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계획을 짜다가

 

1.

행복한가, 이 질문을 종종 한다. 내 삶은 대체적으로 행복한 편이다. 그래도 지금 행복하지, 이런 말이 내 입에서 잘 나온다.

 

그렇다고 늘 행복했던 것은 아니다. 대학시절에 별로 행복하지 않았고, 가장 불행했다고 생각했던 것은 직장 생활 시절, 그러니까 외형적으로는 내가 가장 화려했던 시절이었다. 행복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우울했고, 그 우울함을 참을 수 없어서 계속 술을 마시고.

 

아내와 처음 만났을 때, 아내는 나를 굉장히 우울하고 침울한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실제로 그랬다.

 

사직서를 내고, 아주 가난하던 시절이 한동안 이어졌는데, 그 때는 삶은 어렵더라도 우울하지는 않았다. 그 기간 내내, 나는 행복했다.

 

그리하여... 나는 다시 행복한 사람이 되었다.

 

2.

올 가을, 정신 없이 뛰어다니다가 그 질문을 다시 했다.

 

지금 행복한가?

 

물론 행복하지 않다.

 

LG 2위 정도로 리그를 마무리하게 될지 미리 알았다면, 좀 다른 대답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잠시 선두에 있던 LG는 정신 없이 4위도 보장하기 어렵게 곤두박질 치고 있었고, 내 삶도 그렇게 곤두박질 치고 있었다.

 

우울하지는 않지만, 행복하지는 않았다.

 

그 때쯤 예전에 몇 번 보았던 영화 <머니 볼>을 다시 보게 되었다.

 

영화 보다가 내가 우는 건 아무 사건도 아니지만, 지난 수 년간 영화 보면서 울었던 것 중에서는 가장 강렬하게 울었다. 그냥 울고 만 것이 아니다. 머니볼의 마지막 장면을 생각하기만 해도 눈물이 났고, 요즘 내 파트너로 같이 작업하고 있는 이송원 PD에게 영화의 느낌을 설명하다가도 또 눈물이 났다.

 

진짜 며칠, 엄청 울었다.

나는 지금 행복하지 않다. 그렇지만 그 사실을 내가 알고 있으면 되는 것 아닌가?

 

3.

대선이 끝나자마자 시작한 올해, 지난 수 십년 동안 한 해 계획을 짜지 않고 출발한 첫 번째 해였다. 1년 계획은 물론, 2~3년 계획까지 촘촘하게 짜놓고 움직이는 게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물론 계획을 짠다고 해서 꼭 그렇게 되는 것도 아니고, 예상치 못한 돌발 변수들은 늘 일어나게 마련이다.

 

그렇지만 계획을 짜야 계획을 고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내가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가, 그걸 알 수 있게 된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나는 친구들과는 다른 방식의 삶을 살게 되었다. 내 삶은, 적어도 다른 사람의 삶과는 많이 달랐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전례가 없던 길을 가게 되었다.

 

경제학자가 영화 기획을 하게 되고, 그래서 영화 판권을 팔고, 또 다른 영화 기획에 참여할 것을 제안받는 상황... 내가 아는 한, 전례는 없다.

 

그래도 꼬박꼬박 계획을 짜면서 하나씩 걸어가다 보면, 별로 불안감은 없다. 잘 되면 계속 하는 거고, 해봐서 영 아니다 싶으면 접는 거고.

 

계획은 바꾸고 수정하라고 있는 거 아니냐? 그러나 계획도 없으면 너무 불안해진다.

 

2013, 올해가 정말로 아무 계획 없이 첫 해를 맞았던 해이고, 뭘 할지, 어떻게 할지 아무런 생각 없이 연초가 지나갔다.

 

올해는 정말로 되는대로 살았다.

 

그리고 가을이 시작되면서 나에게 지금 행복한가, 물어봤는데...

 

, 시방 나는 행복하지 않다.

 

그래서 영화 <머니 볼>을 보고 실컷 며칠 울고 난 후, 내년도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4.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하여간 내년에는 둘째 아기를 가질 생각이다. 아내도 원하고, 나도 그러고 싶고.

 

지금도 힘들어 죽겠는데, 아이 둘 키울 생각하면 정신이 아득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아내는 직장에 계속 다닐 계획이다.

 

좋은 아빠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성실한 아빠가 되는 것을 맨 위에 놓고, 그리고 다음 일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내년 봄이면 동네에 어린이 집이 생긴다. 하루에 몇 시간 어린이집에 아기 맡기고 할 수 있는 일 정도로, 내가 하는 일들을 대폭 줄일 생각이다.

 

그리고 보람과 의무감, 이런 건 당분간 접고,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할 생각이다.

 

내가 행복하지 않은데, 누구한테 행복에 대한 얘기를 할 수 있겠는가?

 

내년 가을에도 나에게 행복한가, 물어봤는데, 올해와 같이 행복하지 않다, 그렇게 답할 수 없는 삶, 그런 삶을 왜 사는가?

 

내 삶에 행복이 넘쳐야 사람들을 지켜줄 수가 있고, 길에 대해서 얘기할 수 있는 것 아닌가?

 

5.

지금 하는 일들은 대체로 내년 봄에서 여름 사이에 정리가 된다. 내년 7월을 경계로, 정말로 재미있거나 죽도록 보람 있는 일만 남길 생각이다.

 

학자로서 했던 일, 의무감으로 했던 일, 그런 일들은 올 겨울부터 시작해서 정리해나가려고 한다.

 

그리고 나도 뭔가 새롭게 배우려고 한다.

 

곰곰 생각해봤는데, 아비로서 내가 아들에게 가르쳐줄 수 있는, 평생을 갈 중요한 일은 빵 굽는 기술인 듯싶다.

 

물론 나는 요리는 조금 하지만, 빵 구울 줄은 모른다.

 

그거야 배우면 되는 거고.

 

아비로서, 내 아들이 먹을만한 빵 몇 개를 구울 수 있는 남자가 되면 좋겠다, 그게 내가 오랫동안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지식을 총동원해서, 정말로 곰곰이 생각해서 내린 결론이다.

 

내가 빵을 배우고, 빵을 굽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빵 굽는 어린이로 자라게 될 것 같다.

 

영어, 한글, 수학, 그런 건 몰라도 된다. 시간되면 천천히 배워도 되고, 잘 못해도 상관없다.

 

행복은 그것과는 상관 없다.

 

우리는 존재감을 과시하거나, 화려한 부를 휘두르기 위해서 혹은 잘난 척 하기 위해서 사는 게 아니다.

 

행복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다.

 

6.

그리고 나를 위해서, 평생 내가 했던 일 중에서 가장 재밌었고, 더 해보고 싶은 일이 뭔가, 생각을 해봤다.

 

이 결정은 비교적 쉬웠다.

 

머니볼 보고 감정을 정리하지 못해서 이것저것 생각하면서 울고 있던 시절, 영화사에서 같이 일하는 이송원 PD에게 올해도 내년작을 결정하지 못하면 문 닫기로 했다는 메일을 받았다.

 

영화 기획을 시작한지 3년쯤 되는데, 작년에는 아주 열심히 했고, 올해는 아무 계획도 없이 시작해서 아주 조금만, 뜨문뜨문했다.

 

잘 할 수 있는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해본 일 중에서 제일 재밌는 일은 영화 기획이었다.

 

다행히 연출이나 현장 PD와는 달리, 기획은 화려하지도 않고, 아기 키우면서 잠깐잠깐 시간을 내서 하기에는 안성맞춤인 일이다.

 

그리고 내년에 내가 맡을 영화 기획에 관한 계약을 다음 주에 한다.

 

재밌는 일을 마침 하게 될 기회가 누구에게나 쉽게 주어지지는 않지만, 어쨌든 이 경우에는 내가 운이 있는 편이다.

 

부차적으로 보조기획을 2~3편 하게 될 것 같다.

 

7.

내년도 계획을 어느 정도 밑그림을 그려놓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다. 삶은 그대로이지만, 그래도 마음만큼은 편해졌다.

 

한 가지는 이번에 확실히 이해한 것 같다. 나는 화려한 것 보다는 뒤에서 누군가를 지원하고 보조하는 일을 할 때 더 행복해한다는 것. 그리고 나는 돈이나 명성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숨어서 차분하게 생각할 수 있는 혼자 있는 시간, 이걸 훨씬 더 원한다는 것.

 

올해는 내 책 한 권은 나갔고, 또 한 권이 나갈 수도 있고, 연초로 넘어갈 수도 있다.

 

책 작업은 잘 된다. 그렇지만 올해 헤매느라고 내년으로 넘어간 책들이 좀 있다. 천천히 시간을 갖고, 차분하게 정리해보려고 한다.

 

이것저것 맡고 있던 직책들, 사회적 역할들, 이런 건 내년을 계기로 다 내려놓고 아기와 빵 굽는 아빠로서의 삶을 만들어보려고 한다.

 

고양이 네 마리 돌보면서, 아기 키우는 것, 이게 내 정체성이고, 내 삶이다.

 

아기를 돌보지 못할 정도로 바쁘게 해야 할 일은 내 일이 아닌 듯 싶고, 그렇게 살아야 할 이유도 없는 것 같다.

 

올해, 몇 년만에 처음으로, 내 삶에 대해서 행복하지 않다고 답변을 내렸다.

 

그러나 내년에는 그렇게 살지는 않으려고 한다.

 

순간순간을 행복만으로 채울 수는 없지만, 돌아보면 행복했다고 대답할 수 없는 삶, 그렇게 살면 안될 듯 싶다.

 

내년 계획을 짜면서, 나의 행복을 맨 앞에 놓고 내 삶을 다시 한 번 돌아다보게 되었다.

Posted by retir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