로 없는 걸로 만드는 전례를 남기는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냥 있었다. 뭘 해도 바뀌기 어렵다는 생각이 많았고, 또 그런 얘기를 목숨걸고 하고 싶다는 동기도 없었다. 그리고 비겁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미안해서 살 수가 없다그 말 밖에는 지금 할 말이 없다.

 

그래서 안녕하지 못하다.

 

그러나 미안하다는 말 외에 할 수 없는 이 상황이 더 싫다. 그 말 말고 다른 말을 하고 싶은데, 그리고 미안하다고 하는 것 외에 다른 일을 하고 싶은데

 

그러나 미안하다고 말하는 말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지금의 내 처지가 너무 싫었다.

 

시간제 일자리, 파견 노동, 이렇게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 막아야 하는 일은 너무 많다. 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대학생들의 대자보를 읽으면서, 며칠간 먹먹하던 생각이 요 며칠 조금 정리되었다.

 

이제 미안해하는 일은 그만해야겠다는 생각이다.

 

미안하지 않게, 뭘 좀 더 하고, 그래서 조금이라도 세상이 좋아지기 위해서 뭘 해야겠다, 그런 생각을 했다.

 

안녕하지도 못하고, 미안해하기만 하고, 혼자 고민만 하다가 맥 빠지는 일, 그런 일은 좀 덜 할 생각이다.

 

그래서 내년에는 미안해서 못 살겠다’, 이렇게 말하지는 않아도 되게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대학생들에게 지지를 표명하고, 감사하다고 말하는 것, 그런 미안한 일도 그만하고 싶다.

 

지식인이, 학자가, 전문가들이 제 정신을 차리고 있으면국가가 이렇게 사유화되는 황당한 꼴은 막았을 것이다.

 

침묵했거나 동조했거나, 그런 방식으로 사회적 공론장을 제대로 형성하지 못한 사람들의 잘못이 크다. 그리고 그 책임에, 나도 면제받을 길이 없다.

 

2013, 미안해서 살 수가 없다, 그렇게 글을 쓸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나도 나의 동료들과 친구들에게 말하고 싶다.

 

우리가 내년에도 이렇게 미안하다, 그렇게 속으로 움추리면서 그렇게 또 한 해를 보내면 안되지 않는가?

 

정의로운 사회가 아니더라고, 2013년의 한국처럼 너무 황당한 사회가 펼쳐지는 것은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미안해서 살 수가 없다, 그건 이번으로 끝내고 싶다.

 

- 우석훈

 

2013년 12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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