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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tired 2009/08/29 03:09

문사철이라는 표현을 요즘은 나도 쓴다.

 

문학, 사학, 철학, 이 세 가지 단어, 너네 죽었어라는 말과 동의어다.

 

문학은 중고등학교의 로망이고, 철학은 20대의 로망이고, 사학은 지금부터 하려는 삶의 로망이다.

 

하여간 그렇고...

 

나한테 철학을 가르켜준 사람이 두 명이 있는데, 한 명은 결국 독일로 유학가서 독일 사람이 되었고, 또 다른 한 명이 김상환 선배이다.

 

독일로 간 양반이 학부 시절 나에게 정신현상학을 비롯해서 헤겔 강독을 시켜준 양반이고, 니체를 비롯해서 전체적인 철학사를, 그야말로 무릎 위에 애기 앉혀놓고 설명하듯이 가르켜준 사람이 박사과정에 있던 김상환 선배이다. 서울대 철학과의 그 김상환 교수가 바로 스물 두 살의 나에게 포도주 사주면서 철학 공부시켜준, 바로 그 양반이다.

 

대학원을 끝내고 박사과정 진학할 때, 내가 철학과로 가지 않고 그냥 경제학 박사과정에 들어가면서 대실망이라고 했던 양반이 바로 김상환 선배다.

 

거꾸로 나에게 경제학과 아담 스미스를 가르켜주고 결국 철학과로 간 선배도 있다. 동국대의 박순성 선배가 그렇다.

 

김상환, 박순성, 그런 사람들이 거의 천둥 벌거숭이이고, 딴따라 출신이고, 할 줄 아는 것은 해금 연주 밖에 모르던, 완전 노나니 패거리였던 나를 붙잡고 경제학과 철학을 가르켜준 사람들이다.

 

그 외에 브로델과 경제사는... 주경철 선배한테 곁눈질 하면서 배웠다.

 

내가 후배들과 후학들에게, 할 수 있는 한 잘 해줄려고 하는 것은, 20대 초반, 아무 이유도 없이 나에게 고전들을 읽을 수 있게 해주고, 책 보는 법을 알려준 선배들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들이 아무 이유도 없이 나에게 뭔가를 알려주려한 만큼, 나는 남에게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그런 마음이 나에게 남아있다.

 

그 중에 내가 가장 고마워하는 사람이 김상환 선배이다. 니체만 배운 게 아니라, 김수영도 그 양반한테 배웠고, 프로이드도 배웠고, 무엇보다... 나에게 생태적 사유를 해보라고 처음 얘기한 사람이 그 시절의 김상환 선배였다.

 

자기는 너무 나이를 먹어서 이제 생태에 대해서 생각하기는 어렵지만, 너는 어리니까 한 번 해보라고 했다. 그 얘기를 들었던 게 스물 두살이었는데, 솔직히 데카르트를 파리 4대학에서 정식으로 공부하는 선배한테 그런 얘기를 들으면서, 가슴이 벌렁벌렁하기는 했다.

 

그러나 나도 김상환 선배가 기대한 대로 살지는 않았다. 그 양반은 내가 프로이드 공부를 더 하고, 철학적인 방식으로 프로이드를 경제학 내에서 재해석하는 공부를 하기를 바랬지만...

 

난 그냥 경제학과 박사과정에 진학했다.

 

그런 게 이리저리 마음에 남아서, 학부 학생들 중에서 철학 전공한다고 하면, 무조건 잘 해준다.

 

괜히 이유도 없이 철학과 학생이 한 명이라도 끼어있는 집단이면, 갈비도 사주고, 삼겹살도 사주고, 회도 사주고, 술도 원껏 사준다.

 

그냥은, 내가 철학 전공했던 선배들한테 받은 것들을 그들의 후배에게라도 갚고 싶은 마음이다.

 

그리고 이 개떡같은 세상에서, 철학 공부하겠다고 하는 인간들이 멸종하는 꼴을 내 당대에 보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제 정신이면, 2009년 한국에서 철학 전공하겠냐?

 

잘난 척도 어렵고, 응용도 어렵고, 먹고 살기는 완전 불가능한, 대한민국의 철학도!

 

(오늘 베르그송 주로 한다는 철학과 학부 학생을 만났다. 가슴이 답답했지만, 한편으로는 기쁘기도 했다.)

 

철학과 수학이라는 두 가지 방법론을 놓고 30대 내내 고민하다가 나는 결국 수학을 선택했다.

 

내 주변에서 같이 공부하는 후배들 중에 철학과 출신은 한 명도 없고, 그 대신 과기고 출신이 굉장히 많다. 내가 수학을 방법론으로 선택했고, 문리적 사유 대신 수리 모델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 속의 빚과 함께 아스라한 그리움은 남는다.

 

그런 이유로, 가끔 만나는 철학 전공한다는 대학생들을 보면, 무조건 밥 사주거나 술 사준다.

 

한국에서 철학을 진짜로 전공한다는 학자는 이제 멸종되는 것일까? 그 멸종의 끝을 보고 싶지는 않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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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diejauchengrube.textcube.com BlogIcon 버러지 2009/08/29 04:06  Addr  Edit/Del  Reply

    에에, 아직 안 죽(었)습니다;;; -蟲-

  2. Favicon of http://proofofyouth.textcube.com BlogIcon 여울바람 2009/08/29 04:19  Addr  Edit/Del  Reply

    동양사학과 지망생도 살다보면 있더군요. 킁.;

  3. 만적 2009/08/29 05:17  Addr  Edit/Del  Reply

    불란서 좌빨 철학자들이 다른 학파와는 다르게 이상할 정도로 팔려대는 것으로 봐서는 잘난척은 아직 일부 가능하다는.. 다만 분석철학 중세철학 이런게 잘난척과 거리가 아주 먼 ㅈㅈ

    • ... 2009/08/29 12:54  Addr  Edit/Del

      -_-;;;...
      분석철학 하는 사람들 잘난척이 얼마나 쩌는데요.
      철학과 전공수업은 아니고 세미나 같은 거 아무거나 한번 들어와 보세요.

    • 만적 2009/08/29 22:05  Addr  Edit/Del

      그래봐야 철학과 밖에선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요. ㅋ 유명한 저자들 가운데 팔리는 사람도 없고.

    • K군 2009/08/30 01:06  Addr  Edit/Del

      바꿔서 이야기하면, 프랑스철학은 철학 내부에서는 많이 무시당하고 있는거죠.

    • 만적 2009/08/31 10:58  Addr  Edit/Del

      전설적 인물인 콰인의 저술 번역본이 딱 하나 있는걸로 봐서는 분석철학 수용 역시 충분하다고 생각하기 힘듭니다.

  4. 봄봄 2009/08/29 07:19  Addr  Edit/Del  Reply

    생태적 사유, 요즘 제가 고민하는 내용인데..20년도 더 된 옛날에 그것을 권유하는 선배가 있었다니.. 참 복도 많으십니다.

  5. wissenschaft 2009/08/29 08:58  Addr  Edit/Del  Reply

    근근히 버티고 있는 철학도 입니다...

  6. 2009/08/29 13:25  Addr  Edit/Del  Reply

    비밀댓글입니다

  7. 남이사 2009/08/29 13:46  Addr  Edit/Del  Reply

    부럽습니다...
    그래도 김상환 교수님 같은 선배를 두셔서...

    김상환 교수님 글 읽으면서 글 참 잘쓰신다는 생각을 한두번 한게 아닌데...한국에 이런 철학자가 있을까 할 정도로... 사실 프랑스 철학 관련 논문에서 김상환 교수님 굉장히 자주 인용되는게 우연은 아닐껍니다...

  8. 올가 2009/08/29 20:06  Addr  Edit/Del  Reply

    철인정치로 세상에 우뚝 섰던 그 남자 YS

    • 미쵸 2009/08/30 02:04  Addr  Edit/Del

      아 진지한 우선생님 글이랑 댓글들 보다가 갑자기 빵 터졌잖아요 ㅋㅋㅋㅋㅋㅋ

  9. Favicon of http://blog.daum.net/dununorg/?t__nil_login=myblog BlogIcon 두눈 2009/08/29 21:47  Addr  Edit/Del  Reply

    아 김상환 선생님에게 철학을 배우셨군요^^

    저는 손톱으로 작업을 하고 있고 현재는 아트메신저를 총괄하고 있는 두눈이라고 합니다.

    대학원 시절 <손톱을 매개체로한 순수의 역설적 표현>논문을 쓰면서 김상환 선생님의 글을 접하게 되었지요

    이글을 보니 전 찡해졌고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건승하세요

  10. Favicon of http://zenovelist.tistory.com BlogIcon zeno 2009/08/30 01:09  Addr  Edit/Del  Reply

    흠, 그랬었군요.. 한국에서 경제학과 학부 나와서 대학원가서는 정치경제학 공부 못 할 거 같아서 대학원을 사회학이나 서양사학 쪽으로 우회하려고 생각중이었는데 수학 대신 철학을 방법론으로 삼아서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감사합니다. :)

  11. BlogIcon 알레퀸 2009/08/30 01:19  Addr  Edit/Del  Reply

    2학기에 김상환 선생님께 수업받을 예정인데, 우석훈 선생님 추억담을 들으니 더더욱 기대가 됩니다. XD

  12. zack 2009/08/30 16:39  Addr  Edit/Del  Reply

    철학, 사학... 애초에 가짜로 태생한 학문입니다.

    철학이 안되는 이유는 이것 때문입니다.

    사학도 마찬가지...

  13. Favicon of http://parkuser.textcube.com BlogIcon life is beautiful 2009/08/30 18:06  Addr  Edit/Del  Reply

    선생님을 보면서, 인생을 새롭게 깨닫습니다.

    하루에 한번 꼭 선생님의 블로그에 와서,

    글을 보게 되는데, 무언가 모를 지식이

    숨가쁠 정도로 제 안에 들어오는 것을

    저도 모르게 느끼게 됩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앞으로 깨우칠 수 있는 희망을 주셔서...

  14. ngo의시대 2009/09/01 00:29  Addr  Edit/Del  Reply

    사범대생이었지만 나름 철학에 관심이 많아서 교양강의를 몇 번 들었는데 봄에 졸리는 건 어쩔 수 없더군요. 아~ 어려운 철학강의 듣기여...