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을 곰씹는다

 

 

어느덧 나도 마흔 중반이 되었다. 지금 살아온 것보다 살아갈 날이 더 짧을 것이다. 추억이라는 말이 마음이 아니라 몸으로 느껴지는 순간이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어메리카>를 며칠 전에 보았다. 자기 전에 틀어놓고 잠시만 보려고 하다가 너무너무 재밌어서 결국 3시간이 넘는 오리지날 버전을 해가 뜰 때까지 다 보고 말았다. 1984년에 나온 이 영화를 아직도 몰두해서 볼 수 있다는 데에 놀랐다. , 내가 영화를 정말로 좋아하기는 하는구나!

 

이 영화는 한국 공개버전까지 세 개의 버전이 있다. 시간을 줄여서 스튜디오에서 공개한 건 최악의 영화로 악평을 받았고, 오리지날 버전으로 다시 공개한 건, 개봉 후 8, 지난 10년간 최고의 영화에 꼽혔다. 한국 버전은 너무 삭제가 많아서 스토리를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였다고 하고.

 

나는 이 영화를 파리 시절, TF1에서 해준 TV 영화로 보았다. 그 때도 참 재밌게 보았었고, 지금 다시 보았을 때만큼 가슴이 저리도록 아팠다. 정작 놀란 건, 다음 날 학교 갔을 때. 대학원 시절이었는데, 당시 대학원 동기 중에 남자는 정말 거의 없고, 정말 여자들 밖에 없었다. 로버트 드 니로 멋있다고, 완전 난리가 났었다. 20대 초반의 파리 여성, 정말로 그들의 가슴을 깊게 후벼판 영화였다. 1년간 대학원을 같이 다니면서 TV에서 틀어준 영화 때문에 학교가 난리난 것은 그 때 딱 한 번이었다.

 

연애 얘기를 별로 안 좋아하는 편이다. 영화의 연애 얘기로, 정말로 내 가슴을 친 영화는 이것 하나 밖에는 없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에게 오랫동안 가슴에 남은 유일한 얘기는, 김형경의 데뷔작이기도 했던 <새들은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 그거였던 듯싶다. 별로 중요한 얘기도 아니었지만, 20대 때 이 얘기의 잔상이 참 오래 남았다. 정말로 가슴 한 편에 오래 남았다. 나중에 유사한 얘기겠거니 하면서 은희경의 소설들을 모아서 읽은 적이 있었는데, 가슴에 남은 얘기는 없다. 나중에 다 까먹었다. 억지로 기억을 하자면 영화 <세런디퍼티>를 좀 재밌게, 그래서 몇 번 봤던 기억 정도.

 

나는 이런 연애 얘기에 대해서, 내가 원래 안 좋아하고, 더군다나 나이를 먹으면서, 이젠 정말로 그런 얘기 안 좋아하는 줄 알았다. 혹은 세월과 함께 전혀 다른 감성이…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를 보면서, 그 때나 지금이나, 나의 감성은 똑 같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다.

 

한 소녀의 10대 모습에서 60이 넘은 모습까지, 누들스의 삶과 겹쳐가는 이 영화의 제일 중요한 라인은 역시 연애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 사연이 너무 절절하다. 가슴이 시리도록 아프다.

 

세르지오 레오네는 자신의 목숨과 이 영화를 바꾸었다. 심장 이식수술을 해야 하는데, 그는 수술을 포기했다. 깐느에서 10년간 자신에게 영화를 만들어달라는 제작자를 기다리던 그, 결국 목숨과 바꾼 영화가 되었다. 이 정도는, 사실 바꿀만하지 않겠나 싶기도 하다. 영화 메이킹에는 쿠엔틴 타란티노가 나왔다. 레오네의 영화를 보면서 영화에 대한 꿈을 키우던 사람, 그 숱한 사람 중에 나도 포함될까?

 

요즘 영화식으로 얘기하면, 전개는 늦고, 구멍도 생각보다 많다. 데보라의 오빠로 나온 뚱보는 데보라가 빅스타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 그가 맥스의 정체에 대해서 전혀 몰랐을까? 아니면 입을 다문 것일까?

 

중간에 휴식 시간까지 있는, 세 시간이 넘는 이런 긴 영화는 요즘은 못 만든다. 두 시간만 넘어도 길다고 못 참는다. 그러나 세 시간 동안, 이런저런 에피소드들로 감정을 쌓아놓고 있어야, 진정하게 눈물을 흘릴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영화는 진지하다. 가만히 눈물을 흘리면서 신파를 떨게 내버려두지 않고, 이게 끝이 아니야, 계속해서 가슴을 후벼파게 만든다.

 

멍하다,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다

 

젊은 시절 봤던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보면서 내가 느낀 감정이다. 얇다는 표현을 쓴다. 요즘은 영화를 얇게 만들고, 그래야 오히려 흥행이 더 잘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두껍다. 정말로 두껍다. 심도 얕은 사진들에 익숙해지면, 가끔씩 보는 심도 깊은 사진들에서 깊은 감동을 느끼게 된다. 그런 것과 비슷한 차이일까?

 

좋은 영화는 잔상이 오래 남는다.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더 잔상을 오래 가지고 가는 능력이 떨어진다. 나이를 먹은 사람에게 느낌을 만들 수 있는 영화, 그것은 강한 영화가 아닐까 싶다.

 

간만에 깊은 추억을 곰씹는 순간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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