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에 '솔로 계급의 경제학'이라는 주제로 책을 내볼까 생각하면서 써본 최초의 스케치가 있다.

 

그 후로 진도도 많이 나갔고, 몇 개의 필승 카드도 생겨났다.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어떻게든 내 손에서 10월말까지 초고를 떨어뜨려 보려고 한참 작업 중이다.

 

지금의 원고는 이 때와는 톤도 다르고, 접근도 전혀 다르게 되었지만...

 

하여간 이렇게 떠듬떠듬, 시작을 한 작업이다.

 

책 작업이 쉽지는 않지만, 돌아보면 그래도 나에게 가장 맞는 작업이 이 작업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문득 들었다.

 

40대 중반, 이제 더 이상 나 스스로를 청춘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 때 내가 가졌던 열정 이상을 이번에 쏟아부으려고 한다.

 

스케치 작업만 몇 번을 했고, 이번만큼 머리 속에서 시뮬레이션을 많이 한 적도 없다.

 

내가 어디에서 이 작업을 시작했는가,

 

나도 까먹을지 모를 것 같아서...

 

책 쓰기 시작하면서 언제나 내 방에서 그냥 쭈그리고 앉아서, 택도 없이 느린 컴 가지고 썼었는데,

 

이번에는 작업실 대신 여관방 잡아놓고 하는 것도 좀 하려고 한다.

 

전화기 꺼놓고.

 

하여간 중요한 주제이기는 한데, 아직도 결정적으로, 나는 답을 잘 모르겠다.

 

나올 때까지, 작파하고 고민하는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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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 계급의 경제학 : 세습 자본주의와 무자식자들                                     

 

우석훈

 

< 들어가는 말 >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세상을 해석하기만 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칼 마르크스, 포이에르바하의 테제 11)

 

“지금까지 경제학자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세상을 심각하게 만들려고만 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상을 웃기는 것이다.

 

(우석훈, 솔로 테제 11)

 

1. 자식자, ‘불알 두 쪽’, 프롤레스

 

로마 시절의 일이다. 노예가 아닌 시민 중에 돈이 없는 사람들은 군대에 가지 않았다. 군대에 가기 위해서는 로마병의 중장갑 전투 장비를 자신이 직접 사야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재산이 없는 사람들은 지킬 것이 없으므로 전투에서 용감하게 싸우지 않을 것이라는 사회적 편견도 있었던 것 같다.

 

5년에 한 번 로마에서 진행된 시민들의 현황 조사에서 돈이 없는 사람들의 재산란에는 자식들의 이름만이 기록되었다. 그야말로 자식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사람, ‘자식자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라틴어 proli 즉 자식이라는 말에서 proles라는 단어가 나왔다. 그야말로 자식 외에는 아무 것도 없어서 군대에도 갈 수 없는 사람들, 이 사람들이 로마 시민층 가난한 사람들을 의미하는 단어였다. 조선 식으로 얘기한다면, 그야말로 불알 두 쪽밖에 없는 양인을 의미하는 단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차이점은 우리는 상민이 아닌 모든 양인들은 군역의 의무를 지었다. 최소한 군대 앞에서 만큼은 경제적 차별이 없던 나라였다.

 

영화 <스타쉽 트루퍼스>에는 군대와 시민권에 대한 흥미로운 설정이 나온다. 외계의 괴물, 벅스들과 전쟁 중인 미래의 공화국은 군대에 갔다 온 국민들에게만 시민권을 주고, 이들만이 투표권을 가질 수 있다. 경제와 정치, 그리고 군대라는 이 복합적인 권력 중에서 군사 권력이 경제를 누르고 시민권을 통제하는 미래 사회가 설정되어 있다. 아마도 경제 권력이 너무 막강해져 문제를 일으켰는지, 결국 군인들이 기업인들을 통제했던 전사가 깔려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군대에 가서 정상적으로 복무를 마치지 않으면 투표권을 가진 시민권을 받을 수 없다는 영화에서의 설정은 군대와 경제 사이의 관계의 한 단면을 생각해보게 한다.

 

재산이 없으면 군대에 갈 수 없고, 그래서 더더욱 가난할 수밖에 없어서 결국 자신의 이름 뒤에 재산 항목으로 달려있는 것은 자식들 밖에 없는 프롤레스’, 그야말로 자식자, 자식 밖에는 없는 사람들이 아닐 수 없다.

 

2. 프롤레타리아, 팔 것은 몸 밖에 없는 사람들, 무산자

 

로마의 가난한 시민들인 프롤레스들을 다시 역사의 전면으로 끄집어 낸 사람이 바로 칼 마르크스이고, <자본론>에서 프롤레타리아(proletariat)’라는 이름으로 재등장하게 된다. ‘생산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고, 팔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노동력 밖에 없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프롤레타리아는 노동자, 농민이라는 말로 쉽게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 말로는 자본가(capitalist)는 유산자, 즉 재산이 있는 사람 그리고 프롤레타리아는 무산자, 재산이 없는 사람으로 번역된다. ‘생산 수단이라는 좀 복잡한 함의를 가지고 있는 단어를 염두에 둔다면, 무산자라는 번역이 정확하게 원어의 뉘앙스를 살리는 것은 아니다. 프롤레타리아의 의미는 재산이 없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생산수단, 즉 생산을 하기 위한 수단인 공장이나 회사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에 더 가깝다. 자본가의 반대말이니까, 무산자라기 보다는 사장님이 아닌’, 그런 의미에 가깝다.

 

좀 잔인한 얘기이기는 하지만, 자본주의라는 좀 특수한 경제활동에서 누군가는 사람들을 고용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그들에게 고용되어 일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이 받을 수 있는 돈은 기본적으로는 임금 외에는 없다.

 

<자본론>에 정의된 착취의 개념은 좀 복잡하다. 롱 스토리 숏트, 긴 얘기를 짧게 정의하면 하여간 일한 만큼의 돈을 사장에게 지불받지 못한다는 것이고, 그렇게 덜 지급된 임금이 바로 잉여가치, 즉 이윤의 원천이 된다는 것이다. 그 반면, 주류 경제학에서는 노동의 생산성이 바로 임금이기 때문에, 일한 사람이 자신이 생산에 기여한 만큼은 주고 있다고 이해된다. 착취가 있든 없든, 19세기 중후반에 자신이 몸을 움직여 일하는 것 외에는 소득이 생겨날 수 없는 이 새로운 사람들이 역사의 전면에 나서게 된다는 것이 마르크스가 프롤레타리아라는 단어를 새로 정립하면서 마음 속에 가졌던 생각일 것이다.

 

아주 추상적으로 생각한다면, 세상은 생산수단을 가진 사람들, 즉 사장님들과 노동자만으로 구성된다는 것이 <자본론>의 기본 논리이다. 그럼, 그 사장을 없애고 노동자들끼리만 생산을 하면 어떨까? 왕을 없애고 시민들이 참정권을 가지고 정치적 결정의 최고 위치에 가도록 만든 것이 프랑스 혁명의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왕조를 종식시킨 것이 아니라 그런 혁명의 순간을 경험하지는 못했지만, 자본주의 국가에서 왕이 직접 통치하는 경우는 없다. 그런 혁명이 한 번 더 존재할 수 있다면! 그것이 19세기 중후반을 거치면서 20세기로 넘어오면서 최초의 자본주의 형성을 마친 국가에서 생겨난 사회 사상이다. 논리적으로 어려운 말은 아니지만, 현실적으로는, 엄청나게 많은 희생과 고통을 담보로 한 생각이다. 러시아 혁명을 시작으로, 20세기에 들어오면서 현실에 사회주의 국가들이 생겨났다. 우리와 같은 민족인 북한 역시 38선 이북에 있던 러시아의 영향권 내에서 사회주의로 근대 국가를 만든 나라 중의 하나이다.

 

3. 룸펜과 중산층

 

룸펜 정확히는 룸펜 프로레타리아라는 단어는 마르크스의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이미 등장한 단어이다. 사장과 노동자만으로 사회가 구성되는 것은 아니고, 이건 지금만이 아니라 자본주의 형성 초기에도 그랬다. 아무리 힘들다고 해도 노동자만 해도 그래도 양반인 것이고, 그 상황에도 가지 못하는 부랑자, 소매치기, 좀도둑, 방랑자, 이런 사람들이 존재했다. 이들은 무엇인가? 마르크스는 그들을 룸펜이라고 불렀다. 간단히 말하면 생산 시스템을 기반으로 기본 프레임 바깥에 존재하는 사람들이 룸펜인 것이다. 그럼 그들은 뭘 먹고 사나? 혹은 그들은 일하지 않는가? 영화 <도둑들>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일을 하는 것이기는 한데, 그 일을 사회적으로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들도 노동하는 것인가? 혹은 그들에게도 노동은 신성한 것이라는, 아주 오래된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의 칭송을 바쳐야 하나? 레오나르드 디카프리오 주연의 영화 <캐치 미 이프 유 캔>에 나오는 기막힌 사기꾼을 가치와 생산이라는 틀에서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상업영화의 제작 및 유통 시스템에 들어가지 않고, 그것도 아주 자기만족적인 의미로 영화를 제작하거나 다큐를 만드는 인디 영화나 인디 다큐의 종사자들은 어떤 방식으로 이해해야 할 것인가?

 

이런 룸펜들과 함께 또 다른 고민의 대상이 요즘은 그냥 '중산층'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다. 정확히 얘기하면 '중간계급(middle-class)'라고 할 수 있는데, 어원적으로는 그냥 소득이 중간이라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좀 더 복잡한 얘기들이 있다. 사장도 아니고 노동자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너희들은 룸펜이야"라고 간단히 말하기 어려운 직업들이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공무원들이 그렇다. 요즘은 공무원들도 직급에 따라서 노동조합을 만들지만, 그렇다고 공무원이 노동자인가,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하기는 어렵다. 한 때 전세계를 풍미했던 루이 알뛰세의 국가 이데올로기 기구라는 테제에 의해서, 국가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만들고 유지하는 장치라고 하면 설명은 쉽다. “너희는 자본의 개들이야”, 이렇게 한 쪽 편으로 밀어버리면 말은 간단하지만, 어딘가 좀 찝찝하지 않은가? 종교인들도 분류가 어렵다. “종교는 아편이다”, 이렇게 자본가편이라고 밀어붙이면 이해는 쉽지만, 그렇게 간단하게 종교를 처리하기도 어렵다. 자본주의보다 더 오래된 기관인 대학교, 여기의 교수들, 이 사람들은 또 뭘까? 어차피 일을 해서 월급을 받으니까 노동자라고 부를 수도 있지만, 장관 자리에 오르는 웨이팅으로는 또 가장 좋은 직업인 만큼, 통치자 쪽으로 이해하는 게 더 맞을 수도 있다. 매일매일 드라마에서 보는 스타급 연기자들 그리고 그 자신이 회사인 것도 아니면서 회사가 움직이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작동하는 A급 영화감독들, 이 사람들도 자본과 노동자라는 간편하고도 단순한 분류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이해를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군인들, 자본주의 사회에서 군인은 도대체 어떠한 경제적 위상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게다가 연금과 재산을 가지고 있는 퇴역한 장성들, 이들은 또 무엇인가?

 

하여간 중간계급 혹은 중산층이라는 개념은 그렇게 쉬운 개념은 아니다. 한국의 도시가계 연평균 소득이 4,500만원 정도 된다. 도시에 살면서 연소득 4,500만원을 버는 가장이 자신이나 그 식구들이 자신들은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는 별로 없을 듯싶다.

 

4. 블루 칼러와 화이트칼러 그리고 슈퍼을들의 창조계급

 

20세기를 거치면서 노동자 사이에도 분화가 이루어졌다. 공장과 사무실 사이의 분화, 그래서 한 쪽은 작업복을 상징하는 블루칼러, 또 다른 한 쪽은 흰색 와이셔츠를 상징하는 화이트 칼러, 그렇게 나누어서 이해하게 되었다. 어렵게 따지자면 한없이 복잡하겠지만, 이 내용 자체가 어렵지는 않다. 사무직과 공장직, 그렇게 이해할 수도 있고, 대졸과 고졸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물론 한국에서는 서울 본사에 근무하는 문과와 지방 공장에 근무하는 이공계의 차이로 드러나기로 하였다.

 

좀 큰 눈으로 생각해보면, 기계화가 진행되면서 블루컬러에 해당하는 노동이 점점 줄어들게 되었고, 그 대신 판매 등 경영과 관련된 역할이 점점 더 커지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반드시 임금으로 볼 때 꼭 화이트 칼러가 높은 것은 아니지만 두 종류의 노동 사이에 사회적 위계와 선호 관계가 설정되는 경향이 있다.

 

직업이 귀천이 없다’, 우린 늘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현실의 세계는 별로 그래 보이지는 않는다. 연봉에 따라, 일의 성격에 따라 그리고 근무지에 따라, 직업에 대한 선호는 극명하게 갈린다. 이런 노동 방식의 차이에 따라 노동자 사이에서도 처지와 이해가 갈리게 된다. 여기에 자본주의 초기부터 존재했던 중소기업의 문제가 한국에서는 해소되지 않은 채로 계속해서 남아있다. 대기업에 갈 것인고, 공기업에 갈 것인가 혹은 중소기업에 갈 것인가, 이 자본의 성격에 따른 구분이 화이트/블루의 구분만큼 개인의 삶을 극명하게 가르게 된다.

 

굵고 짧게’, 이는 대기업을 일컫는 말이다. 연봉은 많지만 오래 일하기 어렵다. ‘가늘고 길게’, 이는 공기업을 의미한다. 연봉이 민간 기업만큼 높지 않지만, 여전히 정년을 보장받고 있으며, 정규직 체계 내로 들어가면 그냥 그렇게 특별히 모나거나 특별히 구질구질하게 한 평생을 살아가게 된다. ‘가늘고 짧게’, 이건 중소기업을 상징하는 말이다. 연봉이 적은데, 또 언제 망할지 모르니, 가늘고도 짧은

 

'미스매칭'이라는 용어에는, 자신의 눈높이에 맞추어서 구직을 하라고 정부의 애잔함이 담겨 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주어진 현실이 이러니, 선택지가 별로 없다. 마르크스가 얘기한 프롤레타리아, 팔 것은 몸 밖에 없는데, 그나마 잘 안 팔리고, 이래저래 잠시만 다른 데 돌아보고 있으면 삽시간에 룸펜이 되어버리는 삶, 그게 현재 스코어 오늘의 한국 자본주의의 현실이다.

 

누군들 가늘고 짧게살고 싶겠나. 할 수만 있다면 굵고 길게살고 싶은 게 사람의 마음 아닌가? 화이트컬러든 블루컬러든, 결국 회사에 고용되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그 초기 선택의 작은 차이가 개인의 삶의 인생경로를 엄청나게 바꾸게 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우리는 알고 있다.

 

자신의 미래로써 중소기업은 영 아니고, 공기업은 힘들고, 대기업도 만만찮은 것은 마찬가지이고, 이렇게 사람들이 삶의 주판알을 튀기는 동안, 미국에서 환상적인 계급이 새로 출연하였다. 격론의 대상이 되었던 리처드 플로리다가 얘기한 창조계급(creative class)이 그것이다. 과학과 문화를 막론한 고소득 직종이 창조성을 중심으로 등장하게 된다는 그의 얘기는 창조성과 함께 도시의 관용성(tolerance)에 대한 또 다른 논란을 불러왔다. 가히 게이논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복잡한 함의를 가진 이 논의를 쉽게 정리하면, 게이가 많이 사는 도시에 창조계급이 많이 산다는 것이다. 물론 창조계급에 속한 사람들이 게이라는 말은 아니다. 간단히 생각해보자. 루이 뷔통의 수석 디자이너였던 마크 제이콥스는 물론 창조계급이며 동시에 게이다. 간단히 말하면, 마크 제이콥스가 살기에 불편하지 않은 곳에 다른 창조적인 인간들도 살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과학자나 작가 혹은 영화인들은 많은 경우 독창적이며 동시에 괴팍한 사람들이라서, 전통적인 규범을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익명성을 존중하지 않는 곳은 불편해서 살기가 어렵다. 플로리다의 이런 얘기들은 너무 간단한 것이라서 그게 맞을까 싶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아주 틀린 얘기는 아니다. 유교적인 전통성이 강해서 가장 보수적인 도시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대구의 경우, ‘밀라노 프로젝트는 충분한 정부의 지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창조적으로 경제 구조가 바뀐 흔적을 보기가 어렵다. 이 밀라노 프로젝트 실종 사건에 대해서 경제학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방법이 몇 가지가 있기는 한데, 그 중 가장 창의적인 해석이 <도시와 창조계급>이라는 플로리다의 테제를 따르는 방법이다. 분명 대구에는 돈이 갔는데, 사람들이 따라가지는 않았다. 유교적 전통에 따른 가부장적 권위주의는 여성들과 게이들에게는 분명히 살기 어려운 도시 여건을 만들어낼 것이다. 그래서 창조적 인간들이 대구에 거주하기를 원치 않는다면? 검증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어쨌든 한 가지 설명은 될 것이다.

 

사회적 선호도는 블루칼라<화이트칼라<창조계급, 이 순서대로 나갈 것이다. 푸른 작업복을 입는 것보다는 넥타이를 선호할 것이지만, 그 위에는 다시 넥타이를 맬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창조계급의 영웅, 스티브 잡스도 넥타이를 매지 않고, 또 다른 한 편에 서 있는 마크 제이콥스도 마찬가지이다. 한 때 방송인 중에서 가장 많은 소득을 올렸던 강호동 역시 넥타이를 매지는 않는다. 이 넥타이를 매지 않는 새로운 계급에서 상층부에 속하는 사람들은 ''이 줄을 서서 모셔가는 '슈퍼을'을 형성한다. 창조성, 상징적 자본, 매력자본, 이런 슈퍼을 현상을 설명하는 몇 가지 개념들이 있기는 하다. 어쨌든 모두의 노동 조건이 동일한 것은 아니며 임금 조건 역시 동일한 것은 아니다.

 

5. 자동화와 프레카리아트

 

블루칼러에서 창조계급에 이르는 일련의 직업 분화와 추이를 설명할 수 있는 간단한 가설이 있기는 하다. 로봇 등 자동화를 중심으로 이해하면 좀 더 간편하다. 지난 100년 동안 노동자들이 했던 많은 일들은 이제 로봇 등 자동화 기기로 대체되었다. 자동차 조립공정에서 이제 사람들은 컨베이어 벨트를 따라 설치된 자동화 로봇의 보조 역할에 가깝다. 물론 아직도 수작업으로 자동차 조립을 하는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 그걸 만드는 사람들은 블루칼라라고 부르지 않고, 장인이라고 부른다. 일부 슈퍼카들을 만들 때 수작업 조립을 한다.

 

블루칼라에서 화이트칼라로 노동의 주축이 옮겨간 것은 공장 자동화 과정과 어느 정도 궤를 같이 한다. 그리고 개인용 PC의 보급과 함께 전산 자동화가 이루어지면서 화이트칼러의 자리도 상당 부분 위협당하게 되었다. 지금 화이트칼러의 일자리 중에서도 상당 부분은 결국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여성 내근직의 대표적이었던 전화 교환수가 결국에는 사라지게 된 것이 이 문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게 된다. 공기업이었던 KT가 민영화되고, 그 정리해고 과정에서 이런 전환이 사회적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기계가 대체하기 어려운 직종들이 몇 가지가 있다. 창조계급이라는 이름으로 분류되는 직업들이 대체적으로 로봇화 혹은 자동화하기 어려운 일들이다. 로봇 디자이너, 로봇 영화감독, 로봇 연구자, 이론적으로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당분간은 여전히 사람들이 일을 하게 될 것이다. 로봇이 디자인한 웨딩 드레스, 전위적이기는 하지만 지금과 고가에 팔릴 것 같지는 않다. 결국 청년이 자신의 미래 직업을 선택할 때, 가장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것은 로봇과 경쟁하게 될 것인가 아닌가, 그 기준이 아닐까 싶다. 공무원! 탁월한 선택이다. 대통령이 로봇으로 대체되는 일이 없는 한, 공무원과 국회의원은 적어도 지금의 대학생들이 경제활동을 하는 동안에는 여전히 사람이 할 것이다.

 

블루칼라에서 창조계급까지, 노동활동이 중심축이 움직이는 동안, 기계화가 불가능하거나 기계화가 필요 없는 새로운 노동양식이 등장하게 되었다. 유자식자라는 의미의 프롤레타리아와 위험하다는 의미를 가진 precarious라는 형용사의 결합어인 프레카리아트(precariat)가 그것이다. 불안하고 가난한 노동자 정도의 의미로 생각할 수 있다. 불완전 고용, 불완전 노동 등 다양한 방식으로 불리는데, 요즘 우리 말는 비정규직이라고 포괄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비정규직 중에도 슈퍼을들이 포함되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파견노동자와 알바까지 포함하는 일련의 노동 양상, 그들을 의미한다.

 

프레카리아트 현상이 지금 막 시작된 것인지, 아니면 자본주의 초기부터 존재했던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한국 경제의 경우에도 자본주의 방식의 안정적인 일자리가 사회적으로 공급되기 시작한 것은 60년대 이후의 일 아닌가? 그렇다면 그 이전의 사람들은 무얼 하고 살았단 말인가?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 나오는 그 도시 빈민들이 지금의 프레카리아트보다 부유하다는 말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세계적으로 프레카리아트 현상에 대해서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한국 경제도 마찬가지이지만 세계경제 특히 선진국 경제가 더 이상 '발전' 패러다임에 따른 고성장을 하기가 어렵다는 전망을 갖기가 어려워서 그렇다. 덩치가 커져나가고 있을 때에는 내부의 문제가 뻔히 예견됨에도 불구하고 "언젠가는 해결될 것이다"는 낙관적인 전망을 갖기가 훨씬 수월하다. 그러나 그런 식의 고성장이 어렵다는 것을 사회적으로 인지하고 나면, 지금 풀리지 않는 문제가 나중이라고 풀릴 리가 없다는 것을 좀 더 객관적으로 들여다보게 된다.

 

맑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말을 했다. 이제, "만국의 프레카리아트여, 단결하라", 이런 선언이 필요하게 된 시기가 도래하는 것일까? 한 쪽에서는 기계로 대처될 수 없는 고급노동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창조계급'으로 분류되는 동안, 이제는 사람값이 너무 싸서 굳이 비싼 로봇으로 대처할 필요가 없는 노동을 중심으로 '프레카리아트'라는 새로운 계급이 등장을 눈 앞에 보고 있는 상황이다.

 

문제는 이런 분화 현상이 한국에서는 너무 빠른 시간 동안에 벌어지기 때문에 특정 세대 혹은 특정 연령에게서 동시에 벌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청년은 창조적이며, 동시에 프레카리아트적이다. 이제 막 패션 디자이너나 연예 기획사 막내로 데뷔한 20, 그 어느 쪽이든 아직은 가능하다. 창조계급 쪽의 눈으로 본다면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기를 지나면 최소한 밥 먹고 사는 문제는 걱정 없는 상황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비정규직 문화 노동자로 본다면, 실업보험 등 4대 보험의 혜택도 받지 못하는 알바 혹은 그 이하의 경제적 삶이 펼쳐질 가능성이 있다. 확률로만 본다면, 후자 쪽의 가능성이 훨씬 높다. , 그래서 차라리 마음이라도 편한 쪽을 선택하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상관 없어요, 어차피 잘 안될 꺼니까요."

 

한국 독립영화계에서 한동안 유행했던 말이다. 그러나 자동화의 끊임없는 진전과 한계 노동의 계속적인 등장이 끝이 아니다. 창조계급과 '불안한 노동'과 같은 새로운 트렌드에 얹혀서 또 다른 장파동의 변화가 새롭게 시작되는 것이 있다.

 

"애인 있으세요?"

 

이런 질문을 받아보신 적이 있으신가? 어쩌면 멀지 않은 장래, 결혼정보 회사 아니면 이런 질문을 아예 하지 않을 시기가 올지도 모른다. 전쟁이나 페스트와 같은 아주 특수한 상황 아니면 전 세대가 다음 세대보다 부유했던 적은 없었는데, 한국은 부의 상대적 안정성 측면에서 다음 세대가 전 세대 보다 가난하게 될 가능성이 아주 높아졌다. 기어야 지금 와서 새삼 놀라울 일은 아니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빈곤 현상과 함께 섹스도 줄어들게 될 것인가? 로마 시절 아니 그 훨씬 이전부터 안정적으로 작동하던 가부장 중심의 가족 패턴은 이제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바뀌어가는 중이다. 섹스와 부의 연관관계, 이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심각하게 생각해봐야 하는 순간이 온 것은 아닐까? 돈과 섹스 혹은 경제적 부와 섹스, 이 문제에 대해서 경제학이 질문을 던져본 것을 기억하지는 못하겠다.

 

엘빈 토플러 이후의 미래학자들은 세상을 지나치게 기술중심적으로 예측하였고, 그러다 보니 경제적으로는 지독할 정도의 낙관적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자동화와 전산화 그리고 코뮤니케이션의 발전은 이미 상당 기간 전에 예측된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여전히 자본주의라는 경제 시스템 아래에서 살고 있고, 그러한 기술적 발전이 만들어내게 될 또 다른 이면에 대해서 미래학이 고민하지는 않았다. 자동화가 만들어놓은 기술적 전환은 노동자들의 권력을 현저히 약화시켰고, 동시에 그들의 경제적 삶도 열악하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결혼은? 결혼은 모계제 사회가 종료하고, 수컷들이 농업을 전담하게 되면서 생겨난 장치이다. 이제 이 열악해진 노동자, 아니 노동하기도 쉽지 않아진 상황에서 인간이라는 종의 재생산(reproduction)은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인가? 그리고 섹스는?

 

6. 신빈곤 현상과 메이팅의 위기 : 솔로계급의 탄생

 

연애와 결혼, 섹스에도 좌우가 있느냐 싶겠지만, 분명히 존재한다. 미국 보수층이 강력한 기독교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여기에 따라서 종교적 입장과 정치적 입장이 일정하게 궤를 같이 한다. 한국의 보수는 여전히 유교적 전통이 강한 영남 지역의 정서와 강남 대형교회의 지배력이 적당히 결합된 것이라서, 가부장적 권위에 익숙한 집단이다. 혼전 순결에 대해서 입장이 나뉘고, 게이 문제에 대한 사회적 처리에서 입장이 나뉘고, 성폭행 방지법에 대해서 확실히 입장이 나뉜다.

 

자식자 혹은 유자식자 정도로 번역할 수 있는 로마 시대의 가난한 시민은 자본주의 출발 초기에 노동계급을 지칭하는 은유로 사용되었다. '클래스(classs)'라고 이름 붙여진 책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1898년 톨스타인 베블렌의 <유한계급론(Theory of Leisure Class) >가 아닐 수 없다. 충분히 레저를 즐길 수 있는 부유층에 관한 얘기이며, 과시적 소비에 관한 베블렌 재화는 여전히 패션, 알콜, 승용차 등 소비 현상에서 중요한 분석 기준이 된다. 창조 계급의 경우도 기본적으로는 클래스에 관한 은유를 전제로 하고 있다. 2012년 대선이 끝난 직후 크리스마스 이브에 진행된 '솔로대첩'으로 크게 유행하게 된 '솔로계급', 아마도 가장 슬픈 계급론이 아닐까 싶다. 추세적으로 결혼은 줄어들고 있으며, 지금과 같은 흐름이 이어진다면 아마도 지금의 대학생 중에서 1/3 내외가 전통적으로 '가정' 정확히는 핵가족(nuclear family)의 형태를 이루며 출산을 하고 살아갈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미국의 부시 행정부가 그랬듯이 특히 가난한 여성에게 "결혼하라"는 정부와 교회의 메시지가 끊임없이 협박처럼 갈 것이다.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 (데살로니가 후서 3 10.)

 

마치 성경에서 노동을 권면하였듯이 보수적 교단에서는 "결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라고 말하는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 카톨릭이든 기독교든, 기본적으로는 현 상태를 지키자고 하는 보수적인 종교들인 것은 마찬가지겠지만, 결혼과 출산에 관해서는 정반대의 입장을 가지게 될지도 모른다. 칼빈 시대의 신구교 대립 이후 결혼하는 목사들과 결혼하지 않는 신부들 사이의 예민한 종교 갈등을 다시 목격하게 될지도 모른다.

 

1인 가구, 즉 솔로들의 증가는 세계적 추세이다. 그렇지만 연애하지 않는 혹은 연애하지 못하는 '솔로 계급(solo class)'의 사회적 등장은 이보다는 좀 더 복잡한 문제이다. 호모 사피엔스로 인류가 등장한 이래로 모든 남녀가 연애에 성공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엇갈려 가는 삼각관계의 슬픔과 긴장감 아니었다면 문학이 지금과 같이 융성하기도 어려웠을 것이고, 로맨스 코메디 같은 영화 장르는 성립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솔로의 증가가 솔로계급의 증가와 연관을 보일 것인가 그리고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가 굳이 있을 것인가?

 

이 문제는 생각보다 어렵다. 가난과 출산 사이에 기계적인 연관관계를 설정하기도 어렵고, 또 결혼과 연애 사이에도 유기적 관계를 찾아보기 어렵다. 연애하지 않아도 결혼할 수 있는 것처럼, 결혼하지 않는다고 해서 연애를 안 한다고 보기도 어렵다. 90년대 중후반 이후로, 많은 경제적 혹은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 "이게 모두 신자유주의 때문이다"라는 간편한 - 그렇다고 진실이라고만 보기는 어려운 - 해법을 가지고 있었다. 영화 <식코> 이후, 의료 문제에 대한 설명은 미국식 신자유주의 때문에 생긴 문제이다, 이렇게 간편하게 답을 할 수가 있게 되었다. 전 세계적 부동산 버블, 이것도 신자유주의라는 편안한 설명법이 있다. 유전자 조작식품의 증가도 마찬가지이다. 심지어 후쿠시마 원전 폭발사고로 인한 핵발전 문제에 대해서도 민영화와 에너지 산업의 문제점 등을 지적하면 간단하지만 그리 틀리지 않는 설명을 만들어낼 수가 있다. 여기에 한국적 특징을 가미하기 위해서는 "이게 다 명박 때문이다", 이러면 되었다. 조금 더 구조적인 설명을 추가하기를 원한다면 "이게 다 삼성 때문이다"라는 것 하나를 추가하면 안성마춤이다. 좀 더 과학적 설명을 추가한다면 "김용철 변호사에 의하면"이라는 수식구 하나를 더 하면 완벽하다. 문재인 후보의 의료비 상한제 공약이 먹히지 않는 이유는, 이런 얘기들을 종합해서 "결국 삼성화재가 돈 벌어야하기 때문에"라고 말하면 근사도 95% 이상의 설명틀이 된다. 그리고 보수 쪽 학자들의 침묵에 대해서는 삼성에서 돈을 받았거나 삼성의 눈치를 보기 때문 아니야, 이렇게 말하면 된다.

 

이런 신자유주의라는 개념을 동원한 간편한 설명이 솔로 현상에서는 잘 맞지는 않는다. 1인당 국민소득이 6만불이 넘어가는 스웨덴의 경우, 전통적인 가족이라는 형태로 살아가는 성인들이 1/3이 채 되지 않는다. 1인 가구 비중은 60%를 넘어설 기세이고, 그러다 보니 혼외 출생 국민의 비중이 절반이 넘어간다. 그렇다고 해서 스웨덴 사람들이 덜 사교적이거나 공동체의 해체가 급격히 이루어지느냐, 그런 것도 아니다. 억지로 논리를 만들자면, 혼자 살 수 있으니까 혼자 사는 나라와 혼자 살 수밖에 없으니까 혼자 사는 나라, 그 정도의 차이라고 할까?

 

좀 더 중립적이기 위해서 '메이팅(mating)'이라는 용어를 써본다면, 지금 한국이 당면하는 위기는 경제의 위기이면서 동시에 메이팅의 위기이기도 하다. 출산과 육아, 심지어는 가정의 평화를 꾸리는 것까지 전부 여성에게 전가하고 있던 사회가 좀 더 현명해지고 자유롭고, 자신의 권리를 새롭게 인식하기 시작한 여성들의 등장과 함께 메이팅의 위기를 만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경제적으로 다른 아무런 조건이 없어도 메이팅의 위기는 생겨났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경우는 청년을 중심으로 신빈곤 현상이 확대되는 가운데 메이팅의 위기를 만나게 되었다. 원래도 기대 소득이 남성보다 낮은 여성들은 더더욱 결혼과 출산의 비용을 높게 느낄 것이고, 메이팅 비용을 전가받을 수 없는 남성들 역시 출산 비용은 물론이고 연애 비용에 대해서 불만이 없을 수 없다. 이래저래 메이팅은 위기가 되었다. 그러면 소득 보전을 해주든, 보조금을 주든 아니면 청년을 위한 분배를 늘리든, 어쨌든 청년들 손에 더 많은 돈이 가게 하면 이 문제가 끝날 것인가?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다. 이건 '문제-해법'의 전통적인 접근법보다는 '변화-적응(adaptation)'이라는 좀 더 생태학적인 접근 방법에 가까워 보인다.

 

보수주의자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 "결혼해라"라는 단순 명쾌한 답변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그 반대편은? 한국의 50대 이상 남성들, 결혼하지 않는 여성들에 대해서 얼마나 적대적으로 대할 것인가, 눈에 선하지 않은가? 그렇다고 해서 스스로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다른 반응을 보일 것인가? 아직까지는 그렇게 다른 반응이 나온 것 같지는 않다. 지금 한국 경제가 가지고 잇는 여러 가지 문제점을 극복하는 유효한 수단 중의 하나로 복지 좀 더 정확히는 보편적 복지를 늘려나가는 것이 한 가지 방법이다. 그리고 그렇게 복지를 늘려서 출산율이 높아질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진보주의자들 역시 출산율을 자신들의 정책 성과로 이해하게 된다. 지금 박원순 시장의 서울시가 그렇다. 변죽만 울리다 별 성과 없이 끝났던 오세훈의 여성이 살기 좋은 도시를 표방한 '여행 프로젝트'나 출산율 중심으로 복지를 사고하는 방식에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을까? 스웨덴의 사례를 보면, 복지를 높여서, 여성이 행복하게 하고, 그렇게 해서 출산율을 높이자는 일련의 공식이 그렇게 진보적으로 보이지도 않고, 좌파의 시각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간단히 말하면, 청년들의 솔로 현상 혹은 솔로 계급화 현상에 대해서 좌우 모두 '꼰대' 소리 듣기 딱 좋은 입장 정도이다. 그야말로 '요즘 젊은 것들, 끌끌!'의 솔로 버전인 셈이다. 이데올로기는 시대와 함께 변해나가는데, 솔로 현상에 대해서는 기존의 이데올로기들이 아직 채 정비를 하지 못한 상태이다.

7. 세습 자본주의와 솔로계급, 한국은 어디로 가는가?

 

한국에서 3대 세습은 어느덧 일반화되었다. 북한의 3대 세습에 대해서 목소리를 높이면서도 어쩐지 찜찜한 것은 '3대 세습'은 북한만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세습이라고 얘기하면 아버지에서 자식으로 넘어가는 것인데, 어느덧 안정화로 넘어간 한국 자본주의에서 3대 세습은 이제 당연한 일처럼 되었다. 삼성, 현대 등 대표적인 재벌 기업들이 지금 3대 세습을 준비하고 있고, 언론은 물론 교회 심지어는 대학 등 학교법인도 3대 세습으로 넘어가는 과정이다. 부익부 빈익빈이라는 전통적으로 한국인들이 경제에 대해서 생각하는 고정 관념들이 여지없이 관철되면서, 누군가는 좀 더 쉽게 삶을 살고, 어떤 사람들은 어떻게 해도 빈곤 상황에서 나올 수 없는 일들이 보다 더 일반화되고 있다.

 

세습이 한국에서만 벌어지는 현상인 것은 아니다. 포디즘을 만든 바로 그 헨리 포드는 엄청 구두쇠였고, 그 아들인 포드 2세는 씀씀이가 컸다고 한다.

 

"내 아들은 아버지가 포드이지만, 저는 아버지가 포드가 아니잖아요."

 

구두쇠인 그 포드가 어떤 기자에게 했다는 답변이 전설처럼 내려온다. 그렇지만 포드사도 여러 번의 경영위기를 거치면서 전문 경영인 체계가 되었고, 더 이상 포드 가문이 몇 대씩 승계하는 그런 구조에서는 벗어났다. 무엇보다도 빌 게이츠나 스티브 잡스처럼 당대에 대기업을 일으킨 사람들이 상징적으로 등장하였고, 그들이 자신의 자식들에게 회사를 승계하지 않는 일을 보면서, 한국에서 3대 세습에 대해서 질문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현상 아니겠는가?

 

그렇다. IMF 경제 위기 이후 한국의 주류 경제학의 이데올로기대로 경제 운용을 했는데, 한 쪽에서는 사회적∙문화적 이유가 아닌 경제적 이유로 결혼은 물론이고 연애도 어려운 솔로 계급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리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세습이 기본으로 진행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세습형 사회는 왕에 해당하는 대통령의 세습으로, 정치적으로는 이미 완성된 셈이다. 정치와 경제, 이 필연적으로 연결되면서도 선후를 따지기 어려운 두 요소 중에, 최소한 한국에서 세습이라는 관점에서는 정치가 먼저 진행되는 듯싶다. 그렇다면 1945년 해방 이후, 아니면 1961 5.16 이후로 도대체 한국 자본주의는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 달려온 것일까? 그냥 편하게 얘기하면, 양반과 양반 아닌 사람으로 구성된 한국의 중세에서 우리는 자본주의라는 서구식 제도를 도입한 것이다. 그런데 한 쪽에서는 보통은 3대 아니면 2대로 구성된 세습 자본주의로 향하고 있는 한 계급과, 결혼은 물론이고 스웨덴식 혼외출산의 가능성도 없는 또 다른 계급으로 분화되는 이상한 시대로 향하고 있다. 결혼은 하지 않았어도 출산이든 입양이든, 아이를 키우는 여성 그리고 비록 자신이 양육권은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자신의 아이가 어디서든 자라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남성, 이것과 한국의 솔로계급은 좀 양상이 다르다.

 

이 정도면, 도대체 우리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지, 한 번쯤 생각해봐야 하는 것 아닐까? 자본주의라는 껍데기를 쓰고 실제로는 중세 사회로 한국 사회가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런 근본적인 질문이 필요할 것 같다.

 

그러나 이 질문을 던지기에, 근본적인 딜레마가 한 가지 존재한다. 솔로들에게 왜 솔로인가, 이 질문은 너무 잔인하고, 솔로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당연히 필요 없는 질문이 된다. 확률적으로, 언제 깨어질지 모르지만 일단은 외형적으로는 평온한 중산층으로 보이는 삶을 꾸려가는 사람들에게 솔로 현상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끌끌끌’, 그런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 이 질문은 좀 다른 식으로 전개된다.

 

솔로 시대에는 어떤 산업이 뜨고, 어떤 상품이 인기가 있겠는가?”

 

영민하고도 정확한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최소한 자본의 관점에서는 말이다. 사람의 구성이 어떻게 되는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삶의 동기가 무엇인지, 그것에 대해서 장사꾼들이 굳이 알 필요가 있겠는가, 그냥 물건만 팔면 되지! 한국의 자본주의는, 어쨌든 세계 유일이며 세계 최초로 과외를 사교육으로 산업화시키고, 그것도 모자라서 주식회사 단계로까지 승화시킨 시스템 아닌가?

 

뭔가 세상에 대해서 엄청나게 복잡한 질문을 던지거나, 아니면 세상을 구원할 방법에 대해서 논의하자고 독자 여러분들에게 질문하거나 혹은 나도 잘 모르는 답에 대해서 논의하자고 할 생각은 없다. 그리고 이 책 한 권을 읽으면 엄청난 깨달음이 생길 것이라고 강변할 생각도 없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이렇게 자신의 삶에 피곤하게 갇혀 살면서 극단적인 비관론이나 염쇄주의 혹은 가벼운 우울증이나 대인기피증을 호소하는 동안, 또 다른 한편에서는 쇄습 자본주의가 더욱 강화되고 있다는 것은 좀 억울하지 않은가?

 

솔로가 늘든 말든, 솔로계급이 늘든 말든, 한국 자본주의는 별 특별한 전환점이 없다면 더욱 더 세습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갈 것이다. 유일한 위안이라면 우리의 대통령 – ‘그들만의대통령이 아니라 이 스스로 솔로라는 사실 정도? 그리하여 박씨 성을 가진 소황제가 노인들의 엄청난 지지를 받으면서 권좌에 등극할 것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는 것!

 

좀 심각하게 사태를 말하자면, 지금까지 오랫동안 경제학자는 물론이고 생물학자들도 그럴 것이라고 간주한 '이기적 유전자'의 가설이 사회 한 쪽에서는 지금 무너지고 있는 것 아닌가? 생명체의 존재 이유는 딱 한 가지, 자신의 유전자를 더 넓게 퍼뜨리고자 함이라! 그리하여 자기 자식을 더 많이 낳고, 무엇인가 물려주기 위해서 우리는 이 힘들고도 고달픈 삶을 버티고 있음이라!

 

사회 상층부는 어쨌든 세습을 통해서 '영광과 번영!(Glory and Prosper!)'을 누릴 수 있는 방향으로 가는 동안, 다른 한 쪽은 청년 시기부터 솔로계급으로 편입되어, 자신의 한 몸을 먹여 살리고 너무 구질구질하지 않게 보이기 위해서 혼심의 힘을 쏟아야 하는 구조, 이러한 대한민국으로 가고 있는 게 과연 한국 경제의 목표이고 종착역인가? 오랫동안 군부 독재 아래에서 한국 경제가 이어져왔다. 그리고 10년에 걸친 민주당 정부, 다시 10년에 걸친 보수 정부, 그 시간 동안 한국의 경제학자들은 무엇을 한 것이고, 우리가 가려고 했던 세상의 목표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8. 나를 위해 살 것인가, 우리를 위해 살 것인가? : 경제학의 진정한 의미

 

고전철학의 종결자이자 현대를 디자인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헤겔의 정신현상학은 '학의 시원'이라고 하는 난해하기로 소문난


 

 

 

 

 

1. 남아당자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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