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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사 출근 2년차

2012.11.23 02:41 | Posted by 우석훈 retired

영화사 출근 2년차

 

이래저래 하다 보니, 벌써 영화사 출근 1년이 다 차 가고, 2년차로 넘어간다. 그간 나에게도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올해는 나도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잘 몰라서, 그냥 자문이라는 이름을 썼는데, 2년차 넘어가면서 그냥 영화 프로듀서라고 직함을 바꿀까 한다. 그런 얘기가 몇 번 있기는 했는데, 내가 영화 제작에 대해서 뭘 안다고그런 생각이 더 많았었다.

 

어쨌든 처음으로 공동기획으로 참여한 영화가 조만간 계약 과정을 마무리할 가능성이 보인다. 대단히 엄청난 역할을 한 건 아니지만, 어쨌든 공동기획으로 영화 타이틀에 이름이 올라간다.

 

요즘 우리가 하는 작업들이 몇 가지가 있다. 이준익 감독 복귀작 선정이 여전히 어렵다. 그의 두 번째 영화 인생에 걸맞는 틀걸이를 같이 만드는 중이다. 조철현 대표는 내년에 감독으로 데뷔를보통벌 얘기 가지고 만드는 중인데, 이것도 아주 재밌을 것 같다. 시나리오 작업이 진행 중이다. 좀 장기 기획으로 SF 준비하는 게 하나 있고.

 

그 와중에 나도 소설책 한 권을 내게 되었다. 후속 작업들이 몇 가지 진행 중인데, 일단 이런 일 자체는 즐거운 일이다.

 

대선이 끝나면, 17년간 현장에서 뛰던, 그야말로 현장 경제학자로서의 삶은 정리하려고 한다. 지치기도 했고, 혼자서 해볼 수 있는 실험은 거의 다 해본 것 같다. 내 능력의 한계는 여기까지그런 생각이 들었다. 경제 대장정이 아직 남은 것들이 있어서 완전히 손을 털기는 어렵지만, 그건 정말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언제까지 내가 일을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들 영화 만드는 거 뒷바라지 해주는 기획 프로듀서는 내 능력의 한계를 뛰어넘지 않는. 혼자 기획하는 게 아니니까.

 

타이거 픽쳐스는 여러 가지로 편하다. 물론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는 중이라서, 심할 정도로 쪼들리는 게 어렵지만, 이제 영화 촬영 들어가면 그 춘곤기도 곧 끝날 것 같고.

 

이유는 모르지만, 언제부터인가 에니메이션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다. 요즘 우리는 실사영화만이 아니라 에니매이션도 조금씩 검토를 시작한다. 여건이 좋아지만, 그런 것도 할 수 있으면 하고.

 

누구나 자신의 삶이 있는데, 나는 오래된 대인기피증을 가지고 있다. 남들 앞에 서 있으면, 나는 까닭 모를 불안감을 느끼고, 무엇보다도 내가 행복하지가 않다. 학위를 받고, 회사생활을 하면서, 그런 대인기피증이 생겨났다. 세상 일에는 뭐든지 명암이 있는 법이다. 원래도 앞에 서는 것을 안 좋아했고, 더욱 그렇게 되었다.

 

정말 명박 시대가 아니었다면, 나꼽살 방송 같은 데에는 참여하지 않았을 것 같다. 진짜 사명감 혹은 약간의 의무감 때문에 한 것이지만, 나는 그 과정에서 그렇게 행복하지는 않았다. 보람은 있었다. 그러나 보람만으로, 특정한 일을 오래 할 수는 없고, 영원히 할 수도 없다.

 

나는 뒤에 서서, 누군가를 위해서 뭔가를 준비해주고, 그렇게 뒷바라지 해주는 일이 더 좋다. 그리고 아무도 나를 쳐다보지 않거나, 아무도 내 얼굴을 모르는 그런 상황이 더 좋다. 그게 나 답다. 무엇보다, 츄리닝 입고 살 수 있는 삶이 좋다. 영화사에 갈 때, 츄리닝 입고 간다. 이 보다 더 좋은 업무환경은 없다.

 

너무 오랫동안, 화려한 곳에서 살았다. 싸움을 하다 보면, 이 쪽 얘기를 듣게 하기 위해서 남이 쳐다보게 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건 내 삶은 아니다. 나는 화려함을 추구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화려하게 살 생각은 없다.

 

영화는 화려하지만, 영화 제작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이 다 화려한 것은 아니다. 나는 그 화려함 뒤에 있는 그 소박함이 더 좋다. 책이 좋았던 것도, 책에는 그 사람이 담겨져 있지만, 얼굴이 담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내가 처음에 책을 쓰겠다고 말했을 때, 아내를 포함해서 모든 사람이 다 말렸었다. 내가 다루는 주제들은 대부분 인기 없거나, 딱딱해서 정말로 읽기가 어려운 내용이다. 그러나 그래도, 보고자 하는 사람이면 읽을 수 있는 형태로 최대한 노력하는 게, 바로 그 작업이 보람 있었다. <88만원 세대>, 지금 내용 거의 그대로인 상태에서, 수많은 출판사에서 이건 출간할 수 없다고 거절당했었다.

 

사회과학이란 분야가, 기본적으로 춥고 배고픈 분야이다. 재테크가 방방거리던 시절, 그래도 쪼그맣게 하꼬방 차려놓고 내 나름대로는 보람 있는 시간을 보냈다. 가난을 참는 건 할 수 있는데, 누군가의 앞에 선다는 것, 그건 참기가 쉽지 않았다.

 

영화사에서 기획 업무를 1년 정도 해보니까, 이게 화려하지 않고,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다는 점이 참 마음에 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영화 계약이 끝나고, 제작에 들어가면, 그 때는 배우들도 모여들고, 그야말로 카메라가 돌아가기 시작한다. 그렇지만 기획 프로듀서는 그 단계가 되면 손을 털고, 다시 어두운 곳에서 새로운 영화 기획을 시작하게 된다. 대형 모니터와 칠판 그리고 수북이 쌓아놓은 책들과 아직 덜 정리된 시나리오들, 그 틈바구니에서 늘 살아가는 게 영화 기획이다. 그런데, 난 그 상태가 더 좋다.

 

이번 대선에서, 왜 어딘가 캠프에 들어가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그건 내가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 와서는 재밌고 보람있게 캠프에서 일을 할 만한 열정이 나에게 남아있지 않다. 약간의 환멸과 무기력감을 안고 살아가는 게, 정책 분석가 혹은 경제학자의 삶이다. 그래도 뭔가 바꾸어보고 싶다는 강력한 열정을 가진 시절이 나에게도 있었던 것 같은데, 그 정열이 이제는 남아있지 않다. 정열에 가득 차서 그런 일을 해보고 싶은 사람은 많이 있다. 지나와서 생각해보니, 나는 그런 종류의 사람은 아니다. 혼자 있는 걸 좋아하고, 뒤에 있는 걸 좋아하고,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이건 보람있는 일이야라고 지내는 걸 더 좋아한다. 천성이 그렇게 생긴 걸 어쩌겠는가. 그리고 그게 바뀌는 종류의 성격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다.

 

천성을 거슬리면서 불편하게 사는 것보다는, 천성에 맞춰서 사는 게 더 부드럽다. 나는 부드러운 편을 선택했다.

 

욕망이라는 게 있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강렬한 욕망이라는 게 없다. 어렸을 때에도 없었고, 예전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다. 없는 욕망을 억지로 만드는 것, 그것도 이상한 일이다.

 

적당히 살면 큰 일 날까? 지내보니, 적당히 살고, 살살 일해도, 입에 세 끼 밥 들어가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좀 더 좋은 카메라가 있으면 좋지 않겠나? 별로 그런 생각도 없다. 지금 쓰는 넥스도 내 능력에 비하면, 충분히 좋은 카메라이고, 분에 넘치도록 좋은 기계이다. 강렬한 소유욕이나 출세욕 같은 게 나한테는 없다. 없는 욕망을, 도대체 어떻게 만들겠는가?

 

더 이루고, 더 달성하고 싶은 것도 없다. 다만 내가 알고 있는 것이나 할 수 있는 것을, 누군가를 위해서 돕고 싶다는 정도가 내가 가진 평소의 생각이다. 우연하게 된 일이지만, 영화 기획 프로듀서가 내가 가장 편안하게 할 수 있는 일 중의 하나인 듯싶다. 영화의 화려함은 연출자과 주연 배우에게 모인다. 그리고 그게 당연한 거고. 나는 그 뒤에서 움직이는 게 좋다. 더 좋은 것은, 아기 키우면서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점이다. 내년이면 출산휴가가 끝나고 복귀하게 된다. 사회가 이런 상황에 적당한 해법을 제공해주는 게 거의 없기 때문에, 내가 아기를 돌봐야 한다. 그래서 조용하게, 이렇게 뒤에서 일할 수 있는 상황이 좋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다. 그건 좀 아닌 듯싶다. 하늘은, 남을 돕는 자를 돕는다.

 

그리고 우리가 만들 세상은, 그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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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1. 포커뒤통수 2012.11.23 13:32 신고

    하늘은 남을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이 참 좋습니다. 나를 내려놓으면 하늘이 드러나는 것 같아요.

  2. 즐거운주말 2012.12.03 10:56 신고

    간만에 들어와서 몇개의 글을 읽고 갑니다~ ^^

    나꼽살은 늘 꼬박꼬박 듣고 있는데요..
    MB덕분에 팟캐스트 방송을 접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MB에게 감사하는 바입니다~ ㅎㅎ

    팟캐스트 방송들 덕분에
    -여러 좋은 분들을 알게 되고,
    -지식/지혜가 늘어서 좋았고
    -출/퇴근 시간과 운동시간에 귀가 즐겁습니다~ ^^

    나꼽살 방송이 우쌤을 행복하게 하지 않았던 점은 아쉽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그 방송으로 인해 많은 것을 얻었다는 점은 알아주세요~ ^^

    소설[모피아]감상평을 검색하다가 오늘 여기 들어오게 되었는데요..
    아직 읽지는 않았지만 [모피아]기대가 많이 됩니다..
    소설은 아무나 쓸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우쌤은 정말 재능이 많으신 듯해요~ ^^

    검색하다가 소설[모피아]1호싸인을 보고는 씨익~ 웃었는데
    저도 다음에 싸인받을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군요~ ^^
    바이~ 오늘도 즐거운 하루가 되시길~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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